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8일 월요일

[사설] 이번엔 벤츠검사, 도덕성 마비된 ‘불감 검찰’인가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1-11-27일자 사설 '[사설] 이번엔 벤츠검사, 도덕성 마비된 ‘불감 검찰’인가'를 퍼왔습니다.
검사가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한테서 벤츠 승용차와 법인카드를 받아 사용한 정황이 드러나 검찰이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스폰서 검사와 그랜저 검사 사건으로 그렇게 국민적 비난을 받더니 이번에는 벤츠 검사인가.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다.
이번 사건이 검사와 스폰서 관계의 일반적 유형과는 다른 점이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으나 어쨌든 현직 검사로서 그런 대접을 받은 사실은 틀림없어 보인다. 검찰은 그동안 검사들의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조금 지나면 다시 비슷한 사건이 재발하곤 했다.
지난해 스폰서 검사 사건이 터졌을 때 검찰은 “검사가 스폰서를 두는 건 옛날 얘기이고 요즘엔 다 없어졌다”고 해명했다. ‘피디수첩’을 통해 사건을 처음 폭로한 제보자가 나중에 책까지 펴내성매매 검사들의 실명까지 공개했을 때도 검찰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말로 간단히 넘겨버렸다. 그러나 검사들이 책 내용에 대해 법적으로 문제삼았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불과 2년 전 검찰총장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스폰서 의혹으로 낙마한 것을 보면 과연 그런 관행이 지금은 없어졌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지난달에도 건설사에서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은 지방의 검사장이 사표를 냈는가 하면, 고소인한테서 현금 2800만원과 술접대를 받은 전직 검사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일도 있었다. 검찰의 도덕성이 경찰보다 낫다고 주장할 아무런 근거가 없어 보인다.
한상대 검찰총장이 취임 일성으로 검찰 내부의 적과의 전쟁 등 3대 전쟁을 선언했으나 과거와 달라졌다고 느낄 만한 변화는 드러나는 게 없다. 이국철 에스엘에스그룹 회장이 비망록에서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을 통해 검찰 고위 간부들에게 로비를 벌였다고 폭로했으나 수사에서 명쾌하게 밝혀진 건 아직 없다. 한 총장 취임 이전 일이긴 하나 과거 그랜저 검사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노골적인 부실수사를 했던 검찰 간부들 역시 아무런 불이익도 받지 않았다.
검찰은 여당마저 불편해할 정도로 편파수사를 펴온 탓에 정치검찰로 지탄받고 있다. 여기에 내부 비리마저 근절하지 못하면 도덕성이 마비된 ‘불감 검찰’이란 별명까지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2011년 11월 27일 일요일

FTA와 인민주권


이글은 한겨레신문 hook 2011-11-23일자 기사 'FTA와 인민주권'을 퍼왔습니다.

