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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13일 월요일

김현종, 美에 “FTA 개성공단 좌파이슈”…노무현‧김근태 속여


이글은 뉴스페이스 2012-02-12일자 기사 '김현종, 美에 “FTA 개성공단 좌파이슈”…노무현‧김근태 속여;를 퍼왔습니다.
“盧 훈령 어겨…국회가 압박한다 美에 호소”

김현종 당시 협상교섭본부장은 2007년 한미FTA 추진 당시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강력하게 요구했던 개성공단 문제를 철저히 속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3회는 여러 개의 미국 외교문서를 근거로 김 본부장의 ‘이중 행보’를 짚었다.

한미FTA 찬반 여부를 떠나 개성공단 문제는 자주 언급된다. 추진 당시 개성공단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한미FTA에 함께 포함시키는 문제는 노무현 정부의 큰 관심사였지만 해결되지 못한 해 한미FTA는 타결됐다. 이와 관련해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문건에는 개성공단이 왜 협정문에서 빠졌는지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이 들어 있다.

김현종 협상교섭본부장은 2007년 4월 2일 한미FTA 협정 타결 직후 “개성공단 제품도 한미FTA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김 본부장은 “역외 가공 지역을 지정할 수 있도록 하는데 미 측이 원칙적으로 수용을 했다”며 “이제 남은 것은 양국이 한반도 역외가공지역위원회를 설치하고 이 위원회에서 역외가공지역을 지정하면 한국산과 동일하게 한미FTA 특혜 관세를 적용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대국민 담화를 통해 개성공단을 한미FTA 협상의 대표적 성과로 꼽으며 “앞으로 개성공단 뿐 아니라 북한 전역이 이 근거에 혜택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미국측 입장은 이와는 전혀 달랐다. 바티야 미 무역대표부 부대표는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제품을 현재 한미FTA의 적용을 받지 않게 돼 있다”면서 “개성공단 제품을 미국으로 수출할 때 한국산으로 원산지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실제 한미FTA 협정문에는 ‘개성공단’이라는 용어는 찾아 볼 수 없다. 협정 발효 1년 후 한미 공동으로 한반도 역외가공위원회를 설립해 역외가공지역 제품의 한미FTA 적용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나타났다. 결정기준도 북한 비핵화와 역외가공지역들의 노동 임금 조건들이서 결국 미국 손에 달린 셈인 것으로 드러났다.

개성공단 제품도 한미FTA 포함시키려 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였지만 협상 결과는 이처럼 보잘 것 없었던 것이다.

뉴스타파는 노무현 정부 협상책임자들은 개성공단 이슈 관철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지를 외교문서를 근거로 따져나갔다.

지난 2007년 3월 당시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이 방한 내용을 기록한 주한 미 대사관 3급 비밀전문에 따르면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은 폴슨 장관에게 “개성공단 이슈는 노무현 정부의 좌익 지지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다”라고 말한 것으로 적혀있다.


ⓒ 뉴스타파 화면캡처

또 김현종 본부장은 “당시 북미 관계의 개선이 통상교섭본부장으로서의 자기 직무를 더 어렵게 만든다”고 말했으며 “국회가 개성공단 제품을 FTA에 포함하라고 자신을 더 세게 압박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만난 시점은 한미FTA의 마지막 협상을 앞둔 시점이었고 김 본부장의 “개성공단 문제가 좌익들에게 중요한 이슈”라는 언급이 미국 측에 어떤 신호가 됐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는 보도했다.

2006년 6월 14일자 주한미국 대사관 외교 전문은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FTA 1차 협상때 우리측 대표단이 “개성공단 문제를 최초 요구사항에 포함시키라는 정부의 확고한 훈령을 어겼다”는 외교통상부 북미 국장의 발언도 담고 있다.

한미FTA 초기부터 우리 협상 대표단이 청와대의 입장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미FTA 협상 막바지인 2007년 3월 주한 미 대사관 외교전문은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의 발언도 담고 있다.

김 의장은 미 대사와 만나 “한미FTA는 더 면밀하게 검토해 다음 정권에서 결론을 내야 하며, 개성공단 제품을 FTA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당시 미 대시 버시바우는 “한미FTA는 지금 아니면 안 되고, 개성공단 관련 요구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퇴임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이 시작한 한미FTA결과에 대해 별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했다. 2008년 9월 주한 미 대사관 외교전문에 따르면 버시바우 대사가 이임 인사차 노 전 대통령을 방문해 “무엇보다 한미FTA 타결에 대해 감사한다, 미국에 돌아가 한미FTA 비준 위애 노력하겠다”고 덕담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별 반응 보이지 않았다. 버시바우 대사는 “자신의 성취에 대해선 별로 자긍심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당시 분위기를 기록했다.

