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5일 금요일

[사설] 민주당, 지금이 기득권이나 챙기자고 할 땐가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1-11-24일자 사설 '[사설] 민주당, 지금이 기득권이나 챙기자고 할 땐가'를 퍼왔습니다.
민주당의 내부 다툼이 심각한 모양이다. 야권통합 방안을 둘러싸고 엊그제 중앙위원회를 열었으나 갈등만 노출하고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범야권의 세력 정비와 이를 위한 민주당의 환골탈태가 시급한 터에 더없이 실망스러운 모습이다.
정당 개혁 차원에서 민주당의 과제는 분명하다. 무엇보다 고령의 관료 출신 의원 등을 중심으로 퇴영적 주장이 난무하고, 그때마다 당의 진로가 흔들리는 문제점이 심각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 무효화 투쟁을 둘러싼 논란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봐야 한다. 지지 기반이 특정 지역 위주로 제한되고 젊은층과의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문제점도 간단치 않다. 국민이 안철수바람과 박원순 현상을 통해 민주당에 요구하는 것도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개방성과 역동성, 통합성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민주당 안에서도 야권통합의 명분을 부인할 사람은 없는 듯하다. 문제는 내세우는 말과 실제 효과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민주당 전당대회를 먼저 열어 당 지도부를 구성하고 외부 세력과 협상을 벌이겠다고 할 때, 과연 새로운 세력의 합류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결국 지금 민주당 안에 자리잡은 세력이 기득권을 지키고자 방어막을 치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박지원 의원 등의 주장은 이런 점에서 진정성을 인정해주기 어렵다.
손학규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도 문제다. 무엇보다 소통에 실패하고 있다. 지금 추진되는 야권통합의 철학과 비전을 제대로 알고 있는 국민이 몇이나 되겠는가. 야권통소통,ㅇ합을 제안하면서도 구체적인 노선과 방안 등에 대해 당 안팎으로 광범위하게 공론화를 실현하지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지도부한테 있다. ‘12월17일 한차례 통합 전당대회’와 관련해 정당법 절차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다는 점도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더욱이 지금은 다른 야당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한-미 에프티에이 무효화 투쟁을 벌이고 있는 시점이다. 영하의 날씨에 거리집회를 벌이다 물대포를 맞은 시민들이 ‘민주당은 어디에 갔는가’라고 묻고 있다. 민주당이 정당 개혁과 관련해 필요한 논쟁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기득권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열린 자세로 나서라는 것이다. 아울러 제1야당으로서의 국면 대응도 결코 소홀해선 안 된다. 민주당은 더는 국민을 실망시키지 말고 본분에 충실하기 바란다.

[사설] 영하 날씨에 물대포는 반인권적 폭력이다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1-11-24일자 사설 '[사설] 영하 날씨에 물대포는 반인권적 폭력이다'를 퍼왔습니다.
그제 저녁 서울광장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날치기 규탄 촛불집회 뒤 행진하려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물대포를 쏘았다. 여러 측면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공권력 남용 행위다.
우선 체감온도 영하 10도의 날씨에 물대포를 쏜 것 자체가 과잉대응일 뿐 아니라 심각한 인권침해다. 맞는 즉시 얼굴에 고드름이 얼고 살점이 찢어져 나가는 피해사례까지 있었다니 공권력 행사가 아니라 사실상의 폭력행위에 가깝다. 오죽했으면 원희룡 한나라당 최고위원마저 “체감온도 영하의 날씨에 물대포를 쏘는 것은 도가 지나치다”며 자제를 요청했겠는가. 경찰의 이번 조처를 더욱 묵과할 수 없는 까닭은 불과 2주 전 여의도에서 열린 에프티에이 저지 범국민대회에 참가했던 박희진 한국청년연대 대표가 물대포를 정면으로 맞고 고막이 파열되는 불상사가 있었는데도 경찰이 또다시 물대포를 쏘았다는 사실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강경대응이 내부 지침에 따른 것이어서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는 점이다. 경찰청은 지난달 21일 전국 지방경찰청에 지침을 내려 도로를 점거하고 해산명령을 따르지 않는 경우 곧바로 물대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도로로 나섰다고 곧바로 물대포를 쏘는 것은 명백한 과잉대응이다. 물대포는 자칫 인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제해야 하고, 도저히 다른 수단이 없을 때만 최후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경찰의 강경대응은 이명박 정부의 천박한 인권의식 수준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범위를 좁혀보면 경찰 수뇌부도 문제가 심각하다. 조현오 경찰청장은 파출소 난동이나 장례식장 폭력 등 사건이 터질 때마다 총기를 과감하게 사용하라는 지시를 남발한다. “조폭에게 인권은 고려하지 않겠다”는 말도 했다. 인권 무개념의 표본이다. 이강덕 신임 서울청장도 이에 못지않다. 영포라인으로정권,한미,ㄹㅆㅁ, 이 대통령 측근이라는 그가 취임한 뒤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거푸 일어나는 것을 보면 정권 지킴이로 총대를 메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한 모양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날치기 처리는 1%를 위해 99%의 희생을 요구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이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고, 촛불시위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헌법적 권리다. 이 대통령은 물대포 사용으로 인권을 침해하고 경찰력을 남용한 경찰 수뇌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사설]민주당, ‘이런 야당은 처음’이라는 탄식 들리나