철학, 경제학, 정치에 관심이 있는 대학생입니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에 FTA 비준 안건을 기습상정하고 결국에는 한나라당 단독으로 안건을 처리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지금도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정상적인 공론화 과정과 의사결정 과정을 건너뛴 이와 같은 ‘날치기’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FTA 비준은 현실로 닥쳐왔다. 따라서 그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FTA 협정이 현실경제에 미칠 충격을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FTA로 인해 초래될 최악의 시나리오들을 쏟아내었다. 가공할만한 일들이 금새 대한민국에 닥칠 것만 같다. 그러한 우려들 중 국회에서 쟁점이 된 ISD 조항에 관한 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정 반대로 (으레 그랬듯이) 재계와 친정부 성향의 연구소들은 FTA가 가져올 긍정적인 경제효과에 대한 장밋빛 전망들을 쏟아내었다. 그러나 실제로 FTA가 국민경제에 어떤 충격을 가할 것인지, 긍정적 측면이 클지, 부정적 측면이 클지, 사전에 예측하는 것은 어렵다. 일단 초보적인 정치공학의 수준에서 진보파들이 FTA에 반대하고 보수파들이 FTA 찬성한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서 우리가 고려해야할 또 다른 시나리오는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실망스러운’ 것이다. 만일 실제로 FTA 이후 그다지 더 나빠지지도, 그다지 좋아지지도, 어느 쪽도 아니라면 어떨까? FTA에 대한 장밋빛 전망도, 혹은 그것이 초래한 ‘파국’에 대한 종말론적 상상력도, 어긋나는 현실이 지속된다면?
  문제를 좀 더 에둘러서 고찰하자. 우선 보수파들은 FTA를 정치논리가 배제된 순수한 자유무역, 내지는 통상개방 협정으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자유무역과 시장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기 때문에 FTA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식이 된다. 그러나 장하준이 최근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우리는 실질적으로 “이미 ‘자유무역’을 하고 있다.”[11월 7일자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이미 산업 일반에 ‘무역장벽’이라고 할 정도의 높은 관세율을 적용하고 있는 상황도 아니며, 그런 상황에서 관세인하 및 철폐조치가 어떤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낼지는 근본적으로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FTA로 인해 일부 수입 소비재 품목의 관세가 인하된다면 일반적으로 소비자의 효용이 증대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원론 수준에서 그와 같은 것이 ‘모범답안’이다. 그러나 관세인하 효과가 실제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물가수준에 얼마만큼 반영될지는 미지수이다. 한-칠레 FTA 협정 이후 칠레산 포도주의 소비자 가격이 실제로는 관세인하 효과만큼 하락하지 않은 것이 좋은 사례이다.[경향신문, "칠레 와인에 'FTA 단맛'은 없었다"] 그리고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물가수준’이란 오히려 공공요금과, 교육비, 그리고 부동산 가격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임박한 공공요금 인상 계획을 목전에 두고서, 그리고 전세난과, 미친 등록금에 시달리는 국민들 앞에서, 앞으로 미국산 쇠고기와 칠레산 와인 따위로 인해 엄청난 혜택을 누릴 것이라는 둥의 호언장담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미국측의 관세인하로 인해 우리의 주력 수출업종인 자동차와 같은 제조업 분야에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제조업이 가격경쟁력으로만 해외시장에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관세인하의 효과를 과장해서는 안된다. 일례로 미-일 플라자 합의 이후 미국에게 유리한 환율조정을 시행했음에도 제조업 부문의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는 개선되지 않았다. [중앙일보, "플라자 합의, 그 후 20년"] 더 나아가 미국시장에서의 수출의 증가가 가시화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민경제에 (이를테면) ‘고용창출’과 같은 구체적인 경제적 효과로 이어질 것인지의 여부는 (우리가 지난날의 경험에서 알듯이) 매우 불확실하다. 대기업들의 수출호황 속에서도, 실제로는 중소기업 종속, 양극화, 실업문제가 심각해졌던 것이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위와 같은 사례들을 열거한 이유는, FTA의 구체적인 ‘경제효과’라고 추산된 것이 실제로는 ‘가정의 가정의 가정’을 거듭해야 성립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경제학의 현실예측력은 이와 같이 보통의 실험과학의 예측능력에 전혀 못미친다. 물론 이런 것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사항이다. 그러나 내가 에둘러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예측능력이 가진 이러한 맹점들은 FTA의 부정적 효과에 대한 시나리오들에도 그대로 해당된다는 점이다.
  우선 우리는 FTA로 인해 당장 공공 서비스의 체계가 붕괴할 것이라든가, 한국시장이 미국자본에 의해 잠식될 것이라든가, 국가의 주권이 마비되고, 당장 미국식 민영 의료보험 시스템을 수용해야하는 따위의 암울한 미래를 미리 단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런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은 실제로는 희박하며, (정부의 장밋빛 전망들과 마찬가지로) 중남미에서 일어난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한반도에서 재현될 것이라는 전망도 ‘가정의 가정의 가정’을 거듭해야 성립하는 시나리오에 지나지 않는다. 일례로, ISD 투자자-국가소송제가 실제로 국가의 주권을 제약하는 측면이 있으며, 국가의 공적인 역할과 관련하여 이전과 전혀 다른 쟁점들을 제기하는 것은 확실하다. [http://foog.com/11386/] 그러나 그것이 활용된 사례들을  살펴보면, 국가의 공공 시스템과 정책 그 자체를 직접 ‘겨냥’한 사례들을 찾아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ISD의 판정 기준은 '합리성과 비례성'"] 말하자면 실제로 ISD 제도 하에서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위해 특정 국가의 공공 시스템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경각심을 조성하기 위해 공언한 최악의 가정들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만일 FTA가 가져올 (우리가 짐짓 우려했던) 파국과 참상들이 실제 현실로 닥친다면, 일부의 자조 섞인 푸념처럼, 희망을 버리고 ‘이민’이라도 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냉소적인 선택을 할 것이 아니라면, [실제로 누구도 순수하게 FTA 때문에 이민을 가지는 않을 것이다] FTA 조약 비준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되짚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물음이다. “오히려 FTA 조약 비준 이후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는 우리가 지금까지 매우 익숙하게 여겼던, 말하자면 ‘오래된 미래’가 아닌가?” 이를테면 FTA의 핵심 중 하나는 외국인 투자의 자유화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점진적으로 투자의 자유화, 자본시장의 개방을 거쳐왔다. 현 정부와 한나라당이 유독 이번 FTA 문제에 관해서 ‘매국적인’ 행태를 보였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김대중-노무현 정부 하에서도 이미 진행된 개방조치[ex, 자유경제지구]들은 과연 ‘애국적인’ 것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당시 자본의 논리에 의해 사회의 구조가 재편되었던 것은 ‘참을만 했고’ 지금 한나라당 정부 하에서 동일한 일이 새삼스레 재연되는 것은 ‘천인공노할’ 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이 물음을 어떤 냉소적인 의도에서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작금의 반FTA 투쟁에 있어서 진정한 ‘적’은 누구인지, 그리고 그 투쟁의 ‘대의’는 무엇인지를 제대로 사고하고 싶을 뿐이다.
  서툰 정념의 분출은 정치적으로 불모적인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이를테면 FTA가 비준된 지금 이 시점에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재연하는 것에는 전혀 공감할 수 없다. 그것은 FTA가 이미 비준되었으니 싸움은 [적어도 다음 총선과 대선까지는] 사실상 끝났다는,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진보대연합’에 의한 ‘집권’ 뿐이라는 선언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여기서 보는 것은 사실상의 ‘패배주의’이다. [실제로는 장지연 선생도 친일로 돌아섰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작금 FTA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부터 지속되었던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연장선 상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권리와 주권을 대주주들, 대기업 및 재벌, 기술관료들에게 하나 둘씩 넘겨주었고, 이번의 FTA도 우리가 겪어야 할 굴욕의 마지막은 결코 아닐 것이다. FTA는 오히려 싸움의 새로운 라운드가, 이미 반복되었던 싸움의 장이 다시 갱신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 일부가 주장하듯 FTA 통과 이후 당장 나라가 망하거나 서민의 삶이 끝장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우리의 삶은 지금까지 어려웠던 딱 그만큼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들이 특정 정치인에 열광하거나, 반대로 욕설을 쏟아낸 적은 있어도, 자본과 의회권력을 ‘현실에서’ 근본적으로 통제했던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앞으로는 바로 그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
  반복하자면, FTA가 가져올 결과가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예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 그것이 우리들의 미래와 우리들의 ‘주권’을 판돈으로 내건 ‘도박’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도박에는 분명 확률상으로 유리한 도박과 불리한 도박이 있다. 그러나 FTA가 어느 쪽의 도박인지와 무관하게, 그것이 소수의 몫을 위해 보통 사람들의 삶, 권리, 재산을 한 ‘밑천’으로 삼은 도박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지금의 ‘날치기’ 국면에서 우리들이 세워야할 원칙은 분명하다. 이것은 ‘원칙’의 문제이다. 그것은 ‘당신들의 도박에 우리의 미래를 담보로 삼지 말라’는 원칙이다. 자본의 이해를 배후에 둔 무수한 관료들, 전문가들이 국민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FTA 정국 때나 그 이전이나 한결 같았다. “걱정하지 말라, 똑똑하고 유능한 우리들이 리스크 매니지먼트를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저러한 허황된 수사를 한꺼풀 벗겨내면 결국 앞서 말한 ‘도박꾼’의 논리가 근저에 자리잡고 있다. “하면 된다, 자신감을 가져라!”고 외친 김문수의 저 발언도 동일한 최악의 도박꾼의 논리를 충실하게 따르는 셈이다. 그리고 저러한 수사가 붕괴할 때 보통사람들이 마주쳐야할 가혹한 현실이 무엇인지는 이미 지난날의 금융위기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FTA와 관련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저 “기술관료의 언어로 말하는 자본”에 대항해서 인민주권의 원칙을 바로 세우는 싸움의 장이 될 것이다.

 ·  ·  · 공유하기 · 삭제

한-미 FTA 앞, 국가와 헌법을 묻다


이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11-11일자 기사 '한-미 FTA 앞, 국가와 헌법을 묻다'를 퍼왔습니다.