결국 한미FTA는 이명박 정부 들어 더 개악된 채 날치기 통과됐고 노무현 정부 당시 한미FTA 협상 책임자는 삼성그룹 사장으로 갔다. 또 협상과 재협상의 주역은 여전히 통상교섭 업무를 지휘하고 있다.

위키리스크 전문은 지난해 터져 나왔지만 지상파와 기성 언론이 외면하는 상황에서 대안언론 ‘뉴스타파’가 이같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자 트위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트위터에는 “뉴스타파 3회 봤다면 왜 노무현 정부가 FTA를 추진했는지 알 게된다. 바로 개성공단 때문이었다. 개성공단을 살려서 남북한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이기를 바랬다”, “한미FTA와 개성공단.. FTA실무자들은 애초부터 개성공단제품 따위엔 관심이 없었음이 위키리크스 자료 통해 드러났다. 노무현 대통령의 관심과 지시가 있었음에도..김현종,김종훈..와..참 잘했다 니들..”,

“뉴스타파 3회를 보니 노무현 정부가 한미FTA 국익에 도움되지 않는다면 안해도 된다고 했는데 김종훈 김현종 등 통상외교쪽 몇 놈들의 장난에... 정부의 명령을 어기고..노무현 대통령과 김근태 장관 역시 개성공단제품을 국내 상품으로 인정하는 줄 알았는데...저놈들의 장난이?”, “참여정부 당시 통상관료들이 한미FTA를 추진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개성공단 제품이 한국산으로 인정된다고 보고하고 미국에게는 인정되지 않는 것으로 협상을 진행했다. 사실상 고의로 대통령 행정명령인 훈령을 어긴 것이다” 등의 비난이 이어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 패러디봇인 ‘김빙삼’은 “결국 노무현대통령은 한미FTA를 통해 북한을 미국과 경제적으로 연결 시키면서 개방하게 하는, 그래서 남북관계 개선을 할라카는 전략을 염두에 둔 것이었구만. 그거를 미국 간첩 김현종이캉 매국노 김종훈이 어그러뜨린기네”라고 일침을 가했다.

2012년 1월 22일 일요일

고문기술자 이근안 목사직 면직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현기자 블로그 휴심정 2012-01-19일자 기사 '고문기술자 이근안 목사직 면직'을 퍼왔습니다.

지난 2008년 목사 안수를 받는 이근안씨 사진 인터넷스타2.0 캡쳐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씨가 목사직을 잃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개혁총회(개혁총회·총회장·정서영 목사) 관계자는 19일“지난 14일 긴급 징계위원회를 열어 이근안 씨의 목사직을 면직했다”고 밝혔다. 교단에서 일단 면직이 결정되면 복직이 안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혁총회쪽은 한국종교개혁시민연대와  한국교회정화운동협의회 등 교계 시민단체들이 이날 이근안씨에 대한 ‘목사직 안수 철회 요구서’와 탄원서를 서울 관악구 남현동 사무실에 제출하자 징계 사실을 뒤늦게 공표했다.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다 지난달 별세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장례식 사진 <한겨레> 자료

개혁총회쪽은 김근태 고문의 별세소식이 전해진 뒤 인터넷 포털 다음에서 이근안씨 목사 안수 철회서명이 펼쳐지고, 보수단체인 한국교회언론회마저 논평에서 ‘무분별하게 목사직을 수여하는 교단의 행태’를 지적하는 등 비판이 고조되자 ‘이씨가 목사로서 품위를 훼손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경 대공분실 경감이었던 이근안씨는 1985년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이른바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돼 수감됐을 때 잔인한 고문 사실이 1988년 보도로 드러나자 10년10개월 동안 도망다니다 공소시효가 끝난 1999년 10월 ‘자수’해 징역 7년을 살고 2006년 11월 출소했다.