이글은 경향신문 2011-11-24일자 사설 '[사설]민주당, ‘이런 야당은 처음’이라는 탄식 들리나'를 퍼왔습니다.
민주당의 위기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힘 한번 쓰지 못한 채 한나라당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날치기를 허용하고도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다. 애초부터 날치기를 막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지 못한 만큼 어느 정도 예상된 바이지만 사후적이나마 통렬하게 그간의 과오와 실책을 반성하고 당의 정체성을 재정립해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국민에 대한 도리다. 하지만 그런 진정성을 읽을 수 없다. 네티즌들 사이에는 ‘이런 야당은 처음이다’라는 탄식이 터져나온다고 한다. 제1야당의 존재감이 곤두박질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여당의 한·미 FTA 날치기 이후에도 민주당 대응은 실망스럽다. 의원직 총사퇴나 집권 후 한·미 FTA 폐기 등 현실성 없는 구호만 난무할 뿐 치열하고도 진지한 고민이 안 보인다. 그런 식으로 한·미 FTA를 어떻게 무효화하겠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협상파’라는 인사들은 여전히 대화·타협 타령이다. 어설픈 협상 시도가 날치기 빌미만 줬다는 사실을 벌써 잊은 모양이다. 장외투쟁에 동참하고, 헌법소원도 검토한다지만 울림이 없다. 무효화 투쟁을 선도해도 시원찮을 판에 숟가락을 하나 더 얹겠다는 모습으로 비칠 뿐이다. 사즉생의 결기가 없으니 여권이 민주당의 대응을 요식행위나 통과절차쯤으로 치부한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행동해야 할 때 행동하지 않고, 책임져야 할 때 책임지지 않으니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싶다.

난관에 봉착한 야권통합 논의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그제 중앙위원회를 열어 야권통합을 결의할 예정이었으나 결정을 미뤘다. 무엇을 위한 야권통합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견을 모으지 못한 것이다. 야권통합 내홍은 제 몫 챙기기 싸움의 성격이 짙다. 어떻게든 큰판으로 대선 구도를 짜려는 대권파와 당장 내년 총선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당권파 간 충돌이라 할 수 있다. 한·미 FTA 날치기 직후 야권통합 문제로 아옹다옹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한·미 FTA 대처 과정에서 드러난 지리멸렬상이나 야권통합 내홍은 유사한 면이 있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과 한나라당의 패착에만 기대어도 내년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환상이 당의 전열을 약화시키고, 대여투쟁의 본질을 흐려놓은 것이다. 그러니 구성원들도 당의 활로보다 자신의 생존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민주당이 위기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한 위기는 더욱 심화되고, 오히려 국민들의 심판 대상이 될 공산이 크다. 민주당만 그 현실을 모르는 것 같다.

[사설]‘경쟁력 키우면 된다’는 무책임한 FTA 피해대책


이글은 경향신문 2011-11-24일자 사설 '[사설]‘경쟁력 키우면 된다’는 무책임한 FTA 피해대책'를 퍼왔습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이 날치기 처리된 이후 정부와 여당은 ‘이제 남은 것은 후속대책뿐’이라고 강조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관계장관회의에서 피해 예상분야에 대한 지원대책을 주문한 데 이어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도 “민주당이 요구한 방안의 100%를 시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후속대책은 결국 기존 FTA 피해대책의 지원액을 얼마간 늘리는 것이 될 공산이 크다. 협정 발효를 기정사실화하고 피해계층의 FTA 반대를 혈세로 무마하려 한다는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한·미 FTA 피해대책은 전혀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지원액을 늘린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 대표적인 피해분야인 농축산업의 대책을 보면 피해 추정에서부터 부실의혹을 받는다. 우리는 한·미 FTA 발효 이후 미국 농산물 수입이 연평균 4억2000만달러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 반면 미국 농무부가 추정한 한국에 대한 수출증가액은 2조1000억원으로 우리 추정치의 5배다. 이 같은 허술한 피해 추정을 바탕으로 정부는 지난 8월 22조원 규모의 피해대책을 발표했다. 그나마 수년째 이미 시행 중인 지원사업, 농어민 숙원사업 등 한·미 FTA에 따른 피해보전과 거리가 먼 갖가지 지원책을 쓸어담아 22조원을 채웠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피해보전 직불제를 제외하면 사실상 융자 형태의 지원이 대부분이다. 농업 다음으로 피해가 예상되는 제약업계도 정부의 피해 추정치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가까스로 마련된 유통법·상생법이 한·미 FTA 발효로 무력화될 경우 중소 유통상인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장치마저 없어지게 된다.