1. “차종에 대한 비메탄유기가스의 배출량은 캘리포니아 규정집 제13편제1961(b)(1)(A)조에 규정된 것보다 더 엄격하지 아니할 것이다.”(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부속서 9-나 자동차 작업반 부속서한) 시민이 물었다. “환경 기준조차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것 아니냐.” 정부가 답했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가장 엄격한 기준을 채택하는 미국 캘리포니아 기준을 도입하며, 우리 배출가스 기준을 캘리포니아주가 정하는 것은 아니다.”(지난 11월 2일 외교통상부 대변인) 미국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규정을 바꾸면 어떻게 될까? 한-미 FTA의 맨얼굴이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자유무역협정’은 조약이다. 헌법상 조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헌법 제6조). 미국은 다른 나라와 조약이 아닌 행정협정(Executive Agreement)을 체결하기도 한다. 한-미 FTA가 그것이다. 그런데 미 의회는 행정협정 중에서 통상협정(Trade Agreement)에 대해서는 별도의 이행법을 만들어 내용을 규정함과 동시에 효력을 제한한다. 과연 한-미 FTA는 미국의 법과 제도, 행정 조치와 실무 관행을 어느 정도 변화시키는 협정일까? 또박또박 읽어야 한다.
미국의 한-미 FTA 이행법의 핵심은 이렇다. “한-미 FTA 제1장(최초 규정 및 정의), 제11장(투자), 제21장(투명성), 제23장(예외) 및 제24장(최종규정)을 이행하는 데에 행정 조치의 변경은 필요 없다”, “제5장(의약품 및 의료기기)을 이행하는 데에 법, 행정부 규정 및 실무 변경은 필요 없다”, “제7장(관세행정 및 무역 원활화), 제9장(무역에 대한 기술장벽), 제19장(노동), 제20장(환경)을 이행하는 데에 법의 변경은 필요 없다”, “제10장(무역구제)을 이행하는 데에 미국의 반덤핑 또는 상계 관세 법률과 규정을 바꿀 필요가 없다”, “제3장(농업), 제8장(위생 및 식물검역 조치), 제12장(국경 간 서비스 무역), 제13장(금융서비스), 제14장(통신), 제15장(전자상거래), 제16장(경쟁), 제18장(지적재산권)을 이행하는 데에 법이나 행정 조치의 변경은 필요 없다”….
미국은 바뀔 거라곤 없다. 바꿀 필요도 없고 바꿀 생각조차 없었다. 가장 고전적 의미의 순수한 ‘자유무역협정’ 그대로다. 그래서 바뀌는 거라곤 ‘무역관세’와 ‘수수료’다. 관세와 수수료를 인하하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역관세와 수수료를 인하해야 한다. 실무 관행을 바꿔야 한다. 행정 조치를 바꿔야 한다. 경제질서를 우회전해야 한다. 이미 10개 이상의 법을 바꿨고, 대기 중인 법만도 20여 개다. 세제도 개편해야 한다. 종국엔 국민투표에 의하지 않고 헌법을 바꿔야 한다. 해석 개헌이 아니라, 헌법 아래 있는 조약이 헌법을 치받아, 헌법을 바꿔버리는 꼴이다.
미국은 그대로, 한국만 뒤집어진다
2. 목표가 달랐다. 미 의회와 행정부는 한-미 FTA의 목표를 ‘관세협상이 아니라 규제완화, 민영화를 되돌릴 수 없도록 하는 것’과 ‘비관세장벽 제거’에 두었다. 당연히 미 이행법 제102조는 “미국의 어떠한 법령에 불합치하는 협정의 규정 또는 어떠한 자나 상황에 대한 동 규정의 적용은 효력을 가지지 아니한다”고 정했다. 한국은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통상 목표에 호응했다.
참여정부 시절에 협상 책임자였고 지금은 삼성전자 사장으로 가 있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말을 되새겨보자. “한-미 FTA는 낡은 일본식 법과 제도를 버리고 미국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한-미 FTA 청와대 브리핑 제1호·2006). ‘감세, 규제완화, 작은 정부’를 내용으로 삼는 신자유주의 정부, 주주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 시장만능주의에 기반한 미국식 국가 모델을 우리 국가 모델로 채택하자는 것이었다. 어떤 시민주권의 동의조차 없이 통상 관료와 행정부 책임자의 정치적 결단으로 국가 모델을 직수입하는 역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시민주권에 대한 심각한 모반이었다.