지난 2000년 수감되는 이근안씨 사진 <한겨레> 자료

 그는 교도소에서 신학대 통신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출석 수업 등을 마친 뒤 2008년 10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목사가 된 뒤 교정 선교와 신앙 간증을 하면서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닌 애국자”라고 표현하며 고문을 정당화해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이씨가 목사로서 소속됐던 개혁총회는 67개 노회에 3656개 교회가 소속돼 있으며,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가입 교단이라고 밝히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2012년 1월 3일 화요일

이준석 검증 없이 띄우기에 급급한 언론들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1-02일자 기사 '이준석 검증 없이 띄우기에 급급한 언론들'을 퍼왔습니다.
연합, 트위터 추모를 “먼발치서 애도”로 둔갑… 조중동 “여당 구원투수” 극찬일색

친여·보수성향의 언론들이 이준석 한나라당 비대위원 띄우기에 나섰다.
조선·중앙·동아·연합은 비대위가 출범한 12월 말에 이어 연초까지 이 위원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면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천안함, 카이스트, 무상급식, 전철연에 대한 이 위원의 과거 발언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검증은 하지 않고 칭찬 일색의 기사만 내놓는 보수언론의 태도에 시민들은 ‘이준석을 노골적으로 띄우는 것 아니냐’며 비판하고 있다.

연합뉴스는 임진년 새해 아침인 지난 1일 이 위원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다. 비대위 활동 일주일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 포부에 대한 문답이 중심이다. 인터뷰 말미에 ‘그저 엄친아이지 20대의 목소리와 관계없다’는 지적에 대해서 물었지만 이 위원은 “‘20대의 목소리가 뭔데요?’라고 묻고 싶다”고 답하는 등 사실상 이 위원에 대한 홍보성 기사였다는 평가다.

연합은 같은날 오후에도 이 위원이 트위터로 고 김근태 한반도재단 이사장을 추모한 것을 두고 ‘이준석, 故김근태 먼발치서 애도’라고 보도했다. 연합은 이 위원이 지난해 12월 31일 빈소를 직접 방문하지 않고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고 김근태 이사장이 고문을 당했던 남영동의 거리 사진과 함께 “이렇게 가까운데 한마디도 못해서 죄송해요...나중에 받아주세요..”라고 쓴 글을 인용했다.


이준석 한나라당 비대위원의 트위터

포털사이트 다음에 송고된 연합뉴스의 이 기사에는 2일 오후 현재 800여 개의 댓글이 달렸다. “왜 자꾸 띄워주지? 이게 기삿거리인가? … 광고성기사가 올라온다.”, “이젠 사람 마음까지 읽어서 기사 쓰냐?” 등 기사를 풍자하거나 비꼬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유체이탈 조문이냐?”, “거기에서 허수아비 짓 그만하고 진정 이 나라를 위하는 사람으로 사시오” 등 이 위원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젊음, 도전정신과 같은 이미지를 안고 비대위 활동을 시작한 이준석 위원은 정작 그 철학이나 문제의식 등 알맹이를 꼼꼼히 살펴보면 전형적인 ‘한나라당맨’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연합뉴스를 비롯한 조중동 등 친여·보수성향의 언론은 그의 ‘이력서’에만 급급한 채 그의 철학과 문제의식과 같은 정치력을 보여줄 수 있는 자질에 대한 검증은 외면하고 있다.
특히 이준석 위원은 전국철거민연합을 ‘미친놈들’이라고 비난한 게 논란이 되자 사과했고, 과거 천안함 사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과학자들을 ‘정치과학자’로, 카이스트 자살 사건을 두고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글을 남겨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또한 이 위원은 친환경 무상급식에 대해 “차라리 ‘원적외선 바이오맥반석은나노 향균 저탄소 자기주도적 친환경 e-무상급식’이라고 하지 그러냐?”고 표현하는 등 고민이 깊지 않고 경솔한 언행을 드러내왔다. 반면 그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자수성가형’으로 두둔하며 ‘내가 해봤는데’ 발언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찢어지게 가난해본 적이 있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트위터와 일부 언론은 이 같은 그의 과거 발언 등을 검증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조선·중앙·동아는 되레 이 위원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데 급급했다.