피해산업·피해계층에 대한 정부의 생각은 단순하고 무책임하다. ‘개방 파고에 맞서 경쟁력을 높이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분야가 역시 농업이다. 역대 정권은 시장 개방 때마다 ‘농업도 경쟁력을 키우면 된다’며 수십조원의 혈세를 퍼부었다. 복지정책·농촌정책·농업정책이 혼재된 ‘돈으로 때우는’ 정책의 결과 농업 경쟁력은 제자리걸음인 채 농민들만 빚더미 위에 올라앉게 됐다. 한국 농업의 미래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과 청사진을 제시하기보다는 개방 반대를 그때그때 혈세로 무마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민이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고 ‘개방’ 얘기만 나와도 사색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경쟁력을 키우면 된다’는 것이 정부 논리다. 이 대통령은 그제 관계장관회의에서 “농업이라고 세계 최고가 되지 말란 법 없다. 농민들도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농업을 수출산업으로 키울 수 있다는 적극적 자세를 갖는다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농민이 적극적으로 노력하면 세계 최고의 농업이 될 수 있다는 대통령의 지적에 공감하고 희망을 가질 농민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2011년 11월 24일 목요일

MBC·SBS까지 밥그릇 들고 튄다


이글은 시사인 2011-11-24일자 기사 'MBC·SBS까지 밥그릇 들고 튄다'를 퍼왔습니다.
코바코의 광고 독점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받은 뒤 종편은 직접 광고 영업을 하겠다고 나섰다. MBC와 SBS도 자사 렙을 만든다고 밝혔다. 미디어렙 법은 교착상태, 중소 방송은 벼랑 끝이다.

11월10일 목요일 오후 1시30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앞. CBS·불교방송·원음방송·평화방송 관계자들이 모였다. 천주교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에서 주최한 ‘미디어렙’ 토론회가 열리기 직전이었다. 잠시 후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한 종교방송사 대표는 “종교방송 4사 대표가 모일 수 있도록 일정을 잡아라”라고 지시했다. 다른 종교방송사 관계자가 받은 전화도 같은 내용이었다. 이날 오전 SBS 측이광고대행사 대표들을 초청해 조찬을 가지면서 ‘내년 1월부터 자사 미디어렙을 통해 광고 영업을 하겠다’고 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바로 연락해온 것이다. 이 자리에 있던 다른 종교방송사의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SBS가 자사 렙으로 직접 영업을 시작하면 MBC도 따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역방송사와 종교방송은 다 죽는다.”

왜 이런 말이 나올까. 먼저 일반인에게는 낯선 미디어렙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미디어렙(방송광고 판매대행사)은 방송사를 대신해 기업에 광고 시간을 팔고 수수료를 받는다. 방송사가 신문사처럼 직접 영업을 할 경우 공영성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보도·제작과 광고를 분리’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1981년부터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코바코)를 설립해 지상파 방송의 모든 방송광고를 의무적으로 위탁하도록 했다. 또 코바코는 연계 판매를 통해 방송광고 재원을 광고 취약 매체인 지역방송과 종교방송에 분배해왔다. 지상파 3사를 중심으로 팀을 나누고, 각 팀에 중소 방송사를 매칭시켜 방송광고를 연계해 판매해온 것이다.


ⓒ뉴시스 1월20일 ‘한국방송광고공사 창사 30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한 내빈들이 기념떡을 자르고 있다.

코바코는 군사독재 정권이 방송 장악 수단으로 도입한 측면이 있다. 광고주들로부터는 ‘연계 판매로 기업의 선택권을 침해하고 시장을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긍정적 기능을 해왔다는 평가도 받는다. 조준상 공공미디어연구소장은 코바코 체제의 순기능을 평가했다. 방송사와 광고주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결탁을 차단했고, 방송광고 요금 인상을 억제해 물가 수준을 안정화하는 데 기여한 점 등이 그것이다.


종편 특혜 위해 법안 미룬다는 의혹도

조 소장에 따르면, 코바코는 광고 연계 판매를 통해 지역방송·종교방송 등을 지원함으로써 미디어 생태계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데도 기여했다(연계 판매가 전체 지상파 방송광고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11%로 2010년 기준 2400여 억원). 또 코바코가 조성한 공익자금은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전당을 건립하고 수많은 예술단체를 진흥하는 데 활용되었다. EBS와 아리랑TV를 지원하고, 공익 프로그램 제작을 돕는 데도 쓰였다.

그런데 2008년 11월 헌법재판소가 코바코의 지상파 광고 독점에 대해 ‘헌법 불합치’ 판결을 내리면서 상황이 묘해졌다. 당시 방송광고 영업을 하려던 한 회사가 헌법 소원을 제기하자, 헌재는 코바코 독점 체제가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 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판결 취지에는 “코바코가 방송의 공공성을 담보하고 종교방송과 지역방송에 안정적 운영 재원을 지원한 것에 대해서 인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김민기 숭실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 같은 헌재 판결 이후 미디어렙 법안이 마련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만 3년이 되도록 미디어렙 법안 도입은 지연되었다(그간 MBC와 SBS는 방통위 권고로 코바코 대행 체제를 유지해왔다). 정당·방송사·신문사 등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최영묵 교수(성공회대·신문방송학)는 판결 이후 미디어렙 논란을 3라운드로 정리했다. 처음에는 코바코 독점 체제를 해소하는 게 문제였다. 공영과 민영으로 가를 때 MBC가 어디로 갈 것인가가 논점이었다. 최 교수는 “MBC는 기존 코바코보다는 민영 미디어렙으로 들어가고 싶어했다”라고 말했다. 기존 코바코의 판매 방식 말고 다른 방식을 선택할 경우 더 나은 광고 실적을 거둘 수 있으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공영 미디어렙과 민영 미디어렙 가운데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라(서울 MBC)’는 요구로 표현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중앙·동아·매경(조중동매)’ 종합편성채널(종편)이 허가되면서 미디어렙 논란은 2라운드로 접어들게 되었다. 종편의 직접 광고 영업을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논란이 옮아간 것이다. 일반 PP(방송채널 사용사업자)는 직접 광고 영업을 하는 것이 허용된다. 종편은 외형상 자신들이 PP이므로 직접 광고 영업을 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민주당 등 야당과 언론·시민단체의 생각은 다르다. 종편은 PP이지만 전 국민의 85%가 가입되어 있는 유료 방송이 의무적으로 전송하는 ‘특혜’를 누리는 데다 지상파와 똑같은 편성을 하기 때문에 ‘조중동매’ 종편의 광고 영업이 의무적으로 미디어렙에 위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은 일반 PP처럼 종편에 직접 광고 영업을 허용하자는 방침이었다. 이 부분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법안 처리가 미루어졌다. 이런 ‘무방비 상태’가 계속되자 일각에서는 종편들이 직접 광고 영업에 돌입하는 데 제약이 없도록 하기 위해 여당이 법안 처리를 유야무야 미루는 게 아닌가 하는 비판이 일었다.