<절망의 무게>, 2011-정용일

삼정전자 사장님의 헌법학
그로부터 2년 뒤 미국에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물론 우리도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다. 당시 미국이 주도하던 국제통화기금(IMF)의 처방전은 철저히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것이었다. 초고금리 정책이었다. 재정적으론 긴축을 요구했다. 강력한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했다. 금융기관은 통폐합되고, 당연히 정리해고가 실시됐다. 그럼에도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 이는 드물었다. 그러나 2008년 미국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처방전을 내놓았다. 초고금리가 아니라 ‘초저금리’였다. 재정 적자의 나라 미국에서 강력한 재정 투입이 있었다. 대규모 인위적 경기부양에 나섰다. ‘대마불사’(大馬不死)는 정치적 현실이 되었다. 금융기관을 살렸고, 자동차 회사를 국가가 먹여살렸다. 미국식 금융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최소 개입 원칙은 온데간데없었다.
돌이켜보면 한-미 FTA 협상을 시작한 2006년이나 협상을 강압적으로 비준하려는 2011년이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이해는 거의 무지에 가깝다. 같은 점이라면, 미국식 경제 모델과 국가 모델을 역사의 완성태로 이해하려는 점이다.
3. 한국과 미국, 두 나라 간 헌법의 차이가 국가 모델의 차이다. 미국은 계약의 자유를 근본적 권리로서 보호하며 사적 소유권 보호가 철저하다. 지적재산권 보호가 강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협정에서 지적재산권은 미국의 주된 관심사다. 지적재산권을 규정한 제18.10조 27항의 일부다. “(지적재산권) 침해자의 금전적인 동기를 제거하려는 정책에 합치되게, 장래의 침해를 억지하기에 충분한 벌금형뿐만 아니라 징역형 선고를 포함하는 처벌. 각 당사국은 나아가 사법 당국이 형사적 침해가 상업적 이익, 사적인 금전적 이득을 목적으로 발생하는 때에, 실제 형기의 부과를 포함하여 장래의 침해를 억지하기에 충분한 수준에서 처벌하도록 권장한다.”
책도둑은 글로벌 파렴치범
지적재산권은 보호해야 마땅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전통적으로(물론 현실과 합치된다고 강변하고 싶지는 않지만)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존재한다. 미국은 이런 사회 문화조차 바꾸고 싶어 한다. 수단 하나로 형사 절차에 깊숙이 개입하고 싶어 했다. 형의 종류를 형법도 아닌 조약에 규정했다. 입법 재량에 대한 중대한 침해다. 사법 당국에는 강력한 처벌을 주문했다. 우리 대법원은 조약에 이런 내용까지 담긴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동의했을까? 통상교섭본부가 이런 부분까지 약속하도록 시민주권은 미리 위임했던 걸까? 사법부의 양형 재량까지 한-미 FTA가 정해주었다. 미국식 법과 제도와 관행을 받아들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방편이었다.
4. 물론 우리도 계약과 시장에 기반한 사회다. ‘소유권 중심 사회’라는 것 또한 인정한다. 다만 우리 사회는 재산권은 보장하되,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제23조 2항)고 정해두었다. 시민의 기본권은 인정하되,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제37조 2항 전단)고 유보해두었다.
한국과 미국의 헌법 모델에서 결정적 차이는 바로 이 시대의 우상, ‘경제’에 있다. 미국 헌법에는 경제 조항이 없다. ‘정부 편’과 ‘기본권 편’만으로 구성된 것이 미국 헌법이다. 한국에 있는 ‘경제질서 편’이 없다. 계약 조항과 적정 절차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헌법 의식이다. 우리나라는 다르다. 경제질서 편을 두었고, 그곳에 9개 조문을 두었다. 그중에서 결정적 의미는 헌법 제119조 2항에 있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경제질서를 이렇게 정의한다. “사유재산제를 바탕으로 하고 자유경쟁을 존중하는 자유시장경제 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이에 수반되는 갖가지 규제와 조정을 용인하는 사회적 시장경제 질서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헌재 1996.4.25 92헌바47) 그래서 우리나라 헌법이 정한 경제질서, 즉 이런 헌법의 지배를 받는 국가 모델은 ‘자유시장경제 질서’와 ‘사회적 시장경제 질서’의 조화에 있다. ‘공익’과 ‘사익’의 조화에 있다. ‘개인’과 ‘나라’의 균형에 있다. 특히 경제 영역에서만큼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조화, 제조업과 농·어업의 조화 등 공익적 가치를 추구한다.
어쩌면 한-미 FTA 최고의 수혜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대변하는 재벌이 될 것이다. ‘시장만능주의’를 추구해온 전경련에 헌법 제119조에서 127조에 이르는 경제 편은 최악의 ‘전봇대’였기 때문이다. 한-미 FTA에 더 이상 농·어민 보호는 없다. 중소기업 보호도 없다. 시민주권에 대한 책임성과 반응성의 원리도 없다. 오로지 투자자의, 투자자에 의한, 투자자를 위한 국가만이 존재한다.
그 중심에 ‘투자자-국가 소송제’(ISD)가 있다. 미국 뉴욕 월가의 초국적 자본이 한국에 투자하는 경우를 예상해보자(미국 자본을 미국인들만의 자본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협소한 이해다). 이들은 △우리 중앙정부나 시도 정부가 투자 인가나 투자 계약을 위반한 경우 △직접 혹은 간접 수용으로 인해 자신들의 투자에 손해가 발생했을 경우 국제중재청구를 제기할 수 있다. 투자 계약은 미국이 맺은 FTA 중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설명이 필요하다. 투자 계약은 한마디로 공공서비스 민영화 계약이다. 사회적 인프라 개발에 참여할 수 있는 계약이다.
통째로 삭제되는 헌법 ‘경제편’
이를 ‘투자 계약’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화장했다. “발전 또는 배전, 용수 처리 또는 분배 또는 통신과 같이 당사국을 대신하여 공중에 서비스를 공급하는 권리 또는 정부의 배타적 또는 현저한 이용과 혜택을 위한 것이 아닌 도로, 교량, 운하, 댐 또는 배관의 건설과 같은 기반시설 사업을 수행할 권리”(제11.28조). 즉 상하수도 민영화, 전력 민영화 계약이고 대중이 이용하는 도로나 댐 등에 대한 건설 계약이다. 미국 투자자의 광범위한 참여를 보장했고,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가 계약을 위반할 경우 곧바로 소송을 제기하도록 규정했다.
현 정부가 인천공항 민영화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는데, 바뀐 새 정부가 이를 취소했다고 하자. 곧바로 소송감이다. 얻은 건 투자자의 민영화 참여권이요, 잃은 건 공공정책의 재량성이다. 후진할 수 없다. 시민을 위해, 공공복리를 위해 규제를 강화하는 것은 전진이 아니라 후진으로 인정된다. 개방과 자유화를 향해, 투자자를 위한 기업국가만을 목표로 앞으로 내달려야 한다. 브레이크 없는 미국산 자동차에 동승한 형국이다.
대한민국 주권은 투자자에게 있다
5. 간접 수용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란이 거세다. 미국 판례법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법리다. 세상 어느 곳도 헌법에 간접 수용을 명문화한 나라는 없다. 오로지 재산권의 절대적 보장과 계약에 기초한 미국 사회라서 가능한 법리다. 문제는 공공정책의 재량성이다. 공공정책의 무기력화다. 물론 정부는 재량을 충분히 확보해두었다고 방어한다. 일부는 옳고, 대부분 틀렸다. “극히 심하거나 불균형적인 때와 같은 드문 상황을 제외하고는 공중보건, 안전, 환경 및 부동산 가격 안정화(예컨대 저소득층 가계의 주거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를 통한)와 같은 정당한 공공복지 목적을 보호하기 위하여 고안되고 적용되는 당사국의 비차별적인 규제 행위는 간접 수용을 구성하지 아니한다.”(부속서 11-나 수용) 담배에 대해 가격규제 정책이 강화될 수 있다. 한국 정부에는 공중보건이지만 미국 투자자에게는 간접 수용이다.
조약에 대한 해석은 각자 유리하게 하는 법이다. 모든 공공정책은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정부 정책이 공중보건 등 4가지 정책에 한정될 수도 없다. 달리 해석될 여지가 충분한 만큼 정부 정책이 소송 대상이 될 여지도 충분하다. 정책의 시민영향성을 고려하기보단 외국 투자자에 대한 영향을 고려해야 할 판이다.
정부는 왜 시장에 대한 조정 권한과 공공정책에 대한 결정 역량을 스스로 축소하길 바랄까. 왜 “경제가 사회적 관계에 포함되는 대신 사회적 관계가 경제 체계 안에 포함돼버리는”(칼 폴라니) 상황을 희망하는 것일까. 왜 시민주권보다 투자자 재산권을 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인간의 존엄보단 계약의 자유를 최고 가치로 여기는 초시장사회, 초시장국가 모델을 왜 구태여 탐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흐릿한 먼 곳을 무턱대고 쳐다보지 말고 우리가 서 있는 주변의 복잡한 상황을 잠시 동안 조용히 응시하자.”(토머스 칼라일)

글. 최재천 (변호사) 헌법학 박사, 전 국회의원(17대). 저서로 (2006), (2009) 등이 있다.

