2011년 12월 17일 토요일

채널A? <동아일보>는 1975년에 죽었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1-12-16일자 사설 '채널A? 는 1975년에 죽었다!'를 퍼왔습니다.
[프레시안 books] 김삼웅의

이태 전쯤 인터넷을 뒤지다가 간부가 쓴 묘한 칼럼을 발견했다. 이른바 '87년 체제'를 낳은 1987년 6월 항쟁 때 동아일보가 한 대단한(?) 역할을 강조하면서 그때 태어나지도 않은 가 무슨 할 말 있느냐고 힐난하는 투의 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무슨 망발이냐고 블로그에 몇 자 썼더니 댓글들이 붙었는데, 그 중에 기가 막힌 게 있었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목숨을 걸고 맨 처음 보도한" 사람이 동아일보 아무개 기자였다며, 를 "악질적 옐로페이퍼"로 몰더니 이런 댓글을 하나 더 달았다.

"한마디만 더 하지요. 유신 시대에 동아투위, 조선투위가 얼마나 처절하게 유신정권에 저항했는지 한번 찾아보세요!"

이 득의양양 용감무쌍한 '논객'은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조선투위(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그 신문사 재직 기자들 조직이고, 그들이 속한 그 신문들이 피눈물 나게 싸운 덕에 저 역사적 6월 항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고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따위가 어디 감히! 뭐 그런 식이었는데, 칼럼을 쓴 간부의 의식 수준이 설마 동아투위, 조선투위가 그 신문사들 전위 조직쯤 되는 걸로 여긴 그 '논객'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그 양자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 1987년 여름 전두환 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휩쓸고 지나간 뒤 열리기 시작한 좁다란 자유의 공간을 비집고 노동자들의 대투쟁이 시작됐다. 그때 창원 공단에 그걸 취재하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갔던 나는 혼쭐이 났다. 지게차를 끌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현장 노동자들이 삽시에 나를 에워싸였다. 그들은 험악한 소리를 내지르며 카메라를 빼앗더니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박살난 카메라를 아까워하기는커녕 미처 뭐라 항변할 새도 없이 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내 멱살을 잡았다. 그 긴박했던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지만, 단말마의 비명과 외침이 오가는 우여곡절 끝에 어쨌든 간신히, 무사히 풀려났다.

그때 그들이 외친 구호가 놀랍게도 "기자들 다 죽여라!"였다. 설마 살인을 저질러도 좋다는 얘긴 아니었겠지만, 그만큼 언론사와 기자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는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격했다. (어쩌면 속으로 타고 있을 뿐,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때 그런 시위 현장에서 기자들은 기자가 아닌 양 행세해야 했다. 그런 판에 떡 하니 카메라를 들고 나가 겁 없이 여기저기 겨누며 셔터를 눌러댔으니.

그 시기를 직접 겪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당시 기자들은 그들에겐 거의 공적, 공공의 적이었다. 칼럼을 쓴 간부가 완전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그때 그나마 한두 줄짜리 시국 관련 기사들을 흘리고, 아주 완곡하게 에둘러가긴 했지만 그래도 그 서슬 퍼런 체제에 싫은 소리를 하는 지사풍의 용감한 칼럼니스트들 글을 가끔이나마 내보낼 수 있었던 매체는 가 거의 유일했다. 그 정도는 분명 평가할 수 있다. 살벌했던 당시 상황에서 행보다는 행간을 읽어야 했던 일부 사람들에게 는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기자들 다 죽여라!"는 시위 군중의 구호가 상징하듯, 그때 한국 주류 언론은 사실상 완전히 죽어 있었다. 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얼음 밑에서도 살아 움직이던 양심적인 기자들이 아주 없진 않았고 당연히 그들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겠지만, 칼럼을 쓴 그 간부처럼 가 그렇게 으스댈 만한 역할을 한 건 전혀 아니었다고 해도 좋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옳지.

1975년 3월 15일 당시 편집국장 송건호가 사표를 냈다.

"한 둘도 아니고 수십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양심상 도저히 그 자리에 그냥 눌러 있을 수가 없었다. 50여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한다는 것은 죽으면 죽었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도 사랑하는 처자가 있고 설혹 방법상 다소 이견이 있더라도 언론의 독립과 자유라는 어느 시대에 내놓아도 떳떳한 명분을 가지고 투쟁하는 그들을 해임할 수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번 파동도 나를 위해 생긴 일이 아니었던가."


▲ <송건호 평전 : 시대가 투사로 만든 언론 선비>(김삼웅 지음, 책보세 펴냄). ⓒ책보세
그 전 해인 1973년 10월 23일 서울대학교 농업대학 학생 김상진이 유신 철폐를 주장하며 자결했다. 격렬한 교내 시위가 벌어졌지만 신문과 방송은 침묵했다. 그때 유일하게 1단짜리 기사로나마 그 소식을 전한 것이 였고, 그렇게 하도록 지시한 사람이 편집국장 송건호였다.

보이지 않는 행간을 읽어야 의미를 제대로 짐작할 수 있는 그 짤막한 기사가 나간 날 낯선 세 명의 기관원들이 들이닥쳐 송건호를 연행했다. 그렇게 연행될 줄 알고 그는 미리 속옷을 두툼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한 번 가면 열다섯 시간은 족히 걸리는, "언제 끌려가도 기분 나쁜" 그 연행, 그가 "나를 위해 생긴 일"이라고 했던 그 "파동"을 낳은 연행이 그렇게 시작됐다.

기자들이 농성을 시작했고 다음날인 10월 24일 등의 기자 180여 명이 박정희의 유신 독재 이후 미동도 하지 않던, 나중에 폭로된 '보도 지침'에 압축된 끔찍한 언론 통제 체제에 대한 선전 포고인 '자유 언론 실천 선언'을 발표했다.

"신문·잡지·방송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하고,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하며,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체 거부하고, 동료 기자가 연행되면 풀려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결의한다."

기자들의 자유 언론 수호 운동은 1973년 가을부터 시작됐으나 1974년 1월 초법적인 대통령 긴급 조치 선포로 움츠러들었다. 기자들은 무시로 연행됐고 구속당했으며 잘렸다. 당시 독재 정권은 일본 서울 지국까지 폐쇄하고 특파원을 추방했으며 국내 수입·배포도 금지했다. 방위병이 변심한 애인 집에 가서 불을 질러 집이 좀 타다 만 사건을 짤막하게 내보냈다고 와 편집국장들을 비롯한 10여 명이 끌려갔다.

신문사에 상주하며 기사 내용과 형식까지 통제하던 기관원들은 그들을 붙잡아다 놓고 "군과 민간을 이간질시켰다"며 '빨갱이'로 몰았다. 서울 달동네 연탄 값이 아랫마을보다 세 배나 더 비싸다는 기사를 쓴 기자는 상을 받는 대신 "민중 봉기를 획책했다"는 이유로 끌려가 죽도록 맞았다. 대학생 김상진이 할복 자결을 결심한 시절의 세상 꼴이 그랬다. 신문·방송 뉴스의 내용과 크기를 결정한 건 그들 기관원이었다.

기자들과 거의 동시에 기자들 150여 명도 자유 언론 실천 선언을 발표했다. 긴장한 정권은 신문사 사주를 압박해 수십 명의 기자들을 해고하고 윽박지르는 공작을 벌이다가 그게 먹혀들지 않자 직접 칼을 빼들었다. 1974년 12월 10일부터 시작된  광고 해약 사태가 그것이다. 다음해 1월 25일까지 광고의 98퍼센트가 떨어져 나갔다. 에 광고를 계속 실었다가는 기업이 망할 판국이니 광고주들도 어쩔 수 없었다.

1974년 12월 26일부터 광고 지면이 활자가 완전히 빠져버린 채 하얗게 나간, 언론 역사상 특기할 만한 백지 광고 사태가 시작되자 그 빈자리를 시민들이 자발적 개인 광고로 메우기 시작했다. 1975년 5월까지 하루 평균 350건, 모두 5만 건에 이르는 개인 광고들이 광고 지면을 장식했다. 봉기에 가까운 시민 저항이었다.

이 뜻하지 않은 사태 전개에 당황한 권력은 마침내 사주를 압박해 기자들을 무더기로 몰아냈다. 160여 명의 기자들, 30여 명의 기자들이 그때 쫓겨났다. 죽었으면 죽었지 그 쫓아내는 역할을 내 손으론 못하겠다며 스스로 자신을 자른 사람이 바로 송건호였다.

한국 언론사, 아니 한국사를 바꾼 그 사건으로 는 그때 다시 죽었다. 식민 지배자들이 폭발을 막기 위해 내준 '바람구멍'이었던 , 는 1930년대 일제에 완전히 투항하면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민족주의적 색깔마저 버렸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과 함께 그들은 그때 죽었고, 광복 뒤 미국 점령군 치하 친일파 대변지를 자임하면서 거듭 죽었으며, 1975년 그때 또 죽었다. 그 이후, 는 살아났나?

저 용감무쌍한 '논객'이 얘기한 동아투위, 조선투위는 , 기자들이 제대로 된 보도를 쟁취하기 위해, "처절하게 유신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 아니라 유신에 철저하게 복무한 유신 기관지 , 와 싸우다 쫓겨난 기자들이 그 신문사들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 만든 조직이라는 사실조차 그 논객은 몰랐던 것이다.

그 자신 그 엄혹했던 시절의 투사요 기록자였던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책보세 펴냄)는 그 시절을, 송건호의 일대기를 매개로 일목요연하고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한다.

쫓겨난, 아니 자신을 쫓아낸 송건호는 당신께서도 거듭 자인했거니와 결코 타고난 투사가 아니었다. 통상적 의미의 대범과 호방도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를 진짜 투사로 단련시킨 건, 예컨대 이런 가혹한 현실이었다.

"아이들 여섯을 데리고 어떻게 사나? 다음 달은 어떻게 사나? 아니 내년엔 어떻게 될까? 온갖 잡념이 거의 24시간 쉴 새 없이 나를 괴롭혔다. 불안과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1976년이 되고 다시 77년이 되면서 처음 매일같이 집요하게 못살게 굴던 공포가 사나흘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것이었다. 사나흘간은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별 탈 없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안 공포가 찾아왔다. 이럴 때는 거의 미칠 것 같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어쩌자고 이렇게 멍하니 있기만 하는가, 수입도 없고 하는 일도 없이 어떻게,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면 거의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 세월은, 나이 쉰에 직장에서 쫓겨난 바로 그 다음날부터 줄곧 이어졌다. 다음해 12월 세상을 떠난 어머니 임종도 하지 못했다. 노모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여섯 자녀를 거느리고도 돈 한 푼 못 버는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며 눈을 감았다"는 얘기를 "원고 집필에 바빠" 그는 전해 들어야만 했다. 편집국장 직을 쫓겨나자마자 생계를 감시와 억압 속에 이런 집필과 강연으로 꾸려야 했던 간난의 세월은 송건호를 좌절시킨 게 아니라 뛰어난 한국 현대사 연구자로 만들었고 그를 불퇴전의 재야 운동가로 단련시켰다.

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창원 공단에 카메라를 들고 간 것은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가 펴낸 비합법 지하 매체 기자로서의 현장 취재 때문이었다. 여기저기서 고함소리와 함께 다짜고짜 달려들어 내 멱살을 쥐었던 사람들에게 나는 거듭 외쳤다. "난 지 기자요!" 다행히 그들 중에 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고 약간의 설명 끝에 나는 풀려났다. 비싼 것도 아니었지만 카메라가 박살난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맞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1985년 5월에 창간호를 낸 그 을 만든 사람들이 동아투위, 조선투위 사람들이었고 송건호가 그 중심에 있었다. 1984년에 만들어진 민언협 기관지 이야말로 그 시절 다른 어떤 매체보다 언론 본연의 자세에 충실했던 언론 매체다. 을 특집호로 제작해 만천하에 그 존재를 드러내고,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협의해 세상에 공표한 것도 민언협과 이었다. 그나마 가 1단짜리로 가끔 실었던, 군사 정권이 보도 절대 엄금 지침을 내렸던 숱한 사건들과 그들의 구미에 맞지 않았던 세상 변화를 당시 가장 충실하게 보도한, 유일한 매체가 이었다.