이러던 차에 지난 10월27일 SBS 지주회사인 SBS미디어홀딩스가 이사회를 열어 미디어크리에이트(자본금 150여 억원 규모)를 자회사로 편입해 방송광고 판매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로써 미디어렙 논란은 전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SBS 측은 ‘종편 채널이 등장하고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국회 입법을 마냥 기다릴 수 없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그러자 이번에는 MBC가 독자 미디어렙 설립에 나섰다. ‘종편과 SBS가 나선 이상, 서울 MBC도 자사 렙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이에 대한 비판이 일자 MBC는 일단 한 발 뒤로 물러난 상태다. 김재철 MBC 사장은 11월7일 임원회의에서 ‘미디어렙 설립을 보류하라’고 지시했다. 그럼에도 MBC는 언제든지 자사 미디어렙 설립에 나설 태세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최영묵 교수는 “지상파들이 자사 렙을 설치해 광고 영업을 하겠다고 나서면 종편의 독자 영업을 막을 논리가 없어진다. SBS가 논점을 흐리며 나선 것이다”라고 말했다.

11월10일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린 ‘미디어렙 관련 토론회’에서는 이런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발제를 맡은 김민기 교수는 종편의 등장과 미디어렙 경쟁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한 신문이 광고를 내면 모든 신문에 광고를 내는 원턴(One-Turn) 현상이 방송광고에서도 나타날 것이다. 광고주가 돈을 내지 않아도 광고가 나오는, 일본말로 ‘뎃뽀(鐵砲)’ 광고 또한 방송시장에 등장할 것이다. 결국 경쟁이 과열되면서 기업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광고 영업이 나오지 않을까 매우 우려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먼저 치명타를 입게 되는 곳이 그동안 지상파 프로그램과 연계 판매 방식으로 광고 수익을 배정받아온 종교방송과 지역방송사들이다. 한 종교방송사 경영 관계자는 “우리 회사는 방송광고료가 35%, 협찬 광고료 등이 25%를 차지한다”라고 말했다. 전체 매출액의 60%를 광고와 협찬에 의존하는 상황이라는 것. 그런데 만일 연계 판매가 안 되는 상황이 온다면 방송광고료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나아가 12월에 출범하는 종편들이 기업 협찬을 끌어들이려 할 것이기 때문에 협찬 광고료도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올해 안에 미디어렙 법을 만들어 연계 판매를 강제하지 않으면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직접 광고 영업을 할 수도 없다. “직접 영업을 하는 게 만만치 않다. 광고대행사가 100개는 되는데, 그럴 인력이 없다. 협찬을 받으려면 대행사와 별개로 기업 홍보실을 다녀야 한다. 비용이 엄청나게 들게 된다.”


ⓒ뉴시스 8월25일 전국언론노조 조합원들이 국회 의원회관 앞에서 미디어렙 입법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역 민방도 타격이 예상되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9개 지역 민방의 노조 지부장들이 상경해 목동 SBS 사옥 앞에서 삭발 투쟁을 벌인 바 있다. 김대환 언론노조 지역민방노조협의회 의장(강원민방 지부장)은 “지역 민방 매출의 40%가 연계 판매다. 자체 광고 판매가 10%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SBS 측이 ‘지역 민방에 최근 3년치 평균 광고 배분율을 5년 동안 보장하겠다’고 얘기했다지만, 여기에는 ‘광고시장에 급격한 환경 변화가 없는 한’이라는 전제가 달려 있었다. 결국 연계 판매를 언제까지 할지는 SBS 뜻에 달렸다는 얘기다.


“종편 광고는 케이블TV에서 빠져나갈 것”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지역방송의 광고 수입은 자체 광고 판매, 연계 판매, 전파료 수입 등으로 구분된다. 전파료 수입은 중앙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지역사들이 릴레이 송출함으로써 시청자가 늘어나고 광고 수익도 늘어나는 대가로 프로그램 광고 수익을 배분하는 것이다. “이 전파료는 SBS 프로그램 광고료에 비례해 내려오기 때문에 SBS 계열 PP 광고가 늘고 SBS 광고가 줄어든다면 전파료까지 줄어들 수 있다. 또 전파료 배분 비율 자체도 홀딩스 렙이 줄일 수 있다. 결국 지역 민방으로서는 생존이 걸린 문제다.”