전기료 왜곡, 전력대란 또 부를 수도


이글은 한겨레신문 Economy Insight 2011-11-01일자 기사를 퍼왔습니다.
[국내 이슈]9·15 정전 사태 뒤 전력상황 분석

류이근  경제부 기자

단전 가구 1415만 호, 미사일 기지와 최전방 GOP(일반 전초) 등 군부대 124곳 정전, 중소기업체 5775곳 단전 피해, 승강기 정지 및 긴급구조 1902건, 개인 병원 7곳 수술 중 정전 발생 피해, 축사 및 양식장 피해 10건, 신호등 정지로 인한 교통혼잡 2877건, 현금자동인출기 정지 및 은행의 업무 마감 지연 417건….
지난 9월15일 초유의 정전 사태로 발생한 피해다. 정부 합동조사단은 지난 9월 말 이번 사태의 핵심 원인이 수요 예측 및 공급 능력 판단의 실패와 전력 당국의 부실한 대응에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식경제부 공무원을 비롯해 한국전력거래소와 한국전력의 임직원 등 17명을 문책했다.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스스로 청와대에 사표를 냈다.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한편으로 수요 예측 시스템을 더 정교하게 재정비하면 충분한 걸까? 이와 관련해 전력산업연구회는 지난 10월14일 ‘9·15 정전사태와 전력산업 구조개선 방향’이란 제목의 세미나를 열었다. 흥미로운 건 이 자리에 참석한 전기 및 경제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정전 사태가 일시적 사고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됐고, 그 구조적 문제엔 ‘잘못된 가격신호’가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한 사실이다.
세미나 발제를 맡은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전기요금의 인상 수준이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을 훨씬 밑돈 반면, 고유가로 석유·석탄·가스 등의 가격이 급등하면서 다른 에너지에서 전력으로 수요 전환이 물밀듯이 발생했다. 이로 인한 전력 수요 급증이 9·15 정전 사태의 근본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손 교수와 다른 토론자들의 얘기를 요약하면 이번 사태는 ‘낮은 전기요금→전력 수요 증가→전력 공급 기반 약화→순환 정전’이란 도미노의 결과물이다.
이번 정전 사태를 계기로 전기요금을 둘러싼 4가지 오해와 진실을 살펴보자.


지난 9월15일 일어난 사상 초유의 정전 사태는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수 있다. 상당수의 가구가 정전된 서울 여의도의 한 아파트 단지 모습.

정치적 결정에 따라 왜곡된 전기료 체계
전기는 필수 재화다. 따라서 그 가격은 단순히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공공요금이니만큼 가격 결정권은 정부의 손에 달렸다. 정부는 국민의 물가 부담을 덜어준다는 명분 아래 물가가 들썩일 때마다 전기요금 인상을 억눌러왔다. 이런 현상은 2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과연 고맙기만 한 일일까?
1982년부터 지난해까지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40%에 이른다. 그런데 같은 기간 전기요금은 18.5% 상승했다. 지난 19년 동안 물건과 서비스의 가격이 1천원에서 3400원으로 올랐는데도, 전기요금만은 1천원에서 1185원 인상에 그친 셈이다.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전기요금은 이 기간에 65.1% 하락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전기요금 인상률은 다른 공공요금과 비교해도 크게 낮다. 버스와 지하철 요금의 경우 비슷한 기간(1984~2010년)에 각각 750%, 450% 인상됐다. 손 교수는 “정부가 전기요금을 정치적으로 결정해 전력시장에 정확한 가격 시그널(신호)을 주지 못해 공기업 적자를 확대시키고 전력의 공급 기반을 약화시킨 점은 큰 정책적 실패”라고 주장했다. 전력 및 경제 전문가들은 정부가 선거를 의식해 전력 요금을 계속 동결하거나 찔끔찔끔 인상해오면서 가격체계가 크게 왜곡됐다고 말한다.
정치에 희생된 전기요금은 경제 상식마저 깬다. 전력을 팔면 팔수록 손해인 전력산업의 기형적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전기의 원가보상률은 2006년 이후 계속 100%를 밑돌고 있다. 2008년엔 77.7%로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1천원을 받아야 밑지지 않는데 777원을 받고 전기를 팔았다는 말이다.

싼 전기료 덕에 초과 이윤 누리는 대기업
공급자인 한전이 원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전기를 팔면, 수요자가 이득을 보기 마련이다. 그만큼 싼값에 전기를 사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혜택을 수요자가 모두 똑같이 누린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바로 전기요금 체계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심야전력을 뺄 경우 산업용, 주택용, 농사용, 교육용, 가로등, 일반용(5가지 종별 외 사용자) 등 6종의 요금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들 종별 원가와 판매가가 다 다른데, 지난해 기준으로 산업용의 원가보상률은 89.4%에 불과했다. 즉, 산업용 전력을 쓰는 약 35만 개 업체들은 원가 1천원짜리 전력을 평균 894원에 쓰는 것이다. 심야를 뺀 주택용 원가보상률 94.2%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인 셈이다.
실제 산업용 전력 사용량은 지난해 전체 사용량의 절반이 넘는 53.6%에 이르지만, 판매 수익은 전체 37조3900억원의 47.7%(17조8306억원)로 나타났다. 수요자들이 전체적으로 싼값에 전기를 쓰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일반 국민이 더 비싼 값에 전기를 사서 쓰면서 산업계를 지원해주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산업용 전기요금을 100이라고 할 때 일본은 266,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은 184나 된다.
혜택은 산업계 안에서도 특히 대기업에 집중된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해 산업용 전력의 총괄원가 미달에 따른 기업별 수혜 현황을 분석한 결과, 전력 사용이 많은 대기업 200곳이 전체 산업용 전력의 무려 42.3%를 썼다. 이들에게 돌아간 수혜 금액은 산업계 전체인 2조1157억원의 46%가 넘는 9832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전력 사용량 상위 5개 업체인 삼성전자(1위), 현대제철(2위), 포스코(3위), LG디스플레이(4위), 하이닉스(5위)의 수혜 금액만 3265억원에 이른다.
낮은 산업용 전기요금은 과거 수출 주도 성장 전략의 산물이다. 기업 처지에서는 비용에 해당하는 전기요금을 낮추면 수출할 때 가격경쟁력이 생긴다. 이런 산업정책 아래 수출 대기업들은 원가보다 훨씬 낮은 금액에 전기를 쓰면서 초과 이윤을 누려왔다. 
국회예산정책처는 “과거에 비해 가격경쟁력보다 품질 경쟁이 중요해지고 있어 전력요금 인상이 산업체의 국제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이 줄어들고 있다”며 “또한 낮은 전기요금은 기업체들의 에너지 절감 노력을 반감시켜왔다”고 지적했다. 