비밀 장소에서 편집하고 식자 찍어 대장을 만들고 비밀리에 인쇄해 비밀리에 배포해야 했다. 들키면 모든 걸 압수당했고, 압수를 피해도 배포된 뒤 예외 없이 사무총장 등이 1주일 이상의 구류를 살아야 했던 은 전국적 배포망을 지닌 나름 인기 높은 매체였다. 송건호가 대표하는 민언협 멤버들과 민주화 운동 세력의 소식지 이 '87년 체제' 창출에 수행한 역할을 뒷날 역사 연구자들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6월 항쟁 당시의 전국 상황을 기자들을 현지에 파견해 가장 먼저 종합 정리한 매체도 이었고, '6월 항쟁'이란 말 자체를 '6월 항쟁 특집호' 제목으로 뽑아 그 시대의 상징어로 만들고 정착시킨 것도 이었고 민언협이었다. 그때 우리는 1946년 대구를 뒤흔들었던 10월 항쟁을 생각했다. 이 합법 매체로 기자들이 제 이름들을 밝히는 기명 기사를 쓰기 시작한 건 87년 체제 이후의 일이다.

그러니까, 이태 전 동아일보가 6월 항쟁에서 한 역할을 자랑하며 당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가 한 게 뭐냐고 묻던 그 간부의 칼럼은 의도적인 것이든 무지에서 비롯됐든 잘못된 것이다. 6월 항쟁 주역이 민언협 멤버도 그 한 축을 이뤘던 시민 운동 세력, 민주화 운동 세력이었다면 6월 항쟁의 정신을 고취하고 87년 체제를 만들어내는데 는 기념비적인 공을 세웠다.

왜냐하면 야말로 바로 와 가 쫓아낸 해직 기자들이 중심이 돼 만든 민언협과 의 모태로 태어난 것이며, 87년 체제의 가장 의미 있는 성과물 중의 하나가 국민주 형태로 모금해 주주가 6만 명이 넘는 의 탄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서 지금도 그 평가에 걸맞게 잘 하고 있느냐는 핀잔과 비판을 받기도 하는 에 대한 평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은 그때의 그 세계를 송건호 자신의 얘기와 증언들을 인용해 압축적으로 요약하면서 김삼웅 사관에 입각해서 평가한다.

그 용맹무쌍한 '논객'이 얘기한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목숨을 걸고 맨 처음 보도한" 아무개 기자를 1998년 도쿄에서 만났다. 그리고 2년쯤 뒤 그는 급성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훌륭한 기자였고 품성도 좋은 사람이었다. 그때가 이른바 'IMF 사태'로 불린 외환 위기 시절이었는데, 도쿄 특파원들은 갑자기 치솟은 원화 환율 때문에 실질 소득이 줄어 고생들을 했다. 도쿄 생활 비용은 차차 환율에 맞춰 조정이 되긴 했지만, 각사는 특파원 수를 줄이거나 아예 철수시키기도 했다.

의 그 기자는 그때 갑자기 불어난 일의 무게에 눌려 무척 힘들어 했다. 더 많은 술을 마셔야 하는 일을 덤으로 더 해야 했다. 1999년 연말연시든가 등산을 갔다가 통증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그는 그게 계속되자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의 일본인 의사는 당장 수술을 받든지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든지 하라고 재촉했다. 서둘러 귀국하던 그와 그의 가족을 그의 집에서 동료 특파원들이 함께 모여 송별회 같은 걸 한 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 유족이 그의 산업재해 인정 여부를 놓고 회사와 소송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도 회사는 산재 인정을 거부하고 있었다. 에는 그런 좋은 기자들이 많았지만, 160여 명의 기자들을 한꺼번에 쫓아낸 그 회사가 그 뒤에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줬는지는 잘 모르겠다.

김삼웅이 인용한, 김대중 내란 음모죄라는 날조 사건에 영문도 모른 채 연루돼 잡혀 들어간 뒤 당한 지독한 고문 후유증이 분명한 파킨슨씨병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던 시절의 송건호 생애 마지막 저서 (1990년) 서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민족은 분열되어 서로 증오하고 국토도 분단되어 내 땅이면서도 마음대로 오가지도 못하고, 오늘은 여기에 붙었다가 내일은 저기에 붙고 외세에 아부하고 친해야만 '애국자' 소리를 듣는, 거꾸로 된 이 세상 더러운 시대에 왜 생을 얻어 이 고생인가 싶다. 내 죄와 고민은 하늘만이 심판할 수 있다."

김삼웅이 "모든 진정한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고 한 이탈리아 역사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의 말, 그리고 "역사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고 가장 현실적인 의미에서 현재에 관한 학문"이라는 스페인 생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을 인용한 건 바로 송건호 한국 현대사 연구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바로 그가 때론 남루하게, 절박하게, 눈물을 흘리고 피를 토하며 살아간 그때 한국이라는 나라의 '현재'였기 때문이다.

12호에 실린 '현대사 연구의 이모저모'(1992년)에서 송건호는 말한다.

"평생을 바친 언론계를 떠나 감시 속에서 괴로운 생활을 하다 보니 인생을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고 점차 현대사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는 괴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양심을 지키고 항일 운동을 한 애국선열들이 어떤 생활과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가를 알고 싶었다. 이리하여 나는 점차 현대사 연구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많은 자녀를 데리고 학비를 마련해야 할 경제적 곤궁과 권력의 감시 속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현실의 고통과 위기야말로 송건호 현대사 연구의 출발점이었고, 그 현실의 실천적 필요성, 절박성에 쫓긴 현재의 눈으로 한국 근현대를 재해석한 것이 그의 한국 현대사 연구였다. 모든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필요와 절박이라는 실천적 욕구를 통해 걸러지고, 재해석되고, 재구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모두, 예외 없이 현대사다. 달리 말하면, 그런 현재의 실천적 문제의식 없는 역사연구는 제대로 된 연구가 아니거나 의미 없는 헛짓이다.

송건호가 자신의 고통과 절박과 문제의식을 만들어낸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극히 실천적인 필요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들어가 파헤친 한국 근현대 역사의 진실은 식민 지배와 친일파, 일제를 대신한 미국의 한반도 분단과 친일파 기용을 통한 식민 잔재 재생산, 반공을 방패로 살아남은 친일파와 그들이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분단 모순, 민족 모순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개인적 야망과 '현실의 길'을 택한 기회주의적 국민주의자 이승만, 그 개인보다는 공공과 역사의 길을 택한 민족주의자 김구 등 그의 집요한 인물 탐구도 결국 송건호 자신이 그런 현실에서 어떤 좌표를 설정하고 살아갈 것인지 끊임없이 자문한 실존적 고뇌와 연결돼 있다. 그는 김원봉과 의열단 연구까지 나아갔다. 일제-이승만-박정희 등등으로 이어진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가 택할 길은 자명했다. 그는 역사의 길을 택했고 죽는 날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십중팔구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연구자의 존재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 이 위험한 주제를 한국의 역사 연구자들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그들은 고대, 중세, 전근대라는 안전지대로 도피했다. 그 공백을 식민사관과 그 변주인 뉴라이트 사관이 차지했다. 한국 현대사 연구자 송건호의 또 다른 위대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터부를 과감하게 깨뜨렸다는 것이다. 등에 담긴 그의 생각은 청년들과 역사 연구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김삼웅 버전의 송건호 평전은 그의 이런 측면을 잘 드러낸다.

저 용맹무쌍 '논객'이 송건호와 이런 역사를 알았을 리 없다.

광복 65년이 넘도록 주류 국민주의 현실론자들이 신문 시장의 75퍼센트를 장악하고, 방송까지 합하면 90퍼센트 이상의 여론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주류가 터부시하고 위험시하고 심지어 탄압까지 하는 그런 위험한 역사를 모르는 게 당연할 것이다. 일제에서 미국, 분단으로 이어진 시대를 통틀어 여전히 군림하고 있는 그런 주류가 재해석하고 재구성한 세계에서 줄곧 살아왔으니까.

이건 바꿔 말하면, 송건호가 온몸으로 저항하며 찾아 헤맨 저 시대의 과제, 문제의식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펄펄 살아 있다는 얘기가 된다. 게다가 저들은 종합 편성 채널이라는 터무니없는 장치까지 만들어 기득권을 다지는 한편 반복 선전을 통해 특권유지의 기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단속하고 있다.

드라마 의 본원 정기준처럼. 송건호는, 말하자면, "역병처럼 번져가리라" 세종이 예언했던 한글처럼, 기득권의 역사를 뒤엎을 씨앗을 뿌렸다. 그것이 역병처럼,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기를 선지자 송건호도 바랐을까.



/한승동 논설위원

[사설] 여성 인권에 소극적인 여성부, 존재 이유가 뭔가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1-1216일자 사설 '[사설] 여성 인권에 소극적인 여성부, 존재 이유가 뭔가'를 퍼왔습니다.
여성가족부에 대한 여성계의 불신이 커지고 있다. 여성부 해체와 김금래 장관 퇴진을 요구하는 여성단체의 성명이 나올 정도다. 여성부가 핵심 과제인 여성 인권 보호에서 제구실을 다하지 못했다는 게 비판의 이유다. 여성부는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냉철히 반성하고 적극적인 자세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여성부가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현대자동차 하청업체에서 해고당한 성희롱 피해자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문제에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성희롱 피해여성의 경우, 지난 1월국가인권위로부터 성희롱을 인정받았지만 복직이 되지 않아 여성부 건물 앞에서 200일 가까이 농성을 해왔다. 그러나 여성부는 “피해자를 도울 법적 권한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별다른 지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또 김 장관은 지난달 이 여성을 면담하면서 “(회사와의) 소송에서 이겨도 복직이 어려우니 다른 곳에서 일하며 피해보상을 받아라”는 취지의 말까지 했다고 한다. 성희롱을 폭로했다가 되레 해고를 당한 피해자를 감싸안기는커녕 가슴에 큰 상처를 준 것이다. 여성부는 또 군대위안부 할머니들의 1000회 수요시위에서 한-일간 논란이 된 ‘평화비’를 놓고도 사실상 뒷짐만 졌다. 외교문제로 비화할 수 있으니 신중해달라는 외교통상부의 요청을 받고 그저 눈치만 본 것이다.
여성부는 이처럼 제 할 일은 못하면서 엉뚱한 곳에서 사회적 갈등만 증폭시키기도 했다. 가사에 ‘술’이 들어 있는 노래들을 무분별하게 ‘19금’ 판정했다가 망신을 산 것이 대표적이다. 16살 미만 청소년에 대한 심야 인터넷 셧다운제 역시 자유 침해 논란을 낳고 있다.
여성부의 소극적 태도와 관련해선 김금래 장관에게 아쉬운 대목이 많다. 전임 백희영 장관과 달리 김 장관은 여성단체협의회 사무국장,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간사(한나라당 비례대표)를 지내는 등 여성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런데도 여성 현안에서 두드러진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장관이 된 지도 3개월이 지났으니 시간을 핑계로 댈 처지도 아니다.
여성부는 늘 “다른 부처에 비해 법적 권한이 없다”는 말로 무기력을 호소한다. 하지만 권한이 제한적이기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 외엔 다른 살길이 없다. 현안에 침묵하면 여성부의 존재감은 완전히 사라진다는 사실을 김 장관은 명심해야 한다.

[사설] 김준규 전 총장의 정권 협박성 발언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1-12-16일자 사설 '[사설] 김준규 전 총장의 정권 협박성 발언'을 퍼왔습니다.
김준규 전 검찰총장이 재임 시절 로비스트인 문환철씨의 소개로 이국철 에스엘에스(SLS) 회장을 만난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검찰 총수가 재판이 진행중인 사건의 피고인을 만난 것부터 부적절하기 짝이 없지만 더욱 해괴한 것은 그의 변명 태도다.
그는 엊그제 기자회견을 자청해 “총장으로서 상황 판단을 하기 위해 만난 것”이라고 해명하면서 매우 묘한 말을 남겼다. “내가 열 받아서 (총장 때 일을) 다 까버리면 국정운영이 안 된다”는 발언이다. 전직 검찰총장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발언이다. 예전에 장세동씨가 “내가 입을 열면 국가와 국민이 불행해진다”는 말을 한 적도 있지만, 김 전 총장의 발언은 이에 못지않다.
김 전 총장의 발언은 아무리 봐도 현 정권과 검찰에 대한 경고 내지 협박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검찰로서는 이 회장이 비망록을 통해 주장해온 내용이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남에 따라 구명로비 의혹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가 불가피한 형편이 됐다. 원칙적으로 김 전 총장도 수사 대상에서 예외일 수 없다. 게다가 김 전 총장은 “1심 재판이 끝난 시점에 이 회장을 강남의 한 레스토랑에서 한번 만났다”고 주장했으나, 이 회장은 “지난해 10월과 올해 1월 각각 남산의 한 클럽과 강남의 고급식당에서 두 차례 만났다”고 주장했다. 창원지법에서 1심 재판이 끝난 것이 2010년 11월19일이었으니 김 전 총장은 1심 재판이 진행중인 시점에도 이 회장을 만난 셈이 된다. 이런 기초적인 사실관계부터 확인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 전 총장은 누구보다도 현 정권의 비밀과 구린 구석을 시시콜콜히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재임 시절 다룬 사건만 대략 꼽아봐도 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 한상률 전 국세청장 수사, 에리카 김에 대한 면죄부 등 핵폭탄급 사건들이 널려 있다. 하나같이 진실이 밝혀지면 정권의 명운을 뒤흔들 사건들이다. 하지만 김 전 총장이 재임중 취득한 비밀을 개인의 방패막이로 삼는다면 너무나 비겁하고 치졸하다. 정말 묵과할 수 없는 정권의 잘못이 있었다면 이를 낱낱이 밝혀 역사의 교훈으로 남기는 게 오히려 올바른 태도다. 검찰 역시 김 전 총장의 협박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검찰이 이 사건의 흑막을 얼마나 철저히 파헤칠지 지켜보겠다.