조준상 소장은 “종편을 빌미로 지상파 두 회사가 또 다른 야욕을 부리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SBS와 MBC의 경우 종편이 등장하면서 광고시장에서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이유를 대지만 그 근거도 약하다고 지적했다. 박원기 코바코 연구위원은 최근 종편 PP 및 보도 전문 PP가 시장에 진입할 때 일어날 파급 효과를 측정한 보고서를 펴냈다. 광고매체 예산을 배분하는 기업 담당자 200여 명 등을 상대로 설문을 실시하고, 이를 통해 종편 등장이 광고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추산한 결과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12~2015년 종편 PP 및 보도 전문 PP로 광고가 이동하는 비율은 케이블TV가 연평균 14.1%, 위성방송·DMB 등 기타 부문이 13.2%였다. 곧 이들 부문에서 광고비가 가장 많이 빠져나간다고 분석된 것이다. 그 다음 옥외 광고(9.1%), 인터넷(7.0%), 지상파TV(5.6%), 라디오(3.7%), 신문 광고(2.0%) 순서였다. 요컨대 매체력이 약하고 광고를 옮겼을 때 부담이 적은 ‘만만한 매체’에서 광고를 줄여 종편 쪽으로 돌릴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민주당 전병헌 의원은 ‘한나라당과 6인 소위원회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현실적으로 11월 안에 매듭을 짓지 않으면 어렵다는 판단이다. 연말 예산안을 두고 여야가 격돌할 가능성이 크고, 내년 2월에 임시국회를 연다고 하더라도 총선 직전이어서 ‘별무소용 회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총선 이후 19대 국회가 구성돼 상임위가 구성되면 바로 대선 국면으로 넘어가 미디어렙을 논의할 여유가 없기도 하다. 

현재 민주당 당론은 ‘1공영-1민영-종편 유예 불가’로, 한나라당 당론은 ‘1공영-1민영-종편 3년 유예 뒤 재검토’로 정해져 있다. 여야 모두 ‘1공영-1민영’에 동의한다. 반면 종편과 관련해서는 ‘유예 불가’와 ‘3년 유예 뒤 재검토’가 맞서며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최근 한나라당이 이전에 민주당이 비공식 제안한 ‘종편 승인일로부터 3년 유예’에 동의했다는 말도 나온다. 

거대 방송사나 종편이 직접 광고 영업을 하게 되면 그 피해는 종교 방송이나 지역방송만 입는 것이 아니다. 방송의 공공성과 다양성이 무너진 데 따른 최대 피해자는 시청자가 될 수밖에 없다. 자사 렙을 만들겠다는 거대 방송사의 웅직임에 시민사회가 극력 반발하고 나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미FTA 불복종 운동, 어떻게 벌일 것인가?


이글은 프레시안 2011-11-24일자 기사 '한미FTA 불복종 운동, 어떻게 벌일 것인가?'를 퍼왔습니다.
[한미FTA가 바꿀 농업③·끝] FTA로 끝 아니다. '자발적 민영화' 반대해야

태초에 한나라당의 날치기가 있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탄생했다. 그러나 박근혜 의원을 포함한 151명의 한나라당 의원들 중 한미 FTA 출생의 마지막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 한미 FTA는 한번 생명을 얻으면, 쉬지 않고 거듭 탄생한다.

한미 FTA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 증거는, 한나라당이 한미 FTA 날치기에 곧이어 날치기한 14개 법률 총 37개 조항이다. 이 법률들은 오로지 한미 FTA와 어긋난다는 이유로 끌려 나와 도매금으로 고쳐졌다. 그 안에는 한국의 우체국은 앞으로 새로운 보험 종류를 취급할 수 없다는 조항도 있다.(우체국 예금 보험에 관한 법률)

도대체 왜 우체국은 새로운 보험을 취급해서는 안 될까? 미국의 영리병원을 장악하고 있는 막강한 미국 민간 의료 보험의 영업을 위해서다.

위 14개 법률의 날치기는 끝이 아니다. 더 고쳐야 할 법령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약값을 올릴 독소 조항인, 의약품 시판 허가 시 특허 연계를 실제로 보장할 조항, 의료보험 약값 책정에 저항하는 미국 제약회사를 위한 약값 검토 절차 민영화 조항-이런 것들이 수없이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한미 FTA는 끝없이 탄생한다. 쌀, 쇠고기 광우병 검역 등은 아직 분만 대기실 입장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미 FTA 자체가 탐욕의 무한 팽창을 위한 재생산 장치를 가지고 있으니, '관세 철폐의 가속화'를 위한 협의 의무가 이미 규정되어 있다(2.3조).

중국 봉쇄 'TPP' 가입 강요

위대한 탄생은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미국의 탐욕은 한미 FTA에 만족하지 않는다. 중국을 봉쇄하는 환태평양 FTA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한국이 가입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한미 FTA 자체가 이미 미국의 'TPP' 전략의 디딤돌이다. 미국과 FTA를 하면서 'TPP'에 가입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국이 TPP에 가입해서 일본과 FTA를 하면 한국의 무역 흑자는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묻고 싶다. 과연 박근혜 의원과 한나라당은 미국을 추종하는 것을 넘어서는 원대한 외교 통상 전략을 가지고서 한미 FTA를 날치기한 것인가? 어제 한미 FTA 환영 성명을발표한 대기업 중에서 중국 시장을 잃고 연명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한미 FTA 불복종 운동

한미 FTA의 비극은 만족할 줄 모르고 끝없이 팽창하는 탐욕에 있다. 탐욕을 정화시켜 줄 시민 불복종 운동이 필요하다. 이른바 14개 이행법안부터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왜 한미 FTA와 어긋난다는 이유로 터무니없는 법률을 만들어야 하는가? 14개 이행법 37개 조항은 시민과 소농의 공공복리를 보호하는가?