조선일보 12월 28일자 1면

조선일보 종편인 TV조선은 2일 밤 11시 방송분에 ‘최·박의 시사토크 판’에 이 위원을 섭외해 녹화를 마쳤다. TV조선은 방송을 앞두고 이 위원을 “여당 구원투수로 나선 스물일곱 젊은이”로 소개했지만, 내용 어디에도 이 위원에 대한 세간의 평가와 비판은 보이지 않았다. 조선일보 역시 지난해 12월 28일자 1면에 태블릿PC를 사용하는 이 위원을 찍은 사진과 함께 ‘26세, 한나라를 바꾸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중앙일보도 같은 날짜 3면 머리기사에서 이 위원에 대해 “‘안철수스러움’이 풍긴다”며 “한나라당이 목말라했던 ‘이미지 자산’”이라고 극찬했다. 동아일보도 4면 머리기사에서 이 위원을 소개하는데 3분의 1 가량을 할애했지만 검증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버드 수재’, ‘젊은 벤처사업가’ 등으로 치장하기 바쁜 지면들이었다.

‘친박’ 유승민 의원실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기도 한 이 위원은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직접 영입한 인물로 ‘검찰수사국민검증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이 위원은 선관위 홈피 디도스 공격에 대한 검찰수사를 당 차원에서 조사하고 있다.


동아일보 12월 28일자 4면

2012년 1월 1일 일요일

최강욱 "김근태 유죄?…'검사는 사냥개', '판사는 괴물'"


이글은 오마이뉴스 2011-12-31일자 기사 '최강욱 "김근태 유죄?…'검사는 사냥개', '판사는 괴물'"'을 퍼왔습니다.
민주화 대부 김근태 영면에 페이스북 통해 검찰과 법원 통렬히 비판


▲ 최강욱 변호사(사진=페이스북)
고문 후유증으로 타계한 '민주화의 대부' 김근태 의장과 관련, 최강욱 변호사가 고문수사를 촉구하는 '김근태'의 호소를 외면한 채 고문경관을 처벌하기는커녕 공산주의자로 몰아간 검사와 유죄를 인정했던 판사 그리고 반성 없이 그들이 검사장과 대법관까지 오르게 한 검찰과 법원을 통렬히 비판했다.

국방부 검찰단 고등검찰부장을 역임한 최 변호사는 최근엔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의 피해자인 김종익 씨 변호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동안 사법부에 대해 쓴소리를 해왔다.

최강욱 변호사는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먼저 "영웅은 떠나 별이 되었다. 한 때 그의 동지였던 이들, 심상정과 박노해의 거처를 불지 않는다는 이유로 알몸상태에서 갖은 고문을 당했던 오늘의 '실세' 김문수와 이재오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이어 "김근태의 영정 앞에 떳떳이 설 수 있을까? 변절에 대한 숱한 변명과 궤변을 이제는 진솔하게 마음속으로나마 사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는 고인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펼쳤던 이들이 현재인 고인과 대척점에 있는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최 변호사는 특히 고문피해자인 '김근태'를 오히려 '빨갱이'로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내렸던 검사와 검찰 그리고 판사와 법원을 싸잡아 비난했다.

그는 "고문 피해를 밝히며 수사를 촉구하는 김근태의 호소를 애써 외면한 채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이라며, 고문경관을 처벌하기는커녕 김근태를 속속들이 빨갛게 물든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던 정권의 개. 사냥개로서의 사명에 충실해 결국 검사의 별이라는 검사장으로 출세를 거듭한 검사 K씨"라고 실명을 거론하며 '정권의 사냥개'로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어 "후일까지 '고문사실에 대하여는 피의자 김근태의 주장만이 있을 뿐 이를 뒷받침할 하등의 자료가 없었으며 관련 재판부에서도 이러한 피의자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변명한 대단한 K씨"라고 지적하며 "물론 이근안의 고문사실이 밝혀져 처벌받은 뒤까지 단 한 번도 반성하지 않은 대한민국 검찰"이라고 비판했다.

또 "법정에서 고문 사실을 호소하는 피고인 김근태의 진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그에게 유죄를 인정해 징역 7년을 선고한 판사 S씨. 그리하여 K씨가 변명하고 기댈 언덕을 만들어 준 괴물"이라며 "그토록 탁월한 '재판 능력'을 바탕으로 사법부의 요직을 섭렵하며 후일 대법관까지 지낸 사람"이라고 질타했다.

아울러 "과거사를 반성한다면서도 검찰의 잘못일 뿐 법원은 어쩔 수 없었다며 짐짓 헛기침만 날리는 대한민국 법원"이라고 일갈했다.