2011년 12월 16일 금요일

검·경, MB 입김 벗어날까? 스스로 채운 족쇄 탓에…


이글은 프레시안 2011-12-16일자 기사 '검·경, MB 입김 벗어날까? 스스로 채운 족쇄 탓에…'를 퍼왔습니다.
[분석] 정권 말, 위기의식에 휩싸인 검찰과 경찰의 속내

이명박 대통령의 고려대학교 후배인 조현오 경찰청장과 한상대 검찰총장이 버티고 있는 경찰과 검찰이 모두 난관에 처했다.

수사권 조정을 둘러싸고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두 권력기관은 여론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인진 몰라도, 나름대로 권력 핵심에도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 과정에서 '경찰청장과 검찰총장의 영향력이 옛날만 못하다. 실무선에서 거침없는 모습을 보인다'는 말까지 들렸다. 하지만 양 쪽 다 구태의연한 벽에 부딪히는 모습이다.

중앙선관위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 공격을 수사하다가 한나라당 의원 비서 연루사실을 밝힐 때 만해도 경찰에 대해선 긍정적 측면에서 "의외다"는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연루자들의 석연찮은 금전거래를 "문제없다"고 덮고 지나간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역시나"로 바뀌고 있다. 역시 권력 앞에 취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 아니냐는 것.

검찰도 마찬가지다. 이국철 SLS회장의 폭로 직후인 지난 9월 29일 권재진 법무부 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터무니 없는 이야기"라고 신빙성을 깎아내렸지만 결국 검찰은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 쪽에 칼을 들이댔고 영부인의 사촌오빠까지 구속시켰다. 참으로 오랜만에 권력핵심에 다가간 것. 하지만 김준규 전 검찰총장이 로비스트인 문환철 대영로직스 대표의 주선으로 이국철 회장을 만나 식사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게다가 이국철 비망록에는 수억 원을 줬다는 검찰 간부가 몇 명 적시되어있다.

이런 까닭에 양 기관 관계자들은 "지금은 정권과 관계 수뇌부가 어떻게 되느냐 차원이 아니라 우리 조직 전체에 대한 문제"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 지난 달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장 밖에 경찰 인사들이 붙여놓은 대자보ⓒ프레시안

"우리가 봐도 할 말 없는 면이 있다"는 경찰

먼저 경찰에선 허탈한 표정까지 읽힌다. 한나라당 비서 연루 사실을 밝혀내고 즉시 공개한 것은 경찰 입장에선 상당한 개가였다. 한 때 열린우리당 영입설이 나왔을 정도로 경찰 내 개혁적 인사인 황운하 경무관이 수사기획관으로 수사를 총괄한데 대해선 야권에서도 높은 평가가 나왔었다.

하지만 디도스 공격 전날 식사 자리에 있던 한나라당 보좌진, 청와대 관계자 누락, "9급 비서 공 모 씨의 단독범행"이라는 결론 발표, 박희태 국회의장 비서 김 모 씨와 이미 구속된 사건 연루자 사이 1억 원 돈 거래 사실을 포착해놓고도 덮어준 것 등이 속속 드러나면서 경찰은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조현오 청장이 수사발표에 손을 댔다"고까지 주장했다.

이에 대해 경찰청의 한 소장그룹 간부는 "딴 건 몰라도 조 청장이 발표문에 손 댔다는 주장은 정말로 사실이 아니다"고 항변했다. 이 간부는 "황(운하) 수사기획관도 그렇고 '수사권 조정도 있는데 우리가 누구 봐주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있는대로 가자'는 분위기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간부는 "이른바 정무적인 부분이나 수사 부분 모두 미흡한 것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1억 원 돈 거래 부분, 청와대 행정관과 일부 보좌관의 식사 사실을 처음에 밝히지 않은 것 등 언론과 야당이 지적하는 사실을 수긍하는 분위기다. 이 간부는 "그냥 눈에 보이는 것, 나오는 증거와 진술만 보고 수사하는데 급급했다는 생각도 든다. 좀 더 크게 봤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찰 내부에서조차 선관위 디도스 공격이 9급 비서 단독소행이라고 보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인심 잃을 일만 남았다"

현재 디도스 문제와 관련해선 국회 주변에서 상당히 구체적인 추가적 그림이 나돌고 있다. 이 간부는 "민주당 쪽에도 상당히 제보가 많이 들어오는 것 같다"면서 "검찰도 꽃놀이패 아니냐. '끝'까진 안 간다하더라도 우리보다 플러스 알파만 해도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대 출신의 다른 간부도 "정권 초 같으면 한나라당 비서 연루 사실조차 제대로 안 나왔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전 같으면 디도스 공격 루트가 중국이나 필리핀 쪽이라 더 이상 추적이 안 된다는 식으로 넘어갔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이 간부는 "그럴수도 있다"고 답했다.

그는 "정치적 부담을 지고 나름대로 세게 간 것인데, 모양이 이렇게 돼서 화가 난다"면서 "조현오 청장이 어쩌고, 다음 청장이 누구고 문제를 떠나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고 덤으로 수사권조정 문제에서도 명분을 더 세울 수 있는 기회였는데 완전히 물 건너 갔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제 선거철에 선거사범, 각종 SNS 신고, 시위진압까지 겹치면 인심 잃을 일만 쌓여있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권력에 칼 들이댄다. 그런데 검찰 간부 관계 되는 건 빼고"

이상득 의원 직접 소환까지 만지작 거리고 있는 검찰에 대해선 "더 세게 나갈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요즘 나오는 측근 비리, 권력형 비리에 대해 세게 간다는 분위기더라"면서 "청와대가 한상대 검찰총장하고는 잘 통하는지 모르겠는데, 그 아래 쪽하고는 잘 안 통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검찰의 칼이 이상득 의원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서초동 검찰 청사와 국회 주변에선 "털기 시작하면 이전 사안들도 다시 나오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민간인 뿐 아니라 이상득 의원에 각을 세운 남경필, 정두언, 정태근 의원 주변을 사찰한 영포라인의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문제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이어진 태광실업 특별세무조사지시 의혹 등 초대형 정치적 사안들이 재점화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설이다.

하지만 이 변호사는 "지금 나오는 비리 건들이야 세게 붙겠지만 그런 문제를 지금 다시 파고들진 못할 것이다. 그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현직 간부들이 관련된 것 아니냐"고 말했다.

민간인 사찰, 노 전 대통령 관련 사안 등은 이미 검찰이 면죄부를 준 사안일뿐더러 욕 먹으면서 그 사건 담당한 사람들이 모두 승승장구해서 지금 고위직에 있으니 만큼 정권이 바뀐 이후에야 건드릴 수 있을 것이란 이야기다.

결국 힘이 빠져가는 권력에는 메스를 들이대지만 자신들이 관련되는 사안은 우회해 갈 것이라는 관측이다. 다른 법조계 인사도 이같은 시각에 동의하면서 "문제는 이국철 게이트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정치권 인사야 나오는데로 처리하면 되지만 현직 검찰 간부는 어떻게 할 것이냐가 고민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국철 비망록의 나비효과가 검찰개혁?

이 인사는 "이국철 비망록에 현직 간부들이 몇 억 씩 먹었다고 나와 있다는 것 아니냐. 야당도 치고 여당도 치는데 검찰이 자기 식구들만 못 건드린다? 이건 검찰 조직을 위기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검찰이 청와대에 종속됐었다는 비판은, 노무현 정부를 제외하곤 항상 듣던 말이라고 볼 수도 있고 정권이 바뀌고 나면 수뇌부 물갈이로 대응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국철 게이트 는 다른 파장을 낳을 수 있다.

먼저 지방청의 토호밀착형 검사들이 스폰서 받는 차원을 넘어 본청 간부들이 벼락부자형 사업가로부터 수억 원 씩 받은 것은 일단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검찰이 이 의혹을 뭉개고 갈 경우 수사권 조정에 불리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차기 정부가 대대적으로 검찰 조직 자체를 수술할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는 말이다.

문재인 혁신과통합 상임대표는 는 책까지 냈다. 야당에는 "우리가 정권을 잡으면 뭐니뭐니해도 검찰은 확실히 손을 봐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검찰 스스로가 차곡차곡 명분을 제공해주는 모양새다.



/윤태곤 기자

"후쿠시마 핵재앙, 4~5년 후에는…"


이글은 프레시안 2011-12-15일자 기사 '"후쿠시마 핵재앙, 4~5년 후에는…"'을 퍼왔습니다.
[인터뷰] '쿠마토리 6인' 원자력 전문가 이마나카 데츠지

내년 3월이면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난 지 1년이 된다. 그러나 여전히 사고는 수습되지 않았을 뿐더러 방사능오염의 정도와 건강에 미친 영향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식품에서 방사능 물질이 발견되는 등의 단편적인 소식만 전해질 뿐이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일본은 현재 어떤 상황일까. 은 14일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환경소위가 주최한 '미래 세대를 위한 한일 원전정책의 길' 강연자로 한국을 방문한 이마나카 데츠지 씨와 인터뷰를 통해 현재 일본의 상황을 들었다.

이마나카 데츠지 씨는 교토대학 원자로실험소의 조교로 방사능 오염 사고를 연구해온전문가다. 그는 원폭이 있었던 히로시마, 나가사키와 최악의 원전 사고가 일어난 체르노빌, 핵무기 실험 장소로 심각한 방사능 오염이 있었던 세미 팔라틴스크 지역 등에서 방사능 영향 조사 등을 벌여왔다.

그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는 일본의 피해 지역 역시 예정에 없던 연구대상으로 추가됐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마나카 데츠지 씨는 지난 3월 후쿠시마 사고 직후 인근의 이이다테무라 지역의 방사능 오염도를 조사하고 실태를 알려 일본 정부가 '피난 지역'으로 지정하도록 이끌기도 했다.

교토대학 원자로 실험소에는 이마나카 데츠지 씨 외에도 고이데 히로아키 등 원자력 이용의 위험성을 연구해온 연구자가 6명이 있다. 원자로 실험소가 있는 지역 명칭인 쿠마토리(熊取)를 따 '쿠마토리 6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일본의 원전 정책을 비판하는데 앞장서 왔다. 이마나카 데츠지 씨는 이번 사고 역시 "인재"라고 비판하면서 일본 정부에 대해서도 "사고 직후 정보를 공개하고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거듭 비판했다.

이마나카 데츠지 씨는 "당장 방사선 노출로 인한 급성 방사성 장애가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향후 4~5년 후에는 만발성 장애를 걱정해야 할 것"이라며 "이미 위험을 완전히 피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시민들이 방사능에 대한 상식을 갖추고 스스로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 지역의 오염에 대해서는 "스트론튬과 플로토늄이 유출됐던 체르노빌과 달리 반감기가 짧은 세슘이 주로 유출됐기 때문에 향후 10년 후에는 안정적인 수치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원자력 전공자 가운데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전문가가 한 명도 없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이마나카 데츠지 씨를 비롯한 '쿠마토리 6인'은 특이한 존재다. 그는 "원자력 학회는 과학을 목적으로 한 학회라고 볼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일본의 원자력촌(村, 원자력 마피아를 지칭)을 움직이는 것은 '언제든 핵무기를 가질 수 있도록 한다'는 핵 옵션"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위기는 기회'라며 원자력 산업 확대를 추진하는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내가 한국에 대해 뭐라 할 입장은 아니다"라면서도 "여전히 원자력 확대를 추진하는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이고, 이는 역시 흉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꼬집기도 했다. 다음은 이마나카 데츠지 씨와의 인터뷰 전문. (편집자)


▲ 이마나카 데츠지 씨 ⓒ프레시안(최형락)

"후쿠시마도 사고도 '인재'다"

프레시안 :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직후인 3월 말 이이다테무라에서 직접 방사능 오염 자체 조사를 실시했다고 들었다. 현장을 가보니 당시 상황이 어땠나?