싼 전기료는 결국 국민의 희생 요구
우리나라의 산업용과 주택용 전기요금은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공급자인 한전은 해마다 큰 손실을 보고 있다. 한전은 2008년 사상 첫 3조원(당기순이익 기준)의 적자를 기록한 이후 3년 연속 적자 행진을 이어갔다. 올해도 약 2조원의 영업 적자가 예상된다. 한전의 차입금은 2008~2010년 17조3천억원이 늘었고, 부채비율은 같은 기간 87.3%에서 140.1%로 급증했다.
한전의 손실이 한전 주주에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소비자인 국민에게 ‘희생의 대가’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부는 2008년 추경예산에서 8350원을 떼서 한전의 손실을 일부 보전해줬다. 국민이 낸 세금을 한전에 곧바로 투입한 것이다. 한전은 상장회사이긴 하지만 정부가 최대주주로 지분 51%를 지녔다. 따라서 손실이 나면 우선 자체 구조조정 등 경영합리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런데 이마저 안 되면, 결국 정부에서 수혈을 받아야 한다. 
전력산업의 적자가 지속되면 최소한의 투자 재원 조달마저 어렵게 된다. 이로 인해 낙후된 전력산업은 모두에게 다양한 형태의 비용을 요구할 수 있다. 강승진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지금 우리가 전기를 싼값에 쓰는 대가를 5~10년 뒤 후대 사용자들이 치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에너지 자원이 거의 없는데도 에너지 소비만큼은 산유국 부럽지 않게 펑펑 쓰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전력소비량은 OECD 평균의 1.7배 수준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4월 세계경제전망(WEO)에서 “한국은 1인당 실질 GDP가 1% 증가하면, 1인당 에너지 소비 또한 거의 1% 증가해왔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인당 전력소비량은 우리 국민소득의 거의 2배인 일본을 추월했다. 또 지난해 전력사용량은 무려 10.1% 늘었다. 지난 10년 평균 증가율은 5.5%에 이른다.

에너지 다소비 경제 부추기는 전기료 체계
정한경 선임연구위원은 “전기요금이 기름값보다 비정상적으로 싸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선 2차 에너지인 전기가 1차 에너지인 기름과 가스보다 되레 저렴하다는 얘기다. 실제 지난해 기준으로 에너지원별 가격을 비교해보면, 소비자가격과 발열량, 열효율 등을 고려한 난방용 등유와 경유의 가격이 전기요금보다 각각 25%, 63%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선 전기요금이 기름값보다 50% 정도 비싼 편이다. 우리나라 전기요금이 싸다 보니 1차 연료에 대한 대체 소비가 전기로 몰렸다. 이 때문에 전체 전력 수요의 24%에 이르는 전기난방 수요가 2004년보다 곱절 가까이 늘어났다.
기름과 석탄, 가스 등을 때어 전기로 전환할 때 투입 에너지의 약 60%가 손실된다. 따라서 우리의 전력산업 구조는 비싼 1차 에너지를 사다 애써 전기로 만들어 싼값에 공급하는 기형적인 모양새다. 싼값 때문에 전력 소비는 해마다 크게 늘어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해외에서 매년 더 많은 석유와 석탄, 가스 등 1차 에너지원을 비싼 값에 수입해온다. 그만큼 전체 경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2008년의 경우 에너지 수입액이 무려 1400억달러에 이르렀다. 이는 우리나라의 선박·자동차·반도체·철강 부문 수출액을 모두 합한 금액에 버금간다. 

ryuyigeun@hani.co.kr

"현병철 위원장, 인권위 말아드신 소감이?"


이글은 프레시안 2011-11-25일자 기사 '"현병철 위원장, 인권위 말아드신 소감이?"'를 퍼왔습니다.
인권위 10주년 행사서 인권단체들 항의ㆍ비판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한지 25일로 만 10년이 됐다. 그간 인권위는 국가권력의 인권침해를 감시, 견제하고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성역 없이 인권침해 현장을조사하고 인권정책을 생산하고 의견을 내는 기구로 자임해왔다. 하지만 지금의 현병철 위원장 체제 아래 인권위 모습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걸까.

국가인권위원회는 25일 서울 중구 한국언론회관에서 10주년 기념식을 진행했다. 현병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은 "내년부터 '인권증진 3개년 계획'에 따라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고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현 위원장은 "이를 위해 자유권과 사회권 등 기본적 인권의 제도적 보장과 강화를 위해 힘쓰고, 이주민, 노인, 아동과 청소년, 시설 생활인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보호와 함께 북한인권, 기업인권, 정보인권 증진을 역점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현 위원장은 "또한 인권침해와 차별행위에 대한 조사 및 구제의 실효성을 강화하고, 인권교육과 홍보활동을 체계적으로 전개, 인권존중문화가 확산되도록 역량을 집중하겠다"고도 했다.

▲ 24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1가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현병철) 설립 10주년 기념식에서 인권단체연석회의 및 국가인권위원회 제자리찾기 공동행동 등 회원들이 행사장 입구에서 인권위 독립성 훼손과 장애인권 후퇴 등에 시위하며 진입하려 하고 있다. ⓒ뉴시스

인권단체 회원들, 식장 들어와 "정권 하수인 현병철 물러나라"

하지만 이 기념사를 읽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기념식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권단체 회원 10여 명이 식장에 들어와 '현병철 인권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는 등 한 때 소동이 벌어진 것.

이들은 "이명박의 친위대 현병철은 사퇴하라", "인권위를 말아 드신 소감이 어떤가", "국가인권만 옹호하는 인권위를 해체하라", "정권의 하수인, 권력의 개는 물러나라", "현병철은 인권을 알기는 하나" 등을 외치며 약 10여 분 간 소란을 피우다 주최 측에 의해 강제로 퇴거됐다.

이들이 식장에 난입한 이유는 현병철 위원장 이후 인권위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물론 인권위에서는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항변한다. 실제 인권위에 제기된 사건진정 건수는 매년 늘어나 양적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2002년 2790건이었던 진정 건수는 지난해 9168건으로 매년 증가세를 보였다. 올해는 10월 말 기준 6165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80% 수준이다.

반면, 인권위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정부의 인권위 권고안 수용률은 현병철 위원장취임이후 현저히 떨어졌다. 지난 10년간 자료를 종합하여 정리해 보면 인권위가 발표한 정책권고를 관계 기관이 그대로 수용한 수용률은 27%, 일부수용까지를 합한 수용률은 57%이다.

하지만 이 수치는 역대 대통령 재임 기간에 따라 차이가 나타난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시기라고 할 수 있는 2001년부터 2007년까지는 연 평균 74% 정도의 수용률(일부수용 포함)인데 반해 그 이후부터 최근까지(2011년 9월 말)는 연 평균 30%로 급격히 떨어진다.