최 변호사는 "이들은, 이 조직은 김근태의 죽음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라는 질문을 던진 뒤 "설마 자신들의 '품위 넘치는 삶'과 김근태의 신산한 삶을 비교하며 안도감에 휩싸이진 않았겠지. 그저 덮이고 말았을 일을 굳이 밝혀내 자신들의 명예에 흠집을 낸 사람으로 김근태를 기억하진 않겠지. 그들이 누리는 달콤한 삶과 권력이 결국 김근태의 헌신과 희생을 딛고 이루어진 것이란 점을 부인하진 않겠지. 최소한의 도리를 아는 인간이라면, 설마 지금은 진심으로 천벌을 두려워하겠지"라고 자답했다.

그는 또 "자신을 알아 달라며, 출세한 자신에게 즉각적인 존경과 복종을 표현하라며 아랫사람을 을러대다 결국 억지 화해까지 만들어낸 변절자들은 지금도 자신의 삶이 김근태의 그것보다 나은 것이라 자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건 아니겠지. 심문을 했을 뿐 고문을 하지 않았으며, 예술의 경지에까지 승화시킨 기술로 빨갱이를 잡았을 뿐이라 간증하신다는 이근안 목사님도 김근태의 서거를 보며 이제 고통이 끝났다고 기꺼워하는 것은 아니겠지"라고 꼬집었다.

최 변호사는 그러면서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들이 사람이라면. 최소한 사람의 탈을 쓴 생물이라면"라고 간절히 바랬다.

그는 "다시 사마천의 탄식이 떠오르는 날이다. 묵은해는 이토록 안타까운 별을 하늘로 보내며 저물어간다"고 고인을 그리워하며 "그래서 나는 저기에 등장한 것들의 삶을 기억할 것이다. 절대 잊지 않고 지켜볼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탄식은 과연 천도(天道)라는 것은 있는 것인가? 착한 이가 곤경에 빠지는 것이 하늘의 도인가? 라는 것이다.

"하늘의 도(天道)는 사사롭지 않고 늘 착한 이와 함께 한다고 하는데, 백이와 숙제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인가? 그들은 행실이 그토록 고결해도 굶어죽었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 진정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안연이라 했지만, 안연은 자주 궁핍하여 굶주리다가 끝내 요절했다. … 극악무도한 도척은 날마다 무고한 이를 죽이고 사람의 간을 꺼내 먹었으며 무리 수천 명을 모아 포악방자하게 천하를 횡행했지만 끝내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 이른바 하늘의 도라고 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是邪非邪)?"

최 변호사는 끝으로 "김근태 의장님. 이제 편히 쉬세요. 남은 일은 저희에게 맡기시고..."라고 영면을 기원했다.

한편, 최 변호사의 이 글에는 220명이 넘는 친구들이 추천했고, "멋진 글이어서 더 서럽군요"라는 등 30개가 넘는 공유 댓글이 달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2011년 12월 31일 토요일

김근태의 마지막 말 "2012년을 점령하라"


이글은 프레시안 2011-12-30일자 기사 '김근태의 마지막 말 "2012년을 점령하라"'를 퍼왔습니다.
'세계의 양심수' 김근태, 하늘로 가다

"아름다운 꼴찌로 기억해 달라"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광주 경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로의 개혁 후보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며 남긴 말이다. 그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심정으로 지금은 죽는다"고도 했다. 두 마디는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드라마틱한 말이었다. '6.3 세대'로 386 운동권 '대부'로 불렸던 김근태, 그는 현실정치에서 만년 비주류였다. '비주류의 정점'이라는 게 있다면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47년 2월 14일 경기도 부천에서 출생한 김근태는 중학교 3학년 때 5.16쿠데타를 목격했다. 강제로 교직을 그만두게 된 그의 아버지는 충격을 받았고 곧 심장판막증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어머님은 동대문 시장에서 여자 스타킹과 양말을 받아다 팔아 김근태를 키웠다.

그는 경기고를 졸업하고 1965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71년 박정희 정권 부정선거 파동 반대 활동, 교련 데모에 적극 참여했고, 서울대 내란 음모 사건으로 수배를 당하게 된다. 당시 친구였던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은 감옥에 들어갔다. 이후 74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또 다시 수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렇게 도망하기를 7년,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다.


▲ 학창 시절의 김근태 ⓒ김근태 미니홈피
▲ 민청련 시절 김근태(오른 쪽은 장영달 전 의원)) ⓒ김근태 미니홈피

김근태는 새로 들어선 전두환 군부 독재에 맞서 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했고초대, 2대 의장을 지냈다. 후배들인 386세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 세력의 기획자이자 동지로 살았다. 그러나 민청련 활동으로 인해 그는 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이 전무'로 통하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전기와 물이 그의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후 그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며 남은 생을 살아야 했다.