이마나카 데츠지 : 후쿠시마 사고 이후 반경 20km 이내의 7~8만 명 정도가 피난을 갔는데. 오염 상황이 어떤지에 관한 정보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조사했던 이이다테무라는 후쿠시마에서 30~40km 떨어진 곳으로 오염이 심한 곳이었다. 실제로 깜짝 놀랄 정도로 높은 수치가 나왔다. 내가 일하는 원자로 실험소에서도 시간당 20마이크로시버트 이상 나오는 곳은 '고선량 지역'이라고 해서 특별한 표시가 있고 우리도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이이다테무라에서는 높은 곳은 한 시간당 30마이크로시버트까지 나왔다. 이런 곳을 어린이나 노인들까지 평상시와 똑같이 활동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프레시안 : 사고 직후에 일본 정부가 오염도를 조사하고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마나카 데츠지 : 당시 우리 조사팀은 이이다테무라의 전체적인 오염도를 바로 발표했다. 이곳은 일본의 허술한 방제 대책 지침에 비추어도 바로 피난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이후 정부 쪽에서도 문제가 제기되서 4월 22일에 계획적 피난 지역으로 지정됐다. 그 이후 6000명의 마을 사람들이 피난했다. 정부의 오염에 대한 대응이 이토록 늦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놀랐다. 분명 대책 본부는 오염이 이렇게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정보 공개도 하지 않았고, 피난을 가라거나 외출을 삼가라, 식품을 조심하라는 등의 주의도 하지 않았다. 그 책임 관계를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프레시안 : 보통 원자력 추진파에서는 '체르노빌은 인재에 의한 것이고 후쿠시마는 천재다'라고 한다. 체르노빌 사고등 원자력 발전소 사고 문제를 연구해온 전문가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이마나카 데츠지 : 후쿠시마 사고도 분명 인재다. 물론 지진과 쓰나미가 계기가 됐지만, 원전 운영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상상력을 더 갖고 있었다면 그런 사태는 쉽게 예측을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 지방 사람들은 50년이나 100년 한번씩 쓰나미가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후쿠시마에 원전을 설계하는 사람이 쓰나미에 대한 대책을 아무것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마땅히 세웠어야 할 대책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재라고 할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피해의 정도로 비교하면 어떤가? 후쿠시마 사고는 체르노빌 사고를 넘어서는 피해를 미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프레시안(최형락)
이마나카 데츠지 : 후쿠시마와 체르노빌 사고 간의 중요한 차이는 스트론튬과 플로토늄의 오염 간의 차이다. 후쿠시마 사고의 경우 방출된 주된 방사선 물질이 세슘이고 스트론튬이나 플로토늄은 적다. 세슘134와 세슘137은 각각 반감기가 2년과 30년이기 때문에 앞으로 한 10년이 지나면 안정적인 수치를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체르노빌의 경우는 반감기가 2만 4000년인 플로토늄이 확산됐기 때문에 차이가 크다.

원자로 자체가 폭발한 체르노빌과 멜트다운 이후 주로 휘발성 방사성 물질이 나온 후쿠시마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스트론튬과 플로토늄은 비등점이 높아 날아가지 않고 많이 원자로 내에 남았다. 그래서 체르노빌에 비해 후쿠시마는 비교적 처리하기 쉬운 오염이라고 본다.

"앞으로 만발성 방사성 장애를 걱정해야 한다"

프레시안 : 많은 수의 주민들이 이이다테무라처럼 심각한 방사능 오염이 된 곳에서 일상 생활을 했고, 일부는 지금도 하고 있다. 사고가 난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주민들의 건강에 방사능 관련 증상이 나타나지는 않는지?

이마나카 데츠지 : 사고 직후에 에다노 관방장관이 계속 말했듯이 지금의 방사능 오염은 즉각 몸에 영향이 나타나는 수준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후에 나타날 백혈병이나 암에 대한 대책을 빨리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게 문제다.

피폭에 대한 건강 영향을 생각할 때는 두가지로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 일단 한꺼번에 많은 양을 피폭당했을 때 나타나는 급성 방사성 장애가 있다. 이것은 한꺼번에 500미리시버트 정도를 맞아야 나타나는 증상이다. 나도 주민들이 그렇게까지 심한 피폭을 당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중에 증상이 나타나는 만발성 방사선 장애는 우려할만하다.

체르노빌의 경우 요오드131에 피폭되서 사건 4년 후부터 갑상선암이 많이 발생했다. 요오드131 같은 경우 반감기가 8일이라, 일찍 줄어드는 만큼 빨리 대응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번 후쿠시마 사고에서도 어린 아이들이 나중에 암에 걸리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데, 안 했고, 우려스럽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최근 후쿠시마 제1원전 현장소장이 식도암에 걸린 것으로 드러나고, 후쿠시마 채소를 시식한 방송 캐스터가 급성 백혈병에 걸리는 등의 사건들은 어떻게 봐야할까?

이마나카 데츠지 : 전문가로서 의견은 말씀드리자면 후쿠시마 사고와 발병 간에 관계는 없다고 본다. 체르노빌의 경우 방사선에 대한 감수성이 높은 아이들이 암에 걸리기 시작한 것이 4년 후다. 사고 영향을 보려면 5년, 10년 단위로 시간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은 관계가 없다고 본다. 다만 요시다 제1원전 현장소장 같은 경우는 9개월 동안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일을 했고, 그 스트레스가 암을 키웠을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급성 백혈병이 걸린 캐스터는 원인을 잘 모르겠다.

"이제, 완전히 오염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프레시안 : 최근 일본 최대 식품회사인 메이지에서 만든 분유에서 방사성 세슘이 검출됐다. 아무래도 식품 오염에 대한 우려가 높을 텐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마나카 데츠지 : 이것은 너무 민감하고 심각한 문제라 쉽게 답하기 어렵다. 일본 전국의 어린 아이를 가진 엄마들이 걱정이 많고, 전국으로 강연을 다닐 때마다 관련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나는 그 때마다 '이미 오염되버렸기 때문에 완전히 오염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답한다. 도쿄에서 후쿠시마에 걸친 동북 지방, 태평양 쪽에는 무시할 수 없는 오염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제 하는 수 없으니 베크럴, 시버트 라는 말에 익숙해지세요. 그리고 만발성 암이나 나중에 나타날 위험에 대비하도록 합시다'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정부의 기준치다. 일본 정부는 1kg에 500베크렐을 잠정 기준치로 정하고 그 이상의 식품에 유통을 금지시키고 '1kg당 500베크렐 이하는 안전하니 안심하고 먹으라'고 한다. 일본 시민들이 다들 '이건 아닌거 같다'고 느끼고 있다.. 501베크렐이면 위험하고 499베크렐은 안전한가. 그럴 수는 없다. 방사능은 노출양에 따라 위험도가 높아지는 비례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501베크렐이면 501베크렐의 위험성이 있고, 10베크렐이면 그만큼의 위험이 있다. 즉 안전하다, 위험하다는 기준으로 선을 긋는 것이 불가능하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만큼의 오염을 참을 것인가, 인내를 강요당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나와 같은 전문가들은 그간 연구해왔던 것에서 이 판단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의 판단은 각각 개인이 해야한다.

물론 일반인들이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는 1년간 1미리시버트가 가장 적절한 기준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연간 1미리시버트는 원자로 규제법 그리고 방사선 장해 방지법 등에서 일반 사람들의 연간 한계치로 설정된 수치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 맞고 있는 자연 방사선은 장소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1년간 1미리시버트 정도다. 따라서 우리가 얼마나 참을지를 생각하는 출발점으로서 1미리시버트의 수치가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 '방사능에 안전한 역치는 없으며 위험은 방사능 노출과 비례 관계를 가진다'는 주장은 국제적으로는 공인된 이론이라고 하나 한국에서는 일부 의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은 어떤지?

이마나카 데츠지 : 일본도 비슷한 상황이다. 특히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 저선량 피폭은 건강에 위험이 없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늘어나서 놀랐다. 너무 신기하다. 그러나 암이나 급성 백혈병 등이나 역학 데이터 등을 생각했을 때 이러한 선형 모델이 가장 합리적이고 반박의 여지 없는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자연 방사선에 의해서도 암에 걸릴 위험성이 높아지지만 사실상 대책이 없기 때문에 포기하더라도, 방사능의 건강 영향을 생각할 대는 피폭선량을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본다.

프레시안 : 이미 도쿄도 오염 지역이 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많다. 도쿄 지역의 오염은 어느정도인가?

이마나카 데츠지 : 일단 3월 15일에 도쿄에서도 높은 방사능 수치가 관측 됐는데 그때도 정부는 '마스크를 착용하라', '외출을 삼가하라'는 대책은 전혀 취하지 않았던 것은 지적해야 한다고 본다. 이후 3월 20일과 22일 내린 비로 오염 먼지가 떨어져서 땅이 오염됐다. 이렇게 도쿄에도 오염이 있지만 피난 가야하는 수준은 아니다. 다만 구석구석에 '핫스팟'이 있기 때문에 시청등이 나서서 오염제거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가령 도쿄와 같은 도시에는 비가 내리면 아스팔트의 물이 배수구로 쓸려가면서 배수구에서 오염이 집중되는 현상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오염이 심한 지역이 국소적으로 생기게 되는 셈이다. 도쿄 주민들로서는 오염이 심할지도 모르는 곳에서 사는 것이 불안할 텐데, 그래서 집 주변의 어디가 오염이 됐는지를 제대로 측정, 조사하는게 중요하다고 권하고 있다. 도쿄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어른이라면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프레시안 : 도쿄전력이 원전 내의 방사능 오염수를 정화 처리한 후 바다로 방출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밝혀서, 어민단체나 한국이나 중국 등 인접 국가에서 우려하고 있다. 추가 오염의 우려는 없을까?

이마나카 데츠지 : 결국 방사능 농도가 문제일텐데 상당부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제염 이후의 방사능 농도를 알 수 없으니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기술적으로는 제염 과정에서 돈이 많이 들 뿐 농도를 낮춘 물을 방출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법에서 정해진 배출 기준치 이하라면 내보낼 수 있다. 기준치 이하로 낮춘다면 3월에 방출된 오염수의 방사능 양에 비해서는 100만분의 1이라든가 1000만분의 1수준이 될 것이다. 다만 사회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고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원자력촌(村)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핵 옵션'"

프레시안 : 이마나카 데츠지 씨의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한국의 경우 원자력을 전공한 학자 중에서는 원자력에 비판적인 분들이 하나도 없다. 원자력 학회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것인데. 일본의 경우는 어떤지?

이마나카 데츠지 : 일본도 마찬가지다. 나도 원자력학회의 한 멤버지만 이상한 사람일 뿐이다. 나는 20년 동안 학회 모임에 참석을 안했다. 원자력학회는 원래 원자력을 추진하는 학회로, 그런 의미에서 과학을 목적으로 한 학회가 아니다. 원자력 추진은 기술개발에만 치중된다. 요즘 들어 잘 알려진 대로 원자력학회도 원자력촌(村), 원자력 마피아의 일각이다. 원자력 학회가 '원자력은 안전하다'는 신화를 만들어낸 주범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이마나카 데츠지 씨는 어떻게 원자력에 비판적인 원자력 전문가가 되셨는가.

이마나카 데츠지 :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원자력은 원자력학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꿈의 미래에너지로 알려졌다. 그러나 대학원을 다닐 즈음에 각지에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자 반대 운동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주민들의 이야기는 이랬다. '전력회사는 원전이 들어오면 절대 사고도 안 나고, 일자리도 생기고 돈이 들어오는 등 지역에 좋은 일만 생긴다고 하는데, 이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 좋은 곳을 왜 시골에 짓는가.' 그래서 알아보니 사고가 났을 경우 엄청난 피해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됐다. 30년 전에 정부와 전력회사가 돈과 권력의 힘으로 억지로 시골에 떠맡기려 한다는 것을 간파했고 나는 '만약 사고가 일어나면 어떤 피해가 나는가'를 제대로 연구해보기로 했다. 이게 시작이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한국이나 일본에서나 원자력 추진파는 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원인이 뭘까?

이마나카 데츠지 : 애초에 일본의 원자력 개발은 '핵의 평화 이용'이라는 미명 하에 추진됐다. 이 논리에는 '원자력은 좋은 것이다'라는 선전이 포함되어 있는데. 나는 '상업 이용'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원자력 개발 과정에서 전력회사를 중심으로 그 이권과 연결된 정치인, 예산을 쥐고 있는 관리, 연구 예산이 필요한 학자, 지원금을 끌어오려는 지자체장, 광고비를 원하는 언론 등이 얽히고 설킨 일종의 공동체, 원자력촌(村)이 형성됐다. 만약 관료든, 교수든, 언론이든 원전의 위험성을 지적하면 왕따당하거나 조직에서 쫓겨나거나 광고비를 받지 못한다.