그리고 의약품 시판 허가 시 특허 연계 보장 법률을 제정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왜 식약청이 의약품을 허가할 때, 안정성과 유효성 외에 특허까지 판단해야 하는가?

또한 미국 제약회사를 위한 약값 검토 절차 민영화 조항을 만드는 것도 거부해야 한다. 도대체 왜 건강보험료 약값 책정에서 보험공단이 배제되어야 하는가? 물건의 값을 정하는 절차에서 물건을 살 사람을 배제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는 골목 상권과 재래 시장을 획기적으로 보호하는 조례를 제정해야 한다. 학교 급식에 우리 농산물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조례를 제정해야 한다.


▲23일 저녁 서울 중구 시청광장 앞 도로에서 경찰과 대치 중이던 한미 FTA 비준동의안 강행처리에 반대하는 집회 참여자들이 경찰이 쏜 물포를 맞으며 반대 의사를 나타내고 있다. ⓒ뉴시스

자발적 민영화 방침을 저지하는 운동

무엇보다도 전기, 수도, 가스, 의료보험, 우체국, 공항 민영화를 저지해야 한다. 자발적 민영화는 한미 FTA의 치명적 독을 몸속 구석구석으로 퍼지게 하는 모세혈관이다. 외국 자본이 공공부분을 장악하는 것이 민영화다. 한미 FTA는 한국 정부가 외국 자본과 체결한 민영화 계약을 어겼다는 이유로도 투자자 국제 중재(ISD)에 회부되도록 했다. 자발적 민영화 방침을 저지하는 운동은 한미 FTA의 탐욕을 줄이는 데에 효과적인 운동이다.

한미 FTA 시민 감시 운동

그리고 시민과 소농은 한미 FTA 자체를 감시해야 한다. 당장 한미 FTA 발효 과정부터 감시해야 한다. '이행법'이라는 명목으로 14개 법률 37개 조항을 날치기한 한국이다. 그런 한국은 과연 미국에 미국 법률의 개정을 요구하고 있는가? 한국 정부는 한미 FTA와 어긋나는 미국 법령을 파악하고 있는가?

시민과 소농은 감시해야 한다. 누가 투자자 국가 중재권(ISD)으로 한국의 공공정책에 도전하고 있는가? 그리고 끊임없이 한미 FTA관련 정보공개를 요구해야 한다. 한미 FTA의 최고 집행기관인 '공동위원회'의 회의록을 공개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한미 FTA는 폐기되거나 약한 것으로 재구성될 것

나는 결국 한미 FTA는 폐기되거나 약한 수준으로 재구성될 것으로 생각한다. 지칠 줄 모르는 탐욕의 끝은 사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민과 대중의 끊임없는 참여와 각성의 성취물일 것이다. 총선과 대선 '한방'으로 한미 FTA가 폐기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농어촌 특별세와 지역 식품체계

원래 3회차인 이 글은 우리 농업의 대안을 토론하는 글이 되어야 했다. 한미 FTA 날치기 때문에 간략한 내용으로 대신한다. 매년 4조 원이 넘는 농어촌 특별세를 포함해서, 국민의 막대한 세금으로 소농을 탈락시키고 대농을 집중 지원하는 '농업 경쟁력' 이데올로기는 지난 20년 간 실패했다. 아무리 한국 대농의 경작 면적을 늘려 주더라도 미국과 호주의 대농과 규모에서 경쟁할 수 없다. 그리고 농산물 가격이 내려가는 한, 대농조차 농사를 지어 가계를 유지할 수 없는 빈곤층으로 전락한다.

4조 원인 넘는 농어촌 특별세를 대농 집중 지원이 아니라, 지역 농업을 지탱하는 '식품체계'를 위해 써야 한다. 식품체계란 소농이 소농으로 고립 단절되지 않고 시민과 지역사회와 연계되는 틀이다. 지금 농촌에서 가장 긴요한 것이다.

지역의 교육기관 그리고 복지 시설의 급식에서 지역 농산물을 사용하는 시스템이 자리 잡아야 한다. 서울과 대도시 학교 급식도 연계 지역의 농산물을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소농과 연계된 식품체계의 싹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지역의 소농 역량이 해체되지 않는 수준이 되도록 기초 농산물 가격을 보장해야 한다. 소농 지역 사회가 해제되면 WTO가 인정하는 식량 안보는 불가능하다. 모순된 WTO 규정을 변경해야 한다.

소농이 어떤 방식으로 협동체를 결성하여 활동할 것인가를 소농들이 완전히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농업 협동체의 활동은 독점 행위로 보지 않는다는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

소농들이 살아남아 지역사회의 주인이 되어야만, 지역의 농지와 물과 같은 지역 자원을 돌보고 통제할 수 있다. 농지를 모텔이나 아파트에 뺏기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아이들의 아이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송기호 변호사 

민주당, '손님 실수' 기다렸니 혹은 유발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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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진정한 고수

진정한 고수(高手)

1986년 이 '탐험 대결'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유아독존으로 군림하던 조훈현 9단에게 저단진 유망주들을 도전시킨 기획이 있었다. 이때 유창혁 당시 3단이 참신한 기풍으로 주목을 끌었다. 엄살솜씨로 유명한 조 9단이 유 3단에게 연패한 뒤, 당시 내제자로 데리고 있던 이창호 소년에게 "창호야, 네가 빨리 커서 형아들 혼내줘라." 해서 팬들을 웃겼다.