정책 권고에서 70% 이상 수용률을 보인다는 것은 매우 높은 것으로, 이는 관련기관이 인권위 권고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수용률이 30%대로 떨어졌다는 것은 인권위의 권고가 다른 국가기관으로부터 제대로 존중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현병철 체제 이후, 제 역할 못하는 인권위

뿐만 아니다. 현병철 위원장 취임 이후 최고 의결기구인 전원위원회(전원위)가 정부와 여당이 추천한 보수인사로 채워지면서 우편향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9년 MBC <pd> 검찰 수사에 대한 인권위 의견 제출안이 부결됐고, 지난해는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 진정이 기각됐다. 용산 참사 관련, 의견 표명도 하지 못했다. 올해 인권위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인권보호 관련 의견 표명을 부결해 인권위 내·외부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pd>

이 때문에 더 이상 인권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며 지난해 8월부터 '쓰나미식'으로 주요 인사들이 인권위를 떠났다. 유남주 인권위 상임위원 등 다수의 인권위원과 인권위 설립 초기부터 관여해온 김형완 인권정책과장 등 직원 10여 명이 연이어 떠났다. 인권위에서 인권조사 등을 진행할 때, 전문자문 역할을 담당해온 상담위원 60여 명도 독립성에문제가 있다며 집단사퇴했다.

결국, 이러한 여러 이유로 2011년 들어 인권위는 관계 기관의 법령 조회에 의한 의견표명 이외에는 의미 있는 인권정책 권고를 하지 못하고 있다. 2010년 말까지 정책권고를 이끈 상임위원들이 현병철 위원장이 이끄는 인권위에 항의하며 떠나고 보수적 인사들이 그 뒤를 채우면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뉴시스


ⓒ프레시안(허환주)

"권력기관에 면죄부는 주는 권력옹호기구 됐다"

하지만 현병철 위원장은 취임사에서 밝힌 대로 계속해서 '마이웨이'일 뿐이다. 인권단체연석회의 등 인권단체는 25일 1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한국언론재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10년간 인권위는 우리사회에 인권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는 데 분명 기여했다"며 "하지만 현재의 인권위 모습은 후퇴하는 한국 인권에 힘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인권위 문제의 핵심은 독립성 훼손"이라며 "인권위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명박 정부의 인권위 흔들기와 무자격자 인권위원 인선으로 인권위는 권력기관을 감시하는 인권옹호기구가 아니라 권력기관에 면죄부를 주는 권력옹호기구가 되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시민사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인권위는 보수정권 등장으로 2년 반 만에 7년 반의 성과를 무너뜨리고 있다"며 "현병철 위원장을 비롯한 무자격 인권위원들은 사퇴해야 한다. 더 이상 인권위의 이름으로 인권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촉구했다.

이광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차장은 "인권위는 인권 침해 현장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간섭해도 아무 소용도 없는 북한 인권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사무차장은 "결국 권력의 입맛에 맞는 소림만 하고 있다"며 "이게 10돌을 맞은 인권위의 자화상이다"고 꼬집었다.

명숙 인권단체연석회의 활동가는 "오늘 기념식에는 이전에 인권위 위원장을 역임하신 분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며 "국가에 의해 인권이 침해당해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인권위의 지금 상황을 정확히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질타했다.

명숙 활동가는 "인권위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인사 쇄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아무 것도 모르고 오로지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무자격자는 사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허환주 기자

전자주민증은 만능? 감시·통제도 ‘만능’ 우려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1-11-23일자 기사 '전자주민증은 만능? 감시·통제도 ‘만능’ 우려'를 퍼왔습니다.
의료보험·국민연금·인감 등 41개 항목 과도한 정보 집적
내부인 유출 배제 못해, 전국민 개인정보 통째 넘어갈 수도


# 자영업을 하는 A(50)씨는 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 자신도 모르게 지인이 자신의 명의로 1천만원이 넘는 대출을 받았기 때문이다. 황당한 것은 지인이 자신의 사업등록증과 주민등록증 사본을 제출하자 은행과 카드사가 대출을 해줬다는 사실이다. A씨는 지인에게 화가 났지만 이렇게 쉽게 본인 확인 없이 남에게 돈을 빌려주는 은행과 카드사의 행태에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A씨는 주민번호를 변경하지 않고서는 언제 또다시 이 같은 일을 당할지 불안해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정부가 전자주민등록증(이하 전자주민증)을 도입하려고 하고 있다. 과연 전자주민증은 A씨와 같은 개인정보 도용 피해를 막을 수 있을까? 

정부는 지난해 9월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전자주민등록증 도입 논란이 뜨거워지고 있다. 정부는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통해 “주민등록증 수록정보를 전자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수록정보의 위조 및 변조를 방지하고 개인정보 유출을 방지하는 데에 기여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개정안에 따르면 전자주민등록증에는 성명, 성별, 생년월일, 주소, 사진, 주민등록번호, 지문, 발행일, 발행번호가 표시되고, 전자적 수록의 방법, 수록된 정보의 타인에 대한 제공 또는 열람 방법, 보안 조치 등은 대통령령으로 정하게 된다. 

전자주민증은 IC 카드 형태의 주민등록증으로 주민등록등초본, 운전면허증, 의료보험증, 국민연금증서, 인감 등 7개 분야 41개 항목의 개인정보가 수록될 예정이라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 

시민단체들은 정부와 같은 이유를 들어 전자주민등록증 도입을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시민단체들은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는 상황에서 정보가 집적화된 전자주민증은 유출 위험이 더 크고, 나아가 정부가 손쉽게 개인정보를 모아 국민을 통제 아래 놓고 사생활까지 감시할 수 있다는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김장회 행정안전부 주민과장은 언론 기고를 통해 “주민번호처럼 민감한 정보는 표면에서 삭제하고 IC칩에만 저장해 본인 동의하에만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며 시민단체들이 제기한 개인정보 오남용에 대한 지적을 반박했다. 

하지만 문화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진보네트워크 등 시민단체들은 “비전자 신분증의 위험요소가 ‘증’ 자체의 위변조에 집중되어 있는데 비해, 전자 신분증의 위험요소는 발급부터 이용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례로 주민번호 3500만 건이 유출된 네이트 사건만 보더라도 시민들이 속수무책으로 개인정보 피해를 당했는데도 정부는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83명의 시민들과 함께 유출된 주민번호를 변경해 줄 것을 행정안전부에 요청했지만 ‘정책 혼란’을 이유로 거부한 상황이다. 개인정보 유출과 같은 피해를 막으려면 정부가 전자주민등록증을 도입할 게 아니라 인터넷 실명제부터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전자주민증을 도입하면 금융기관을 비롯해 신분을 확인하는 기관에서 정부가 제공하는 판독기를 도입해야 하는데 그만큼 해킹의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을 낳고 있다. 정부는 판독기를 통해 읽은 정보를 수집 저장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적용할 예정이라고 했지만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실제 정부는 지난 2008년 전자여권을 도입하면서 ‘전자칩이 내장돼 개인정보 유출로부터 안전하다’고 했지만 지난해 8월부터 11월까지 전자여권 신청자 92만여 명의 주민번호와 여권번호 등의 정보가 여권발급기 운용업체 직원에 의해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집적화된 정보의 시스템은 외부 해킹에 노출돼 있기도 하지만 내부인을 통한 유출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 정보업계의 상식이다.