이 사건에 관한 진술은 이미자의 '노래 테입' 중간에 녹음된 채로 미국 인권단체에 건네졌다. 이후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세계의 양심수'라는 수식이 김근태 이름 앞에 붙었다. 87년 로버트 케네디 국제 인권상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그를 가두고 고문했던 국가보안법은 21세기 하고도 11년이 지난 오늘, 아직도 살아있다.

그는 자신의 책 에서 '인간도살장' 안에 있던 느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문을 할 때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뉘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 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런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 '세계의 양심수' 김근태는 인권상 수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김근태 미니홈피

87년 6월 항쟁을 감옥에서 맞은 그는 88년이 돼서야 석방됐다. 세상은 변했지만 '천지개벽'은 없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을 주도하고 정책기획실장, 집행위원장을 지냈지만 시대는 그를 또 다시 구속했다.

노태우 정권이 끝난 뒤 3당 합당을 지켜본 그는 현실정치로 눈을 돌린다. 95년 민주당에 입당한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 복귀와 함께 새정치국민회를 꾸렸고, 부총재 직을 맡았다. 이 때 15대 총선을 치렀고,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돼 내리 3선을 지냈다. 98년 출범한 국민의 정부 탄생에 힘을 보탠 그는, 곧바로 새천년민주당 쇄신 운동에 돌입했다. 역시 '비주류'였다.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대선 경선에서 맞붙었다. 이인제 후보와 경쟁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힘을 실어주면서 후보직을 사퇴했다. 이른바 '노풍'이 불기 시작한 광주 경선 직전이었다. 두 번째 민주 정부가 들어섰다. 노무현 탄핵 열풍을 딛고 '주류'로 올라선 열린우리당의 창당에 참여했지만 여전히 그는 '비주류'의 길을 걸으며 열린우리당을 지배했던 '중도실용노선'과 '투쟁'을 이어갔다.


▲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내던 시절 김근태 ⓒ김근태 미니홈피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낼 때는 부동산원가 공개에 반대하는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계급장 떼고 토론해보자"고 맞섰다. 그런 그를 노 전 대통령은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장관을 지내면서도 그는 영리병원을 반대하며 청와대와 각을 세웠다. 노무현 정부의 한미FTA 추진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여전한 '비주류'였다.

2011년 12월 29일 그가 떠나기 전, 지난 10월 18일 마지막으로 그의 블로그에 'posted by 김근태'로 남아 있는 글 역시, 그의 '인생'이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었다.

"(월가 시위의 요인은) 무엇보다 1%를 향한 99%의 분노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1%인지 5%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처럼 전 세계가 공감한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제패했었다는 증거다. 선진국과 후진국, 강대국과 약소국, 민주국가와 비민주국가의 구분 없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세계적 대세였던 것이다. 그리고 2008년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인 월가의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희생도, 반성도, 징벌도 없는 불공평함에 분노한 것이다.
...
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그가 남긴 마지막 글의 제목이다.

"2012년을 점령하라"



/박세열 기자 

"이근안, 이래도 고문이 예술이고 애국이었나?"


이글은 프레시안 2011-12-30일자 기사 '"이근안, 이래도 고문이 예술이고 애국이었나?"'를 퍼왔습니다.
김근태의 용서와 이근안의 파렴치

26년간 떨리던 민주당 김근태 상임고문의 손이 침대아래로 '툭' 떨어지자, 병실 주변에는 여명보다 안개가 먼저 깔렸다. 30일 새벽 5시 30분 '세상의 양심'은 시리디시린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64세의 지난한 삶을 놨다. 사인은 고문 후유증.

선대인 경제전략연구소장은 트위터(@kennedian3)에 "정녕 하나님은 있는 겁니까"라며 "평생 민주화와 정치 발전 위해 헌신했던 김근태 선생님은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고, 그를 고문했던 이근안은 목사로 변신해 고문은 예술이고 애국이었다고 떠들고 다니는 세상"이라고 한탄했다.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김근태 상임고문과 이근안 전 경감의 악연은 26년 전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시작됐다. 김 상임고문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1985년 9월 4일 구속됐다. 그 후 그는 17일간 매일 5시간씩 이 전 경감에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았다.