그 해 입단한 이창호가 2, 3년 지나면서 진짜로 형아들 혼내주기 시작한 것도 팬들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는데, 더더욱 뜻밖의 일은 이 소년이 형아들보다 스승님 혼내드리는 데 더 열중하게 된 것이다. 몇 차례나 천하통일을 이뤘던 '바둑 황제'가 근년 무관의 지경에까지 떨어졌던 것은 순전히 이 제자 때문이었다. 열세 차례의 타이틀전을 같은 상대에게 내리 진 것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기록이다.

치열한 승부 세계에서 자신의 덜미를 꽉 틀어쥐고 있는 옛 제자에 대한 조 9단의 감정은 어떤 것일까. 한 번 조 씨가 바둑 평론가 박치문 씨와 나누는 한담에서 그 마음의 한 모퉁이를 살필 만한 대목이 있었다. 유창혁 9단과 이창호 9단의 왕위전 도전기에 조 씨가 입회한 뒤, 깊은 밤 제주의 한 호텔 로비라운지에서였다.

기풍(棋風)에 관한 얘기 끝에 근래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 기사들에 대해 조 씨가 걱정스러운 말을 했다. 승부에만 너무 집착해서 새로운 길을 만들려 하지 않고 남이 만든 길만 달달 외우는 식의 바둑이 많다고. 그렇게 '손님 실수 기다리는' 식으로는 어느 단계를 넘어서서 발전할 수가 없다고.

박 씨가 짓궂게 공박했다. 그렇게 승부에 철저한 자세는 바로 당신 제자 창호를 본받은 것 아니냐고. 그런데 이에 대한 조 9단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그래도 창호는 모양을 알아." 말투마저 평소의 넘치는 재기가 싹 가신 어눌한 한 마디여서 듣는 사람의 마음이 숙연했다.

조 씨는 옛 제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자신이 몸담은 바둑이 더 좋은 모습으로 펼쳐지는 길이라면 패배의 고통도 추락의 수모도 얼마든지 감수하려는 승부사의 자세다. '고수(高手)'의 진면목은 뛰어난 전적보다도 사람들의 더 깊은 사랑을 바둑으로 끌어들인 이런 자세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손님 실수 기다리며' 승부에만 집착하는 정치계에서도 배워갔으면 좋겠다.


▲ 2010년 12월 18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실 앞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상정에 반대하는 강기정, 백원우 의원 등 민주당 의원이 출입을 저지당하자 몸싸움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는 프로 기사들과 어울리는 일이 별로 없다. 바둑 관계 글도 잘 안 쓴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제주도에서 살 때 그곳에서 큰 대국이 있으면 에서 곧잘 관전기를 맡기곤 했다. 비행기 표를 절약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덕분에 이 글 쓸 때처럼 흥미로운 관찰을 할 기회가 더러 있었다.

기사들과 많이 어울리는 바둑 친구들에게 듣기로 조훈현은 기사들 사이에 '장아찌'로 통했다고 한다. 상금을 타면 동료 기사들에게 한 턱 쓰는 풍속이 있는데, 조훈현은 국물도 없다는 것이었다.

요즘은 착실한 분위기 속에 바둑을 공부하며 자라난 젊은 기사들이 바둑계를 이끌고 있지만, 예전에는 기사 되겠다는 생각 없이 재미로 두며 지내다 보니 더 잘 두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비로소 기사의 길을 생각하게 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세대 기사라면 노는 데 일가견을 가진 게 보통이고, 바둑계는 '한량' 정신이 넘치는 동네였다.

그런 동네에서 조훈현은 상금을 '노동의 대가'로 여기고 고스란히 아내에게 가져갔단다.대회 하나 끝나면 우승자를 물주로 잔치 한 차례씩 하던 풍속이 무색하게 됐다. 대회 때마다 그가 우승하지 않기를 바라는 팬이 많았던 것은 같은 결과가 너무 많이 나오는 데 싫증이 나서였지만, 동료 기사들이 그런 마음을 품은 데는 '맛있는 한 잔'에 대한 갈망도 있었다. 그런데도 우승하는 일이 하지 않는 일보다 더 많았으니 그는 '바둑 황제' 이전에 당시 바둑계의 '공적 제1호'였다.

그런데 나는 위 글을 쓰면서 바둑계에 대한 조훈현의 공헌이 많이 이긴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임으로서도 사업으로서도 바둑의 위상이 많이 향상되었는데, 거기에 그의 큰 공헌이 있었던 것이다.