정부는 전자주민등록증이 위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절대 안전하다고 홍보했던 전자여권도 개인정보가 무더기로 유출된 바 있다. 해킹 위험도 있지만 내부인을 통한 유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은 지난 2008년 인권단체연석회의의 전자여권 반대집회. ⓒ연합뉴스

지난 14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보낸 의견서에서 “해킹으로 인한 개인정보의 유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다양한 관리방안이나 기술적 보호대책을 발표했지만 개인정보 유출사건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피해규모도 더욱 커지고 있다”며 “결국 기술적 관리 보호대책만으로 개인 정부 유출을 막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부는 이에 대해서도 온라인 전송 방식이 아니어서 해킹과 정보 유출 위험이 낮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개정안에는 전자주민증에 관한 정의조차 내놓지 않았고, 기술적 세부사항 역시 시행령으로 위임해 놓은 상태다. 

4천만명의 주민등록증을 바꾸는 국책사업임을 감안하면 해당 법령이 부실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진보네트워크와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장차 온라인 전송을 금지하기 위해서는 정보통신망을 이용하거나 중앙 주민데이터베이스에 질의하여 전자주민증 수록내용의 진정성에 대해서 확인할 수 없도록 법률로 규정하거나 질의 내역을 저장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정보통신망에서 전자적 방법의 신분확인용으로 전자주민증을 사용할 수 없다는 규정이 명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자주민증 도입과 관련해 예산 낭비 논란도 뜨겁다. 정부 측은 전자주민증 도입으로 약 5천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부는 또한 10년간 현행 주민증을 교체하는 비용이 3284억원으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유출로 인한 사회적 손실 비용을 감안해서라도 차라리 전자주민증을 도입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반면 민주주의법학연구회는 현재 정부의 비용 추계는 과소평가된 측면이 있다며 누락된 비용을 합치면 약 1조원 가까운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다. 주민전자증 도입에 따른 판독기 설치 비용도 만만치 않다. 관련업계는 전자주민증 판독기 장비 비용으로 약 440억원을 추정하고 있지만 향후 장비의 업그레이드 비용을 감안한다면 비용은 커질 수 밖에 없다. 

특히 시민단체는 온라인 전송 방식이 아니어서 감시 의혹이 있을 수 없다는 정부의 설명과 달리 현 정부의 행태로 봤을 때 충분히 국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전자주민증을 활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미디어오늘이 입수한 2007년 7월 행정자치부가 삼성SDS와 에스원에 의뢰해 만든 ‘주민등록증 발전모델 2단계 기술적 타당성 연구 시스템 개발 구축 부문 최종보고서'를 살펴보면 전자주민증이 얼마나 보안 위협에 취약한지 확인할 수 있다. 보고서에는 ‘주민등록DB의 일관성 유지 방안 추천안'으로 주민등록정보센터를 만들어 전국 주민등록 데이터를 하나의 통합 DB로 구축하는 방안이 제시돼 있다. 

“통합된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데이터의 중복성을 제거하여 일관성을 유지하고 대국민 서비스 품질을 높인다"는 명분이지만 주민등록정보센터 한 곳에 개인정보가 집중된 만큼 유출될 위험도 그만큼 크다고 볼 수 있다. 

이 보고서에는 전자주민증 발급 데이터 전달 방안을 개선하기 위해 행정자치부 서버와 연동해 온라인 발급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온라인 연결이 없으니 정보 유출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해 왔으나 이 보고서에서는 주민등록 전산정보 센터와 온라인 연결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전자주민증의 현금영수증 카드 기능을 활용하는 방안도 문제가 많다. 현금영수증 사용내역이 국세청에서 행정자치부로 전달되도록 하자는 아이디어인데 이 경우 정부가 국민의 사생활을 감시한다는 논란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인권위원회 강성준 활동가는 “현재는 은행과 같은 인터넷 가입을 할 때 공인인증서를 받고 있지만 신원을 전자적으로 확인하게 되면 주민증을 가지고 본인을 확인하는 단계로까지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감시·통제수단으로서의 전자주민증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재진 기자 jinpress@mediatoday.co.kr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 주민번호 변경 허용해야”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1-11-23일자 기사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 주민번호 변경 허용해야”'를 퍼왔습니다.
[인터뷰]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도입하려는 전자주민증 대해 “추정할 수 없는 다양한 범죄가 예상된다”며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교수는 지난 7월 발생한 3500만 건 주민번호 유출 사건의 피해자이기고 하다.

한 교수는 지난 7월 네이트 유출 사건 직전 해당 사이트에 가입하고 난 뒤 네이트 측으로부터 암호화된 주민번호와 주소 등개인신상 정보가 유출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한 교수는 지난 4일 개인정보 유출로 2차, 3차의 피해를 당할 수 있다며 83명의 시민과 함께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요구하는 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제기했다.

한 교수는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정부는 전자주민증에 대해 위조 가능성이 없다고 하지만 얼마든지 위조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며 “문제는 현행 아날로그 주민증은 증을 가진 한 사람만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면 전자주민증은 정보가 유출될 경우 정보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범죄를 저지르고 그 범죄의 행태도 현재로서는 추정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고 말했다.

현재 빈번하게 벌어지는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 대해서는 마땅한 대책도 내놓지 못하면서 오히려 유출 위험이 큰 전자주민증을 도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다.

한 교수는 대책으로 “주민등록제를 폐지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맞지만,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 사항을 분리해 정보를 분산시키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들의 주민등록번호 변경 요구를 거부한 행정안전부에 대해서는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보호해야한다는 의무가 있는데 현재는 일종의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셈”이라고 비난했다.

주민등록번호 변경 요구가 자칫 국민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많은 비용이 든다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서도 한 교수는 일침을 가했다.

한 교수는 “영국에서는 성전환을 한 재수자가 여성감옥으로 옮겨달라는 소송을 내자 정부가 이런 요구가 수용되면 계속 이어진다고 변론했지만 결국 법원이 재수자의 손을 들어줬다”며 “네이트 유출사건도 마찬가지로 국가가 위험을 야기했으면 예방하는 비용 역시 국가가 부담해야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에게는 원래 주민번호가 있는 증과 다른 번호의 증을 새로 만들어줘서 연동시키며 기술적으로 비용으로도 큰 수고가 들지 않는다”면서 “결론은 국민을 위해서 전자주민증 도입과 같은 정책을 폐지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이재진 기자 jin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