이렇게 자기들끼로 돌고도는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만약의 경우 일본도 핵무기를 가질 수 있다는 '핵 옵션'이다. 1968년 당시 사토 에이사쿠 총리는 '일본은 핵무기를 가지지 않고, 만들지 않고, 반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3원칙을 발표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실제 결정은 '지금은 핵무기를 가질 수 없지만, 만약의 경우 언제든 가질 수 있도록 기술을 보유한다'는 것이었다.

현재 일본이 추진하는 고속증식로, 재처리, 농축우라늄 제조 등 이 세가지 기술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기술이다. '언제든 가능하도록 기술을 갖고 있는다'는 기조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원자력촌을 유지하는 하나의 큰 이유다.

프레시안 : 페쇄적인 원자력 학계에서 원전의 위험성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이마나카 데츠지 :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만약 내가 도쿄대학에 있으면서 그런 연구를 했으면 왕따를 당하거나 쫓겨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토대학은 칭찬해주지도 않았지만. 야단 맞을 일도 없었다. '그 문제는 그것대로 중요하니까 해보라'는 식이었다. 직장에서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함께 연구한 동료들이 여섯 명이 있었다. (이들을 교토대학 원자로실험소가 있는 쿠마토리(熊取)의 지명을 따 '쿠마토리 6인'이라고 부른다.)


ⓒ프레시안(최형락)
그간 우리는 '원전은 위험하다'는 경종을 울려왔지만, 실제로 이런 엄청난 사고가 일어날 줄은 생각 못했다. 머리로는 '반드시 사고가 일어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래도 몰랐다. 그래서 사고 후 몇달 간은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이제는 좀 정신을 차렸지만. 2,3개월 동안 영화속에서 사는 느낌이었다. 나는 일반 시민들에게 강의하는 경우가 많은데 후쿠시마 사고 이전과 이후, 사람들의 반응이 전혀 다르다. 체르노빌도 사고 이전과 이후 시대가 달라졌다,고 하는데 일본 사람들도 후쿠시마 사고 이전과 이후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원전을 짓고 추진해 온 그 빚을 갚게 된 것 아닌가요"

프레시안 : '다른 시대를 살고있다'고 하셨지만 한국 정부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위기는 기회다'라며 원자력 발전을 오히려 확대하려는 정책을 펴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마나카 데츠지 : 내가 한국에 대해 뭐라 운운할 입장은 아니지만, 일본도 역시 원자력을 수출하려고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너무나 흉하다. 우리는 일본 원전의 안전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원전을 없애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러한 검토는 전혀 없이 당장 경제만 생각해서 '원전 수출' 등을 밀어붙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자력을 에너지원으로 쓴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위험을 진다는 것이고, 그런 위험성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한 다음에 시민들이 추진할지 말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또 아직 어느나라도 폐기물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폐기물도 처리하지 못하는 에너지원을 쓰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다. 일본은 4개의 원자로가 파괴도어 앞으로 40~50년 간은 폐기물 문제가 매우 심각하게 대두될 것이다.

현재 일본은 54기의 원자로 가운데 40여 개가 원전이 정지된 상태다. 우리는 이 기회에 다 정지시키는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진짜 우리가 원전을 필요로 하는지, 아닌지가 확실해진다. 결정단위는 물론 지역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보고 나서, 모든 시민들이 '원자력 괜찮다'고 하면 나도 반대하지 않는다.

프레시안 : 한국에서 원자력의 안전성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이제까지 원자력 사고는 원자력발전소가 많은 순서대로 일어났다. 다음은 한국이다'라는 주장을 많이 한다. 정부나 원자력 학계는 인정하지 않지만.

이마나카 데츠지 : 에피소드를 소개하자면, 지진이 일어나던 3월 11일에 나는 간사이 공항에 우크라이나에서 온 손님을 모시러 갔다. 체르노빌 25주년을 맞아 키에프의 친구를초대해서 세미나를 열려고 했다. 그 친구가 온 다음날 사고가 일어났고, 15일 히로시마로 가는 기차안에서 NHK와 그 친구가 인터뷰를 했다. 그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 '지난 40년 간 많은 원전을 짓고 추진해 온 일본이 이제 그 빚을 갚을 때가 된 것이 아닐까요. 우리도 살아남있으니까 일본 사람들도 살아남겠지요'라고 말하더라. 눈물 나올 것 같았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독일의 사례와 같은 탈핵은 가능할까?

이마나카 데츠지 :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운동가도 정치인도 아니기 때문에 전문가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지만, 한 개인으로서는 그 쪽으로 가는 흐름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일본은 너무 에너지를 많이 쓰고 있다. 그런 에너지를 낭비하는 생활을 바꿔가는 것을 통해서,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채은하 기자

전향 권하는 사회


이글은 레디앙 2011-12-16일자 기사 '전향 권하는 사회'를 퍼왔습니다.
박정희, 김영삼, 김지하, 김문수, 황석영, 진중권…그들은 왜?

제가 잘 아는 어떤 현명한 이가 한번은 "자만보다 자학이 훨씬 낫다. 자학에는 병폐도 있지만, 적어도 자학하는 자에게 미래가 있는 반면, 자만하는 이에게는 현재만 있지 미래가 없다"고 했습니다. 반박하기 어려운 명언 같은데, 북조선에 대해서 남한 주민의 절대 다수는 확실히 '미래가 없는 자만'을 택하는 것 같습니다.
남한 주민의 북조선에 대한 자만
공개적으로야 '꼴통'의 딱지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북조선에 대한 논평을 삼가하곤 하지만, 사석에서는 대다수가 북조선을 "배울 게 없는 나라", "실패작"으로 보는 모양입니다. 약 5년 전인가, 제가 그 당시에 관계를 맺었던 한 진보적인 잡지의 발행인을 인사동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세상만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행을 많이 하고 견문이 넓은 제 상대방은 저에게 그가 말했습니다.

"북한이라는 나라의 존재 자체는 우리 민족의 하나의 수치다. 우리와 같은 한민족인데,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한 우상을 받들고 그 획일주의에 하등의 저항도 못하는 것은 정말 최악의 민족적 수치다. 아니, 한국학 하는 입장에서, 도대체 한민족의 어떤 특성 때문에 이러한 괴물 같은 사회가 한반도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좀 분석해달라." 

진보를 지향하는 분이신지라 당연히 북조선의 강제적 '민주화'(?)나 대립의 악화 등등을 절대 바라지 않으시고 햇볕 정책을 적극 지지하셨는데, 북조선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이라고는 이 정도였습니다. 저는 남한에서 이런 분들을 무수히 많이 봤는데, 이러한 대중화된 대북 자만심에 대한 제 생각을 성경책에서 나오는 말, 즉 "남의 눈에 티끌을 보기 전에 자기 눈에 대들보를 보라"는 말로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꽤나 다원적이었던 1940~50년대의 북조선의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가 그 뒤로 주체사상을 유일사상으로 삼아 대대적으로 획일화된 것은 역사적 비극이었다면 비극입니다. 한데 획일화 차원에서는 남한이 북조선보다 더 하면 더 하지 절대 덜하지 않습니다. 단, 우리가 이 부분에 익숙해져 신경 안쓸 뿐입니다. 

북조선에서의 (외피적인) 획일성은, 북조선보다 수천 배의 경제력과 수백 배 더 많은 핵탄두를 가진 미-일-한 이라는 세계 주요 제국주의적/아류제국주의적 야수들의 블록과의 투쟁을 배경으로 한 정권의 강제에 의해서 유지되는 측면은 있습니다.
가진 자의 여유?
자국의 노동자와 중국, 월남, 필리핀 등 수많은 나라 민초들의 피땀을 빨아 지금과 같은 규모가 있는 괴물이 된 남한의 경우에는, 1990년대 초반부터 북조선에 대한 '우월성'에 안주한 통치배들은 더이상 피치자들에게 그 이데올로기를 꼭 강제하지 않아도 될 여유를 즐깁니다.
학생과 같은 미천한(?) 신분으로 감히(?)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자본주의 연구회'를 만들거나, 한진중공업과 같은 이 사회의 큰 오야붕들에게 성공적으로 대들면 물론 감옥행은 어느 정도 보장돼 있지만, 이 체제는 더이상 노동운동가나 사회주의자, 반군사주의자/평화주의자 등을 "완전하게 박멸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예컨대 반군사주의 투사, 즉 병역거부자 같은 경우에는 전과자로 만들어서 평생 이등시민이라는 신분으로 묶어 차별대우하면 하지, 1970년대처럼 강제 입대를 시켜놓고 거기에서 집총거부할 경우에는 때려 죽이지는 않거든요. 덩치가 훨씬 더 큰 인도나 호주 만큼의 총국민생산액을 자랑하는 세계 14위 경제대국인데, 몇 명의 보잘것없는(?) 반체제 투사들을 때려죽이지 않고 "그냥" 평생 괴롭힐 만큼의 아량(?)을 베풀 만합니다. 

한데, 이렇게도 좋아진 세상에 과연 5천만 명 인구의 대한민국에서는 비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은 그 역사상 몇 명 정도 될까요? 넉넉 잡아 예비거부자까지 포함해도 40~50명 정도 될까 말까 합니다.
병영에 끌려가면 폭력과 폭언이 난무하는 절대 복종 체계 속에서 인격이 망가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한국 군대란 국토 지킴이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유사시에 미-일-한 블록의 지배자들이 북조선과 중국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면서 대량으로 소모시켜야 할 총알받이에 불과하다는 점도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알지만, 반군사주의적 의지를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이 '자유 대한'(?)에서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전향을 모르면 한국사회 이해할 수 없어
아니면,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 등을 보십시오. 실제 거기에서 활약하는 활동가의 수는, 1990년대 초반에 비해서 줄었으면 줄었지 별로 늘지 않았습니다. 사회는 덜 탄압적으로 되지만, 오히려 '골수' 체제 반대자의 수가 점차 줄어드는 거죠.
그리고 상층 활동가들을 보면, 20년 내지 25년 전에 운동판에서 뛰었던 사람들의 상당수를 그 자리에서 더이상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대신 그들은 국회의사당에 보수정당 의원으로도 가 있고, 도지사 사무실, 청와대 등에 가 있고, 각종 대학의 교수로도 재직돼 있고 보수언론에서 문호 대접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소위 '전향'을 한 것이죠. 전향이라는 정치문화적 코드를 빼고서 한국 사회를 아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향, 즉 일정한 거래를 전제로 하는 획일화된, 자발성이 강한 주류에의 '귀환'은, 극도로 보수적 사회인 한국에서는 하나의 '문화'라면 문화입니다. 