바둑계에는 언제나 유망주들이 있었다. 그런데 1997년 당시 이창호 이후의 유망주들이 '자기 바둑'을 의욕적으로 키워나가기보다 '지지 않는' 바둑에 매달리는 것으로 조훈현에게는 보였던 것 같다. 아마 조훈현과 이창호의 너무 높은 벽 때문에 위축된 자세가 많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 한가할 때 바둑 TV를 돌려 보면 정말 재미있다. '자기 바둑'을 보여주는 기사가 많다. 10여 년 전 강자들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 "손님 실수" 기다리는 기풍은 성적도 A급에 오르기 힘든 모양이다. 전에는 일본이 바둑계의 고지(高地)였는데 이제 한국 바둑계가 굽어보고 있다. 한국이 높아졌다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일 뿐 아니라 세계 바둑의 발전을 앞장서 이끌어왔다는 사실이 장하다.

바로 이 변화를 조훈현이 간절히 염원하고 그를 위해 열심히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창호는 모양을 알아." 했을 때 그가 말한 "모양"이 무슨 뜻일까? 손님 실수 기다리며 승부에 집착하는 바둑보다 기사 각자의 개성이 펼쳐지는 바둑을 그는 원했다. 그때보다 지금 바둑이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된 데는 그의 염원과 실천이 큰 몫을 했다. 그는 '고수'로서의 역할을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역할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위 글 끝에서 나는 승리에만 집착하는 정치계에서도 조훈현의 '고수 정신'을 배우기 바란다고 했다. 제1야당의 행태를 꼬집은 말이다. 1960년의 "못 살겠다, 갈아보자!" 이래(더 전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때부터다) 한국 제1야당은 "손님 실수" 기다리는 것을 최대의 전략으로 삼아 왔다. 너무 강고한 독재 권력의 높은 벽 앞에 위축된 자세라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계에서도 강고한 높은 벽은 무너져 왔다. 이명박 정부 핵심부는 예전과 같은 강고한 높은 벽의 환상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행태가 어떤 웃음을 사고 있는지 돌아볼 여유도 없다. 하는 짓 하나 하나를 제 무덤 파는 삽질로 보는 눈길이 그들에게 꽂혀 있다.

나는 안철수를 언론 보도를 통해서 외에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박원순이 '자기 바둑'을 통해 '모양'을 키워온 과정은 좀 안다. 그는 1990년대에도 2000년대에도 승리에 집착하지 않고 자기 길을 닦아 왔다. 자기가 규정하는 내용의 성공을 향해. 시장 취임 자체는 그의 성공이 아니다. 그의 성공을 많은 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줄 기회일 뿐이다.

안철수도 같은 틀로 이해한다. 그는 누구와의 승부에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일의 성공만을 위해 일해 온 사람 같다. 자기 스스로 규정한 의미의 성공을 위해. 그에게는 한나라당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냥 지내다 보니 "아니, 저 사람들 왜 저래? 저러면 안 되잖아?"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1987년 이래 박원순, 안철수 같은 자세로 살아온 사람들이 이 사회에 많이 있다. 그들이 설령 두 사람과 같은 성공을 눈에 띄게 거두지 못했더라도 두 사람의 자세에 공감은 느낀다. 남과의 승부보다 내 인생의 의미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세에. '지지 않는' 바둑보다 '자기 바둑'을 키우는 자세에.

안철수와 박원순으로 인해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크게 늘어났다. 손님 실수 기다리는 소극적 승부 대신 자기 뜻을 펼치는 적극적 도전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강고한 높은 벽은 이제 의미를 잃었다. 경찰과 검찰에 대한 통제력으로도, 국회의 유리한 쪽수로도, 새로운 재미를 정치에서 찾는 시민들의 관심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서울시장 선거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경기장 안에 있는 상대방에게 승리를 거두는 데 모든 것을 거는 선수들이 있다. 관중이 얼마나 들어와 있는지, 들어와 있는 관중마저 자기네의 더티 플레이에 어떤 환멸을 느낄지 생각할 줄 모르는 선수들이다. 관중의 반응에 큰 의미가 없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4·19가 일어났지만 5·16 앞에 어떤 저항이 있었는가? 1980년 서울의 봄이 쿠데타 세력 앞에 무슨 힘을 썼는가? 1987년 6월 항쟁이 대한민국의 특권 구조에 조그만 변화라도 가져왔는가? 과거의 기억 위에서 그들은 생각한다. 승리가 바로 성공이라고.

그래서 그들은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그들'은 한나라당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크고 작은 모든 의회 세력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민주당. 비준안 통과를 '손님 실수'라고 반기는 자들. 이 통과를 갖고 국민들에게 떠들겠지. 저따위 짓이 국회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한나라당을 쫓아내고 자기네를 넣어달라고. 수십 년간 대한민국 제1야당이 해온 짓이다. '손님 실수'를 기다린 정도가 아니라 유발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그래서 떠도는 것이다.

의석수가 모자라서 한나라당의 만행을 못 막았다고 징징대겠지. 그러니까 다수당 만들어 달라고 조르겠지. 하지만 저렇게 허술하게 통과시키는 꼴을 안 볼 만큼은 국회에 넣어주지 않았는가. 그런 허수아비를 쪽수만 늘린다고 달라질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정치에 변화가 와야 한다. 그 변화를 가져올 능력이 없다고 한나라당 구성원 거의 전원이 이번에 고백했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국민의 여망을 짊어져야 할 텐데, 그런 자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손님 실수' 바라는 전략 외에 아무것도 보여준 것이 없다. 바둑계에 '새 바둑'이 주류를 바꾼 것처럼 정치계에도 '새 정치'가 주류로 들어서야 할 텐데, 민주당이 따라올 능력이 있을지 의심스럽다.



/김기협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