"고문을 할 때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뉘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김근태 책 )

고문 트라우마는 '죽음의 그림자'처럼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치과에 가는 것조차 꺼렸다고 한다. 의자에 반쯤 누운 채 얼굴을 가리는 순간, 바로 전기고문이 연상됐기 때문. 2001년 대선 경선 때 참모진은 물고문으로 얻은 비염과 축농증 때문에 전달력이 떨어진다며 수술을 권했다. 그렇게 수술대에 올라 마취를 하는 과정은 그를 다시 남영동 대공분실로 데려갔다. 수술 후 그는 "칠성판(고문대)에 다시 올라간 느낌이었다"고 했다.


▲ '고문 기술자' 이근안 ⓒ연합

하지만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기억은 다르다. 이 전 경감은 작년 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고문 행위가 "애국 행위"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신문(訊問) 기술자"로 지칭, "그런 의미에서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다"라고 덧붙였다.

"(김근태 상임고문에게) 전기 고문을 한 건 사실이지만, 220볼트 전기를 쓴 게 아니고 면도기에 들어 있던 배터리를 썼다. 내가 취미 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AA 건전지2개'를 가지고 겁을 준 것뿐... 몇 시간 전부터 '너 전기로 지질 거다'라고 겁을 준 다음에 전기 잘 통하라고 소금물 뿌린 발가락에 배터리를 갖다 대고 겁을 주니 지하조직 일체를 자백했다."

1985년 납북어부 김성한 씨 고문 혐의로 88년부터 수배를 받던 이 전 경감은 10년 10개월 만인 1999년 10월 검찰에 자수했다. 이미 김 상임고문 사건을 포함해 대부분의 사건이 도피생활 중 공소시효가 지난 상태였으나, '특정범죄가중처벌법 4조의2' 규정에 따라 7년 형을 선고 받았다.

자수는 했지만, '청룡봉사상'을 포함하여 재직 기간 중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고 대공 분야에서는 "이근안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는 말을 들었던 그는 '고문 기술자'라는 말이 억울했다. 그는 과의 인터뷰에서 "훈장을 타서 매달 10만 원씩 받을 수 있는 돈도 안 받았다"며 "내가 그 돈을 받기 위해서 애국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돈 받으려고 그랬나. 마찬가지다"라고 자신을 안중근 의사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2010년 2월 7일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김 상임고문이 이 전 경감을 옥중면회 했다. 이 전 경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김 장관이 들어오자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지난 일은 죄송하게 됐다'며 고개를 숙이자 김 장관이 양팔을 벌려 포옹을 해왔다. 그리고는 '그게 어떻게 개인의 잘못이냐. 이 시대가 낳은 비극 아니냐'며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닌가."

정작 면회를 마친 김 상임고문은 그날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면회 2주 뒤 자신의 홈페이지에 "저 사죄는 사실일까?"라며 혼란스러워했다. 자신의 사타구니에까지 전기고문을 가했던 자였다.

작가 공지영 씨는 관련 일화 한편을 트위터(@congjee)에 소개했다.

"몇 년 전 뵈었을 때, 우연히 이근안을 만났다고. 그가 울며 잘못했다 용서해달라고 했을 때 너무 가식처럼 느껴져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고. 그게 몇 달 후까지 자신을 괴롭힌다고. 나 너무 옹졸한가? 물으셨죠."

이 전 경감은 2006년 11월 출소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자신이 목회자로 입문한 건 "간첩죄로 잡아들인 애들이 후일 민주화 인사로 보상받는 걸 보고 울화가 치밀어 감옥에서, 믿을 수 있는 나라, 배신 없는 나라를 찾다 보니 하늘 나라를 찾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당신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이 자리에 왔다"

김근태는 애초 이근안을 만나야 할지 망설였고, 면회 사실 공개도 원치 않았다고 한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물론 이근안 씨를 만난 것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참회하겠다며 목사가 된 이의 마음은 미해결 사건으로 남을 것 같다. 김근태는 "당신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으나, 시대가 이근안을 용서했을지는 의문이다.