그 수많은 당쟁에서 조선시대 선비들이 사약을 받아마시면 받아마시지 '전향'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일제에 의한 식민지적 근대화는 전향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조선 땅에 이식시켰습니다. 조선 토착 사회 지도층의 협력 없이 효율적 통치를 할 수 없었던 일제 지배자들은, 온갖 당근들을 제시하면서 보수적인 양반귀족(민병석, 민영휘와 같은 민씨 척족 출신의 갑부들부터 시작해서)부터 신흥 민족주의자나 온건 사회주의자까지 열심히 자기 편에 끌어들이려 노력했습니다.
보수적 양반들은 물론이거니와 민족주의자나 온건 사회주의 활동가까지도 주로 유산층 출신 아니면 유식층, 도일/도미 유학생층 출신들이었기에, '가진 자' 모두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켰던 일제로서 그들을 포섭하는 게 그리 힘들지도 않았습니다.
민족지도자 33인의 그 이후
비참하게도 일제 말기에 이르러 1919년의 그 유명한 '민족지도자 33인' 중에서는 영양실조로 죽어도 배신을 하지 않은 한용운만 제외하고서 다들 전향하거나 적어도 민족진영에서 이탈했습니다. 인정식, 백남운 등 엘리트 온건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끝내 전향하지 않은 박헌영이나 이현상, 이관술, 김상룡, 이주하와 같은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을, 나중에 남한이나 북조선 권력자들은 물론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자기 배신과 획일적 주류에의 합류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구조에, 지조를 지킨 공산주의자들이 도대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향 거부자들을 거의 모조리 죽이거나 주변화시킨 사회는, 그 다음에 전향자들을 아주 전면에 배치시켜놓았습니다. 남로당 동료들을 배신해 그 명단을 형리들에게 넘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부터 3당 합당으로 야당 정치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배신한 김영삼이나, 반노동 입법으로 노동변호사라는 자신의 경력을 배신한 노무현, 1965년 한일수교 반대 데모했다가 전향한 아키히로(明博)까지, 대부분의 남한 최고 권력자들은 전향자 출신들입니다.
이재오/김문수/손학규부터 신지호까지 1970~80년대 사회주의 혁명가나 노동운동가들의 기나긴 전향사를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사람은 다 알지만, 가장 놀랍고 안타까운 전향은 지식인들이나 문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1970년대의 저항의 상징이었다가 전두환 정권의 어용 지식인이 된 천관우 같은 경우들은 하나의 효시이었지만, 황석영이나 김지하의 전향은 그들의 문학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미쳐 저처럼 한국문학을 외국학생들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큰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진중권 전향 과정 심층적 고찰 필요
황석영이나 김지하보다 강도는 훨씬 더 약하지만, 실제로 2000년대에 접어든 박노해의 변신도 일종의 '준(準)전향'으로 볼 여지가 큽니다. 더욱더 안타까운 경우지만, 전 진보신당 당원인 진중권씨의 점차적 전향을 우리가 바로 지금, 그의 각종 사회참여적 발언들을 통해 여실히 잘 지켜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전향이라는 과정의 연구자 분들께, 트위터와 블로그 글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 전향의 과정을 심층적으로 고찰해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도 많은 우수한 대한민국의 두뇌들은 사회주의 등등의 '위험 사상'을 철저하게 버리고 우리 위대한 경제대국의 순량한 국민들의 즐거운 대오에 이렇게도 잘 합류하는가요? 사형을 피해 대신 남로당 동료들의 목숨이라는 대가를 치른 다카키의 케이스는 오히려 인간적으로 이해라도 됩니다. 잘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니까요.
그런데 지금 과거 '전진'그룹 등 좌파 운동가들을 맹비난하고, 귀족화된 예술인 정명훈을 옹호하는 진중권을, 그 누구도 죽이려 하지 않지 않습니까? 1990년대에 이루어진 김지하의 전향과 2000년대에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황석영의 전향도 그 어떤 강제도 개입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대한민국에서는 주류에 속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고생스러운 일입니다. 춥고 배고픈 측면도 있지만, 일단 같은 학력자본을 소유하는 선후배들의 동정적 시선부터 참기가 힘들죠. 그런데 과거 저항이라는 경력을 성공적으로 팔아서 주류에 합류하기만 하면, 세상은 당장 바뀝니다.
문인 같으면 경우에는, 아예 새로운 천하가 열리는 거죠. 국가의 여러 기관에서 외국어 번역 알선부터 노벨상 은근한 로비까지 다 도맡아주고, 외국 투어도 보내주고, 국내에서는 가장 우수한 언론들이 높은 가격으로 글을 사주고... 성공한 자본주의 국가의 성공한 엘리트의 대열에 들어가는 입신출세의 극적인 경우죠.
피와 잉크
그 입신출세를 위해서 딱 한 가지 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을 철저하게 죽여, 획일화된 대한민국의 '상식/통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민주화를 자랑하는 '자유 대한'에서 절대 다수의 유명지식인들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그 공적인 인생을 마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역사상의 수치가 아닌가요? 

소련 시절의 저항 시인 알렉산드르 갈리치의 유명한 노래 "악마와의 대화"에서 악마와 계약을 맺어 체제에 영혼을 팔려는 자는 그 계약의 종이를 보면서 "이게 피로 쓰여진 것이냐"고 묻습니다. 악마의 답은 "잉크일 뿐"입니다. 이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피가 거의 보이지 않네요. 잉크밖에 안보입니다. 

2011년 12월 16일 (금) 08:37:33                                                                         

                    박노자 / 오슬로대

고문 피해자, 김근태는 돌아와야 한다


이글은 대자보 2011-12-13일자 기사 '고문 피해자, 김근태는 돌아와야 한다'를 퍼왔습니다.
[정문순 칼럼] 한국사회가 빚진 김근태, 아직 다 못 갚아 안타까움 더해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이 많이 아프다고 한다. 상임고문이라고 하니까 현실 정치에서 물러나 뒷방 노인으로 늙어가는 줄 알았는데 투병 중이었던 것이다. 김근태라고 하면, ‘그 유명한 고문 사건’이라는 타이틀이 자동적으로 붙는 인물이지만 지금 젊은 세대가 그 이름을 얼마나 알까. 모르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고문’이니 ‘민주화’니 하는 이름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산다면 다행이겠다. 

그 실력이나 자질을 생각할 때 기대에 못 미쳐서 안타까운 사람을 꼽는다면, 김근태가 그에 속한다고 본다. 한나라당 이름을 달고 선거에 나오더라도 미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는지 헤아린 적도 있는데, 김근태가 그랬다. 불의와 죽음의 시대를 한 몸으로 감당한 인물이라면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고 실력을 발휘해야 할 것 같은데, 그는 둘 다 아쉬운 느낌을 준다. 

80년대를 거리와 감옥에서 보낸 그는 90년대 중반 민주개혁 세력의 대표자로서 제도권 정치에 입성했고 늘 일정한 지분을 누리기는 했다. 그러나 어떤 결정적인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02년 대통령 경선 후보에 나왔지만 일찌감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는 경쟁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 부류에게서 보이는 개성적이고 강렬한 면모가 부족했다. 어딘지 의기소침하고 유약해 보인다는 건 정치인에게 마이너스였다. 참여정부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을 맡을 때는 차기 대선 주자에서 라이벌로 일컬어지며 통일부 장관으로 승승장구하던 정동영 의원보다 뒤처지는 모습이었다. 정 의원보다 덜 개혁적이거나 뭔가를 잘못해선 그런 것도 아니었다. 계파를 만드는 데 골몰하지도 않았고 적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현실 정치라는 게 비정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참여정부 말기 부동산 정책으로 갈팡질팡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계급장 떼고 맞붙어 보자.”라며 호기롭게 맞서던 장면은 정치인 김근태가 그답지 않게 내뿜은 마지막 포스로 기억된다. 그리고 총선이 있었고, 상대도 안되는 ‘듣보잡’으로 봤던 ‘음주 방송’ 신지호 의원에게 졌다. 뉴라이트 출신에게도 못 이길 정도로 민주 투사의 상징은 초라해졌다. 그가 잃은 것은 국회의원 뱃지만이 아니었다. 고문으로 망가진 건강은 시간이 지난다고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에게 알리지 않았지만 수년 전부터 뇌혈관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한 인간을 처절히 능욕한 고문 가해자들은 악마였을까. 김근태는 자신에게 고문을 가했던 자들이 돌아서서 저들끼리 가족 걱정하고 자식 키우는 이야기를 나누더라고 했다. 현기영 소설가도 4.3항쟁을 조명한 소설을 쓴 후 공안기관에 잡혀가 고문을 당할 때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고문 기술자들은 악마가 아니고 평범한 가장이었는지 모른다. 고문을 가한 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사람 같지도 않은 ‘빨갱이’ 잡는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자신들은 악한 것이 아니라 악역을 담당할 뿐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런 자들이라면 반성하고 살기를 기대하기는 무리다. 

김근태의 관절을 뽑고 전기고문을 가하고 익사 직전으로 몰아간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그 악마의 손으로 십자가와 성경을 만지작거리는 사람이 되어 있다. 그는 옥중에서 죗값을 치르던 시절 면회 온 김근태로부터 용서를 받기까지 했다. 이근안은 김근태를 ‘칠성판’에 눕히면서 민주화가 되면 자신이 대신 누울 테니 똑같이 복수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약속은 못 지킬망정 그가 목회자로서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거나 교회에서 헛것을 배우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병석을 찾아가 손을 잡고 참회의 기도라도 올리기 바란다. 

많은 도전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집권자를 별로 안 예쁜 동물에 비유하며 욕이라도 할 수 있는 정도의 자유가 누구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 것인지 깨닫는다면,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그에게 갚을 빚이 있고 그 자신도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 유공자가 영화를 누리기는커녕 병마에 시달려 딸의 결혼식도 보지 못할 정도라면 너무 공평치 못하다. 

* 본문은 12.13 에도 게재했습니다.


* 필자는 <대자보> 편집위원이며, 문학평론가입니다.

종편 황색 저널리즘은 시작됐다


이글은 미디어스 2011-12-15일자 기사 '종편 황색 저널리즘은 시작됐다'를 퍼왔습니다.
[기자수첩]진지희·김그림 내세워 노이즈 마케팅

지난 13일 아역배우 ‘진지희’가 포털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올랐다. 14일 신인 가수 ‘김그림’이란 인물이 화제다. 진지희와 김그림, 전혀 다른 인물이고 업종도 다르지만 화제의 본질은 같다.
아역배우 진지희 양 관련된 기사들을 보면 ‘빵꾸똥꾸 소녀, 폭풍성장’이라는 수식어에서부터 ‘여성미 물씬’, ‘상반신 노출’이란 제목이 붙었다. 이 정도면 봐줄만하다. ‘아찔한 어깨라인’, ‘가녀린 쇄골’(경인인보, 굿데이스포츠, 한국경제)이라는 표현이 최근 진지희라는 아역배우 관련 기사 제목에 들어가는 수식어다.
이 같은 기사들의 배경은 한 장의 사진이다. 종편 JTBC가 내놓은 주말드라마 의 장면이다.
측에서 배포한 보도자료가 발단이다. 보도자료의 제목은 ‘인수대비 3인 3색 명대사 열전’으로 출연자 함은정, 백성현, 진지희 등 세 사람에 대한 내용이다. 진지희 양만 주목받은 이유는 상반 노출사진이 보도자료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신인 여가수 김그림 씨 또한 논란의 인물이다. 진원지는 종편이다. 종편 MBN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은 김 씨가 기타연주를 하며 노래 부르는 장면에서 속옷이 노출된 장면을 삭제하지 않고 모자이크 처리해 그대로 방송했다. 이후, 김그림 씨는 “속바지를 입고 있었다”며 모자이크 처리한 MBN 편집에 대한 불편함을 나타냈다.
상황이 악화되자 MBN 측 역시 “마지막 송출과정에서 발견돼 급히 모자이크를 하게 됐고, 김그림 씨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모자이크 조치를 했다”고 해명했다. ‘노이즈 마케팅’ 논란에 대해서는 “의도한 것은 아니다”라고 차단에 나섰다. 
현재 포털 네이버에서 ‘진지희’와 ‘김그림’을 검색하면 각각 7페이지, 11페이지의 관련 기사들이 쏟아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유와 해명을 떠나 어찌됐던 ‘홍보’는 제대로 한 셈이다.
JTBC는 14일 “개국 특집 드라마 가 13일 시청률 2%를 돌파했다. 종편 4사 중 최초”라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진지희 양의 상반신 노출이 큰 몫을 했을 것으로 짐작 가능하다.
종편 4사는 그동안 자사 종편에 대한 홍보에 매진해왔다. 모기업의 신문지면 1면을 활용해왔으며 아전인수식의 ‘시청률 1위’라는 홍보도 빼놓을 수 없다. 연예인을 동원한 홍보는 기본이었다. 그러나 주장대로 자사 종편 ‘TV조선’이 연일 메인뉴스를 통해 특종을 보도하고 있더라도 시장과 시청자의 반응은 미미, 혹은 냉담했다.
종편 인지도를 가장 빠르게 끌어올리는 방법을 제시한 것은 종편 ‘채널A’였다. 방송인 강호동 씨가 23년 전 씨름선수 시절 일본 야쿠자와 식사자리라는 한 장의 사진으로  ‘종편’ 개국은 확실한 홍보효과를 거뒀다. 그 후, ‘채널A’는 ‘A양 동영상’을 반복적으로 노출시켰다.
아역배우 진지희 양 상반신 노출 사진을 보도자료로 배포하거나 신인여가수 김그림 씨의 속옷 모자이크 처리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한 종편 채널이 0.5%에 밑도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선정적 아이템’이 타개책이라는 씁쓸한 종편의 현실을 목도한 셈이다.

“현 연합뉴스, 문제 있다” 기자들 줄줄이 성명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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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기자들도 나서 “걱정스럽다” 우려

보도전문채널 뉴스Y 출범 이후 연합뉴스의 현 상황을 비판하는 연합 구성원들의 목소리가 잇달아 확산되고 있다. 아울러, 현 연합뉴스 보도의 공정성을 비판하며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함께 나오고 있다.
노조 뿐 아니라 젊은 기자, 데스크급 기자들이 성명을 낸 데 이어, 중견 기자들과 2011년 1월 입사한 막내 기자까지 추가로 성명을 내어 현 연합뉴스 상황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하고 나섰다. 이로써 현 연합뉴스 상황을 우려하는 성명에 연합뉴스 공채 16기부터 32기까지가 각각 참여했다.


▲ 뉴스Y 홈페이지 화면 캡처

막내 기자들 “두렵고 걱정스럽다”
먼저, 2011년 1월 입사한 막내 기자들은 14일 성명에서 “회사의 앞날을 걱정하는 선배들의 마음에 깊은 공감을 표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면서도 “방송 뿐 만 아니라 통신에서도, 기자로서도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지만 이대로 가면 통신과 방송을 아우르는 양질의 뉴스콘텐츠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배움의 기회마저 놓칠까봐 두렵다”고 우려했다.
이들은 또 “지금 저희에게 ‘전부’와 다름없는 연합뉴스가 걱정스럽다”며 “내부마저 혼란스러운 이 환경에서 방송을 향한 날개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다져놓은 통신 환경과 인프라마저 잃은 채 흔들릴까봐 조마조마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와 함께 “국민의 세금을 지원받는 연합뉴스가 국민에게, 스스로 부끄럽지 않으려면 제 역할을 하기 위한 정상적인 시스템을 더 확고히 해야 한다는 선배들의 신념을 지지하고, ‘빠른 통신 바른 언론’이라는 연합뉴스의 근본적인 비전을 되새겨야 한다는 의견도 적극 지지한다”고 덧붙였다.
공채 16기도 “회사의 앞날을 걱정하며 작금의 문제들을 지적한 후배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지지를 보낸다”고 밝혔다. 또, 경영진을 향해서는 “사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열고 모체인 연합뉴스와, 이제 막 의욕적으로 출발점을 떠난 뉴스Y가 시너지 효과를 거두며 비상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해주실 것을 당부한다”고 밝혔다. 
공채 19기 또한 “연합뉴스와 뉴스Y의 상생을 바라지만 작금의 현실은 시너지 효과는 커녕 제살 깎아먹기로 흐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보도와 관련해서는 “현 경영진 들어 무너진 연합뉴스의 공정보도 원칙이 바로 세워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 보도의 공정성 문제를 지적하며, 경영진의 올바른 판단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1998년 12월 입사한 공채 20기는 성명을 통해 “출범과 신사옥 건축 뿐 아니라 정치적 공정성에 대한 내부의 우려와 외부의 비판이 최근 수년 사이에 심각한 수위에 이르렀다는 점도 느끼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며 우려를 표했다.
이들은 “좁은 의미의 경영 이슈뿐 아니라 정치적 공정성에 대한 시비도 연합뉴스, 연합뉴스TV, 연합인포맥스의 장래에 매우 심각한 불안 요소가 될 수 있다”며 “경영 이슈와 정치적 공정성의 이슈가 결합하면 우리의 주요 수익 기반과 존립 근거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데스크급 기자 뿐 아니라 젊은 기자, 막내 기자들까지 각 기수별로 성명을 내는 등 적극적인 입장 발표를 하고 나선 상황이지만, 이에 비해 경영진 쪽의 행보는 잠잠하기만 하다. 이 같은 잇달은 성명 발표에 경영진은 당혹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물론 박정찬 연합뉴스·뉴스Y 사장은 최근 사원들에게 보내는 글을 통해 “방송 초기에 과다한 투자를 했다가 결국 YTN을 처분해야 했던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뉴스Y의 인원 구성을 최소화하는 길을 택하다보니 뉴스Y와 연합뉴스 제작국에 업무상 큰 부담을 지우게 됐다”며 인력 확충을 통해 노동 강도를 줄이고, 업무 부담을 해소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구성원들의 반응은 시들하다.
또, 현재 연합뉴스 보도와 관련해 연합 안팎에서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는 경영진은 사실상 ‘침묵’하고 있어 구성원들의 불만은 더욱 커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설]전력공급·원전안전 어느 것도 믿을 게 없다


이글은 경향신문 2011-12-15일자 사설 '[사설]전력공급·원전안전 어느 것도 믿을 게 없다'를 퍼왔습니다'
지난 14~15일 울진 원전 1호기와 고리 원전 3호기가 12시간 간격으로 가동을 멈췄다. 이 때문에 15일 피크타임 전력예비율이 한때 8.3%로 떨어져 전력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하마터면 ‘9·15 정전 사태’가 재현될 뻔했다. 다행히 울진 1호기는 어제부터 발전을 재개했고, 정부와 전력회사들이 전력수급 비상점검회의를 열어 ‘문제없다’고 발표했지만 불안은 여전하다. 

아직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닥치지도 않았는데 이처럼 잦은 발전소 고장으로 인해 위험천만한 상황이 초래됐다니 놀랍다. 정부는 예비전력량이 400만㎾ 이하로 떨어지면 단계별 비상조치에 들어가게 돼 있는데 그제 피크타임 예비전력은 549만㎾까지 떨어졌다. 정부와 한전은 올겨울 평균 예비전력이 400만㎾에 훨씬 못 미치고, 특히 내년 1월 둘째·셋째주에는 예비전력량이 100만㎾ 이하로까지 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한다. 이럴 때 그제처럼 100만㎾급 원전 한 곳만 불시 정지된다면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사태)’을 피할 수 없다. 정부와 전력회사들이 ‘수요관리’를 내세워 전기요금 올리고, 야간조명 단속에 나서면서도 정작 제 할 일은 제대로 못하는 꼴이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력수급 안정뿐 아니라 원전안전에 대한 우려 또한 커지고 있다. 지난 3월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에 따른 지구적 재앙을 경험한 뒤 원전 21기를 모두 점검했다는데도 이번 사고가 난 것을 보면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 관련 기관들에 구조적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에 멈춰선 2기의 고장은 원전의 핵심부분에 문제가 생긴 때문이 아니라지만 원전안전 관리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키우기에 충분하다. 현재 정비 중인 울진 4호기는 증기발생기에 연결된 전열관 1만6400개 가운데 3800개가 마모된 것으로 드러났고, 지난 9월에는 4호기 정비 인력 32명이 방사능에 노출됐고, 11월에는 6호기가 오작동으로 멈추기도 했다. 고리 3·4호기 관리 직원들이 뇌물을 받고 중고 부품을 쓴 사실도 드러나 수사를 받고 있기도 하다.

정부는 이제껏 전력수요 증가에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9·15 정전 사태를 초래했다. 이후 재차 전면 점검에 나서고 관리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다짐했지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지금처럼 걸핏하면 발전소가 가동정지되는 부실관리로는 안정적인 전력공급도 원전안전도 둘 다 믿음이 가지 않는다. 설비·운용의 문제에다 기강해이까지 총체적 부실을 바로잡아야 한다.

[사설] 불안정한 원전과 전력난, 강력한 수요관리가 해법이다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1-12-15일자 사설 '[사설] 불안정한 원전과 전력난, 강력한 수요관리가 해법이다'을 퍼왔습니다.
공급 확대만 고집했던 정부 전력정책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특히 원자력발전소가 노후화 및 부실관리로 가동 중단이 잇따르면서 올겨울 자칫 대규모 정전사태(블랙아웃)마저 우려된다. 13일 울진원전 1호기가 서더니, 14일엔 고리원전 3호기가 멈췄다. 울진원전 1호기는 이틀 만에 재가동됐지만 현재 4기의 원전이 가동 중단 중이다. 전력 피크철이라면 블랙아웃이 현실화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지금부터라도 강력한 수요관리 정책을 펴야 한다.
정부 전망으로는 올겨울 최대 전력수요(전력 피크)는 7853만㎾이고 최대 공급은 7906만㎾라고 한다. 전력 피크철인 1월 둘째 셋째 주 예비전력은 53만㎾로 떨어지는 셈이다. 지난 9월15일 정전 대란이 벌어졌을 때 예비전력이 24만㎾였으니, 발전기 하나라도 서 버리면 그야말로 비상사태다. 이번에 고장 난 울진원전 1호기와 고리원전 3호기의 발전용량만 해도 각각 95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2016년까지 원전 6기를 더 짓는 등 ‘원자력 르네상스’를 외치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최근 환경정책평가연구원은 ‘탈원전’을 건의했다고 한다. 기존의 원전은 가동 연장을 하지 말고, 원전을 추가로 건설해선 안 된다는 게 요지다. 미래세대에 부담만 준다는 이유에서다. 대신 에너지 절약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부족분은 신재생에너지 보급 확대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으로 가동되다가도 수시로 갑자기 멈춰서는 원전은 결코 안전하거나 안정적이지도 않다. 계량 불가능한 폐기비용을 합치면 값싼 에너지도 아니다.
지금 당장 공급을 늘릴 순 없다. 따라서 유일한 선택은 강력한 수요관리 정책뿐이다. 현재 1인당 전력소비량은 우리가 100일 때 일본 89, 영국 65, 프랑스 85,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91이다. 2005~10년 우리나라의 전력소비 증가율은 30.6%로 일본(-1.9%), 영국(-5.1%), 미국(1.7%) 등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다.
지금 정부가 자발적 절약 캠페인을 벌이고 있지만, 단기적으로라도 실효를 거둘 가능성은 별로 없다. 정책 실패를 국민에게 전가하는 수단일 뿐이다. 정부는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 탄소세 등을 약속했다. 기업의 반발에 눈치만 보고 있지 말고 약속한 것이라도 지켜야 한다. 에너지 효율성은 기업의 경쟁력이기도 하다.

[사설] ‘부는 대물림된다’고 체념하게 만든 엠비노믹스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1-12-15일자 사설 '[사설] ‘부는 대물림된다’고 체념하게 만든 엠비노믹스'를 퍼왔습니다.
어제 통계청이 발표한 ‘2011년 사회조사 결과’는 이명박 정부 들어 날로 고단해지는 우리의 삶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평생 노력해도 본인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는 가구주의 비율이 2009년에 비해 10.7%포인트나 늘어 58.8%에 이르렀다. 열에 여섯이 부가 대물림된다고 체념하고 있다. 사회 양극화에 이어 양극화의 고착화가 심화된 것이다.
더욱이 금융위기에 따른 경기 침체기였던 2009년보다 더 나빠졌다는 것은 심각한 경고등이 켜진 것으로 봐야 한다. 계층이동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가구주의 비율 또한 2009년에 비해 6.9%포인트 줄어 28.8%에 머물렀다. 점점 미래의 희망을 잃어가는 가구가 늘고 있는 셈이다.
본인 세대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계층이동 가능성도 낮다고 생각하는 가구주가 2009년 30.8%에서 43.0%로 크게 늘어 미래 전망조차 밝지 않다. 가난한 가구는 뭘 해도 가난을 벗어나기 어렵고 부유층은 뭘 해도 일정 수준의 부를 유지한다면 사회의 역동성이 크게 떨어진다. 재능이나 욕구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막히고 유대가 약화되고 계층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그런 사회에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
소득에 만족한다는 가구주도 2009년보다 줄어든 반면 만족하지 못한다는 가구주는 조금 늘어 인구의 절반에 가까워졌다. 사회경제적 지위를 중간층이라고 생각하는 가구주의 비율은 52.8%로 줄었고, 하층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45.3%로 2.9%포인트 늘었다. 고용안정성에 대해서도 불안하다는 비율이 59.9%에 이르렀다. 50대와 60대 이상은 소득에 대한 불만족 비율이 50%를 넘어 조기퇴직과 노후불안의 험한 세태를 보여줬다.
통계청의 사회조사는 허황되고 잘못된 엠비노믹스의 초라한 성적표다. 대기업과 부자 편을 들어주면 경제가 살아나고 낙수효과로 ‘연평균 7% 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경제대국’을 이룰 것이라고 했지만 목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무너지는 중산층과 갈수록 팍팍해지는 서민들의 삶을 지탱해줄 정책이 필요했지만, 고환율, 감세, 규제완화로 수출 대기업과 부동산·금융 부자들만 위한 정책을 고수해 일부러 격차를 벌린 꼴이 됐다. 이제라도 과감한 복지정책과 공교육을 살리는 정책으로 계층 이동의 희망을 살려내야 한다.