/이명선 기자

2011년 12월 16일 금요일

고문 피해자, 김근태는 돌아와야 한다


이글은 대자보 2011-12-13일자 기사 '고문 피해자, 김근태는 돌아와야 한다'를 퍼왔습니다.
[정문순 칼럼] 한국사회가 빚진 김근태, 아직 다 못 갚아 안타까움 더해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이 많이 아프다고 한다. 상임고문이라고 하니까 현실 정치에서 물러나 뒷방 노인으로 늙어가는 줄 알았는데 투병 중이었던 것이다. 김근태라고 하면, ‘그 유명한 고문 사건’이라는 타이틀이 자동적으로 붙는 인물이지만 지금 젊은 세대가 그 이름을 얼마나 알까. 모르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고문’이니 ‘민주화’니 하는 이름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산다면 다행이겠다. 

그 실력이나 자질을 생각할 때 기대에 못 미쳐서 안타까운 사람을 꼽는다면, 김근태가 그에 속한다고 본다. 한나라당 이름을 달고 선거에 나오더라도 미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는지 헤아린 적도 있는데, 김근태가 그랬다. 불의와 죽음의 시대를 한 몸으로 감당한 인물이라면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고 실력을 발휘해야 할 것 같은데, 그는 둘 다 아쉬운 느낌을 준다. 

80년대를 거리와 감옥에서 보낸 그는 90년대 중반 민주개혁 세력의 대표자로서 제도권 정치에 입성했고 늘 일정한 지분을 누리기는 했다. 그러나 어떤 결정적인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02년 대통령 경선 후보에 나왔지만 일찌감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는 경쟁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 부류에게서 보이는 개성적이고 강렬한 면모가 부족했다. 어딘지 의기소침하고 유약해 보인다는 건 정치인에게 마이너스였다. 참여정부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을 맡을 때는 차기 대선 주자에서 라이벌로 일컬어지며 통일부 장관으로 승승장구하던 정동영 의원보다 뒤처지는 모습이었다. 정 의원보다 덜 개혁적이거나 뭔가를 잘못해선 그런 것도 아니었다. 계파를 만드는 데 골몰하지도 않았고 적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현실 정치라는 게 비정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참여정부 말기 부동산 정책으로 갈팡질팡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계급장 떼고 맞붙어 보자.”라며 호기롭게 맞서던 장면은 정치인 김근태가 그답지 않게 내뿜은 마지막 포스로 기억된다. 그리고 총선이 있었고, 상대도 안되는 ‘듣보잡’으로 봤던 ‘음주 방송’ 신지호 의원에게 졌다. 뉴라이트 출신에게도 못 이길 정도로 민주 투사의 상징은 초라해졌다. 그가 잃은 것은 국회의원 뱃지만이 아니었다. 고문으로 망가진 건강은 시간이 지난다고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에게 알리지 않았지만 수년 전부터 뇌혈관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한 인간을 처절히 능욕한 고문 가해자들은 악마였을까. 김근태는 자신에게 고문을 가했던 자들이 돌아서서 저들끼리 가족 걱정하고 자식 키우는 이야기를 나누더라고 했다. 현기영 소설가도 4.3항쟁을 조명한 소설을 쓴 후 공안기관에 잡혀가 고문을 당할 때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고문 기술자들은 악마가 아니고 평범한 가장이었는지 모른다. 고문을 가한 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사람 같지도 않은 ‘빨갱이’ 잡는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자신들은 악한 것이 아니라 악역을 담당할 뿐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런 자들이라면 반성하고 살기를 기대하기는 무리다. 

김근태의 관절을 뽑고 전기고문을 가하고 익사 직전으로 몰아간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그 악마의 손으로 십자가와 성경을 만지작거리는 사람이 되어 있다. 그는 옥중에서 죗값을 치르던 시절 면회 온 김근태로부터 용서를 받기까지 했다. 이근안은 김근태를 ‘칠성판’에 눕히면서 민주화가 되면 자신이 대신 누울 테니 똑같이 복수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약속은 못 지킬망정 그가 목회자로서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거나 교회에서 헛것을 배우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병석을 찾아가 손을 잡고 참회의 기도라도 올리기 바란다. 

많은 도전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집권자를 별로 안 예쁜 동물에 비유하며 욕이라도 할 수 있는 정도의 자유가 누구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 것인지 깨닫는다면,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그에게 갚을 빚이 있고 그 자신도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 유공자가 영화를 누리기는커녕 병마에 시달려 딸의 결혼식도 보지 못할 정도라면 너무 공평치 못하다. 

* 본문은 12.13 에도 게재했습니다.


* 필자는 <대자보> 편집위원이며, 문학평론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