[사설] 한심한 ‘디도스 수사’, 경찰 수뇌부 은폐 여부 밝혀야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1-12-15일자 사설 '[사설] 한심한 ‘디도스 수사’, 경찰 수뇌부 은폐 여부 밝혀야'를 퍼왔습니다.
중앙선관위 누리집 디도스 공격 사건을 전후해 당사자들 사이에 돈이 오갔던 사실을 경찰 수뇌부가 발표하지 말라고 했다는 주장이 어제 야당 의원에 의해 제기됐다. 경찰은 이에 대해 명쾌하게 해명하기는커녕 이 돈거래의 성격조차 분명히 하지 못한 채 온종일 오락가락했다. 이런 판국에 경찰청 수사국을 대검찰청에 상응하는 조직으로 만들겠다며 확대 개편 방안까지 내놓았다. 맡은 사건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조직만 키워놓겠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애초 디도스 공격 시점을 전후해 오간 돈의 대가성을 부인하던 경찰은 어제 오후엔 보도자료를 내어 박희태 국회의장 비서 김아무개씨가 건넨 1000만원은 대가성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전날 김씨를 불러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해보니 거짓반응이 나왔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얼마 뒤 설명에 나선 경찰 간부는 “최구식 의원 비서 공아무개씨의 우발적인 단독범행이란 잠정 결론을 뒤집을 만한 새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다”며 다시 이를 뒤집었다. 경찰이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이유는 아마도 책임 문제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박영선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어제 “디도스 수사 발표문이 조현오 경찰청장실에서 고쳐졌다”며 돈거래 은폐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경찰 간부는 “애초 사건을 보고하면서 계좌는 발표에서 빼는 게 좋겠다고 했고, 이에 청장이 동의한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수사팀의 자체 판단이란 주장이다. 그러나 경찰의 초기 발표 자체가 일반인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것이어서 경찰이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 게 아니냐는 의문은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경찰 수뇌부의 설득력 있는 해명이 필요하다.
경찰은 공교롭게도 어제 경찰청 수사국 확대 개편안을 발표했다. 수사국에 경무관급 수사기획관을 두고 범죄정보과를 신설한다는 게 뼈대다. 수사기획관은 대검 중앙수사부의 수사기획관 직제에 대응하는 것으로, 사이버테러대응센터와 지능범죄수사대 특수수사과 등 수사부서를 총괄 지휘한다는 것이다.
발표 시점도 그렇거니와 검찰에 대응해서 조직을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부적절하다. 경찰이 맡은 바 수사를 제대로 하면 국민이 나서서 검찰이 갖고 있는 수사권을 뺏어서라도 주라고 할 것이다. 조직 확대 이전에 디도스 사건 마무리라도 제대로 하기 바란다.

2011년 12월 15일 목요일

국책연구원도 MB에 반기… "원전추가건설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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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신문 솎아보기] 디도스 공격 배후에 1억원 거래, 경찰 은폐의혹

국내 원전이 잇달아 중단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있는 와중에 이명박 대통령의 원전 추가 건설 방침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국책연구원의 보고서가 제출돼 주목을 끌고 있다. 지난 13일 밤 경북 울진원전 1호기가 갑자기 가동이 중단된 데 이어 14일에는 부산 고리원전 3호기도 가동이 중단되는 등 방사능 공포와 함께 겨울철 안정적 전기공급에 적신호가 켜졌다.
10·26 재보선 당일 중앙선관위와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홈페이지 디도스 공격사건의 범인들과 한나라당 국회의원 비서 사이에 공격 시점을 전후해 1억 원의 돈거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돼 파문을 낳고 있다.
다음은 15일자 아침신문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경향신문
-국민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한국일보 
국책연구원이 “원전 추가건설·수명연장 포기해야” 반기 파문
미래세대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원자력발전 추가 건설과 기존 원전의 수명연장을 포기해야 한다는 보고서가 국책연구기관 연구진으로부터 나와 파문이 예상된다.
지금까지 환경단체나 학자들이 원전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경우는 많았지만 정부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는 국책연구기관이 보고서에 담은 것은 처음이다. 우리나라는 2030년까지 전체 전력생산 중 원전이 차지하는 비율을 현재의 34%에서 59%까지 늘리고, 원전 수출도 계속할 방침이지만, 국책연구소가 정부정책과 전혀 다른 방향을 제안함에 따라 파장이 예상된다.
국민일보 1면 머리기사에 따르면, 국무총리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와 한국행정연구원은 올 초부터 협동연구로 수행한 ‘미래세대의 지속가능발전조건: 성장·환경·복지의 선순환’ 보고서를 발표했다고 14일 밝혔다.


국민일보 12월 15일자 1면

에너지분야를 맡은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의 강광규 환경평가본부장은 “추가 원전 건설과 기존 원전의 수명 연장을 삼가고 내구연한까지만 가동토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신재생에너지 보급목표를 기본계획보다 상향조정해 원전 공급 감소분의 일부를 충당케 하자”고 제안했다.
강 본부장은 국민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협동연구 참가자 다수는 원전 추가건설이나 연장가동에 반대하는 입장”이라며 “워크숍에서는 더 강력한 반(反) 원전 입장을 담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최종발표에서 다소 완곡해졌다”고 전했다.
또 원전 중단…방사능 공포 고조
원자력발전소가 잇따라 고장으로 멈추면서 인근 지역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서울신문 등에 따르면, 지난 13일 밤 경북 울진원전 1호기(95만㎾급)가 갑자기 멈춰선 데 이어 14일 오전 부산 고리원전 3호기(〃)도 가동이 중단됐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오전 8시36분쯤 고리원전 3호기가 터빈 발전기의 과전압 탓에 발전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전날 울진원전 1호기는 터빈을 돌리는 스팀(증기)을 물로 환원시키는 복수기가 이상을 일으켰다. 앞서 지난달 30일에는 울진원전 4호기(100만㎾급)의 증기발생기 2개에 연결된 1만 6400여개의 전열관 가운데 3800여개가 마모되거나 균열이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4호기에서는 지난 9월 원자로 건물에서 일하던 근로자 32명이 극미량의 방사선에 피폭되는 사고도 일어났다. 울진원전의 총 6기 원자로 가운데 멀쩡한 것은 3호기 뿐이며, 부산 고리원전의 총 4기 원자로는 모두 말썽이다. 3호기 고장에 앞서 지난 6월 송전선로 사고로 2호기(65만㎾급)의 가동이 중단됐다. 지난 4월에는 1호기(58만㎾급)가 전원 공급계통 차단기의 부품 결함으로 중단되고, 또 3호기와 4호기(65만㎾급)가 외부 전원공급 중단으로 발전을 멈췄다. 서울신문은 “총체적 부실에 직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서울신문 12월 15일자 1면

주민단체인 울진지역발전협의회는 “방사능 누출이 예상되는 울진 4호기의 증기발생기 전열관 손상사고를 은폐·축소하는 것은 범죄행위”라면서 “일본 후쿠시마 원전이 사고를 은폐하려다 참사로 이어진 것을 거울삼아 정부가 한수원에 대한 법적 조치와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디도스 공격 1억 거래 있었다…경찰 은폐의혹
10·26 재보선 당일 중앙선관위와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홈페이지 디도스 공격사건의 범인들과 한나라당 국회의원 비서 사이에 공격 시점을 전후해 1억 원의 돈거래가 있었던 사실이 확인됐다.
14일 한겨레21이 돈 거래 사실을 보도하자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는 뒤늦게 보도내용을 인정했다. 한겨레는 1면 기사에서 이 돈 거래가 사건의 실체를 밝힐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데도 경찰이 “의심할 만한 금전거래는 아니다”라며 사실을 숨겨와 이를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일보도 1면 머리기사에서 “거액의 금전 거래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돈의 출처와 디도스 공격의 배후, 윗선에 대한 의혹이 다시 증폭되고 있다”며 “더구나 경찰은 국회의원 비서 2명이 직접 관련된 금전 거래 내역을 확인하고도 공개하지 않아 사건을 축소 내지 은폐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불거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겨레 12월 15일자 1면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는 디소스 공격 6일 전인 10월 20일 박희태 국회의장 비서였던 김아무개씨가 디도스 공격을 지시한 최구식 한나라당 의원 비서 공아무개씨에게 1000만 원을 송금한 사실이 있었다고 15일 밝혔다. 김씨는 또 공격 보름후인 지난달 11일 디도스 공격을 실행한 IT업체 K사 대표 강아무개씨에게 9000만 원을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돈거래 내역에 대해 “김씨가 공씨에게 송금한 1000만 원은 강씨의 K사 직원 월급으로 쓰였고, 9000만 원 중 8000만 원은 K사 임원이자 공씨의 친구인 차아무개씨에게 넘어갔다”며 “계좌 조사를 통해 강씨가 지난달 17일과 26일 각각 5000만 원 씩 두 차례에 걸쳐 김씨에게 1억 원을 돌려보낸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김준규, 검찰총장 때 이국철 회장 만났다
김준규 전 검찰총장이 검찰총장이던 올해 초 이국철 SLS 회장과 이 회장의 로비스트인 문환철(42·대영로직스 대표)씨를 만난 것으로 14일 밝혀졌다고 조선일보가 보도했다.
사정당국 소식통들에 따르면 김 전 총장은 이 회장과 문씨를 서울 강남의 레스토랑에서 만나 식사를 했다고 조선은 전했다. 조선에 따르면, 만남은 문씨가 주선했으며, 문씨는 김 전 총장과 이전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문씨는 이 회장에게서 ‘SLS 경영권을 되찾기 위한 정·관계 로비자금’ 명목으로 7억8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최근 구속됐다.
만남이 이뤄질 때 이 회장은 창원지검이 2009년 하반기 진행한 수사에서 분식회계 등의 혐의가 드러나 불구속 상태로 재판받던 중이었다. 창원지검 수사는 김 전 총장이 총장일 때 진행됐으나, 이 회장에 대한 비리 첩보가 창원지검에 배당된 것은 김 전 총장 취임 이전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SLS그룹 주력 계열사인 SLS조선의 워크아웃이 결정되면서 경영권도 잃은 상태였다.
검찰 안팎에선 이 만남이 이 회장이 줄곧 주장해 온 ‘SLS 워크아웃 과정의 부당성’과 연관이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조선은 사정당국의 한 관계자의 말을 빌어 “모임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발언이 나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회장과 문씨가 SLS조선 워크아웃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이 회장은 만남 이후 ‘산업은행 관계자들이 금품을 수수했으며, SLS조선 워크아웃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내용으로 대검에 진정을 냈고, 대검은 이 회장의 진정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부에 넘겨 조사토록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 회장이 지난 9월 당초 진정 내용에는 없던 ‘신재민 전 차관 연루 의혹’을 제기하면서 특수3부로 수사 주체가 바뀌었다.
한편, 이 회장은 최근 검찰이 입수한 비망록에 “검찰의 최고 간부님과 한식 겸 퓨전 양식 메뉴로 식사했는데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적었고, 50만~55만원의 식대도 이 회장 자신이 카드로 결제했다고도 적었다. ‘최고 간부님’은 김 전 총장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회장은 또 “문씨가 (김 전 총장 등) 검찰 간부들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해서 돈을 줬다”고도 적었었다.
주중 한국대사관 쇠구슬탄 맞아
중국 베이징(北京) 소재 한국대사관에 공기총으로 발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손톱 크기의 쇠구슬이 날아들어 중국 공안이 수사에 나섰다. 주중 한국대사관이 공격을 받은 것은 처음으로, 한국 해양경찰 살해 사건 발생 후 악화하고 있는 양국 국민의 감정을 보여주는 사건이어서 내년 한중수교 20주년을 앞둔 두 나라 관계에 암초로 작용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국일보 등이 보도했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주중 한국대사관은 13일 낮 12시30분(현지시간)에서 오후 1시30분 사이 대사관 경제동휴게실의 대형 방탄유리가 쇠구슬에 맞아 파손됐다고 밝혔다. 대사관은 사건 발생 4시간 뒤 이 사실을 신고했으며 베이징 공안국은 현장에 출동, 쇠구슬을 수거하고 목격자 진술을 확보했다. 사건 후 주중대사관에는 경찰 수십 명이 배치됐다. 중국에서는 민간인의 총기보유가 불법이지만 수렵용 공기총은 허가를 받아 보유할 수 있다.
대사관은 모든 직원에게 안전에 유의할 것을 당부하고 중국 외교부 등에 사건 규명을 위해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1000회 맞은 수요집회 “20년간 일 대사관 앞 천번을 울었건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상임대표 윤미향·이하 정대협)가 서울 종로구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 열어온 ‘수요시위’가 14일로 1000회를 맞았다. 굳게 잠긴 일본대사관 철문 앞에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해온 지 20년 세월이 흘렀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최장기 집회 기록이다.
지난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정대협 회원 등 30여명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강제연행 인정 등을 요구하면서 시작된 수요시위는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아직 청산되지 않은 일제 강점기 과거사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하는 데 기여했다. 1991년 8월 14일 위안부 피해자로는 처음으로 공개 증언에 나선 고 김학순 할머니(당시 67살)의 용기가 수요시위의 밑거름이 된 이후 언론에서 연일 위안부 문제를 보도하면서 피해자들이 하나 둘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겨레는 전했다.


한겨레 12월 15일자 1면

한겨레는 수요시위 1000회에 대해 “자신이 당한 고통을 후손들이 겪지 않도록 하겠다는 할머니들의 집념이 있어 가능했다”며 “할머니들은 노환과 굳은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긴 세월 단 한 번도 수요시위를 거르지 않았다”고 전했다. 시위가 거듭될수록 할머니들은 평화운동가나 역사 선생님으로 변해갔다. 피해자에서 운동의 주체로 거듭났고, 할머니들은 국경을 넘어 국제적 연대를 이끌어냈다고 한겨레는 평가했다. 할머니들의 요구는 일본의 △위안부 범죄 인정 △진상규명 △일본의회의 사죄 결의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 기록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 등 일곱 가지이지만 할머니들에겐 시간이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