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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25일 일요일

한국이 사는 길…'원전 수출' 아닌 '폐로 사업'!


이글은 프레시안 2012-03-23일자 기사 '한국이 사는 길…'원전 수출' 아닌 '폐로 사업'!'을 퍼왔습니다.
[후쿠시마 1년, 핵 없는 세상을 꿈꾼다·③] 장정욱 마쓰야마 대학교 교수

, , 평화네트워크는 지난 6일부터 '후쿠시마 1년, 핵 없는 세상을 꿈꾼다' 연속 강연을 진행 중이다. 6일 김종철  발행인, 13일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에 이어 20일에는 서울 중구 장충동  강의실에서 장정욱 일본 마쓰야마 대학 교수의 강연이 열렸다.

장정욱 교수는 '후쿠시마, 겨우 최악의 사태를 막았을 뿐'이란 주제로 사고 1년이 지난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의 현 상태와 그 영향을 점검하는 한편, 핵 안보 정상 회의 개최로 들떠 있는 한국의 안전 불감증에 경고를 던졌다.

장정욱 교수는 일본이 언제든 쓰나미가 발생할 수 있는 지형적 특성을 무시하고 '경제적 이유'로 미국 방식을 도입해, 후쿠시마 핵발전소를 애초에 위험한 곳에 세우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또 이미 과거에 도호쿠 지방에서 일어났던 지진의 시뮬레이션을 토대로, 거대 쓰나미로 인한 핵발전소 침수가 일어날 수 있다는 조사 결과를 2008년에 갖고 있었음에도 적극적인 대처는커녕 보고조차 제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따라서 도쿄전력이 주장하듯 '천재지변'에 의한 사고가 아니라, 인재에 가까운 사고였다는 것이다.

장정욱 교수는 사고 1년이 지난 현재 핵발전소 사고의 직접적인 피해로 사망한 사람은 많지 않지만, 참극은 두고두고 지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비단 공기 중으로, 해수 속으로 유입된 거대한 양의 방사능 물질 때문만이 아니다. 피난과 귀향의 불가능함으로 인해 수십 만 명 이상의 삶이 파괴되었고, 배상과 복구 비용 또한 막대해 전 국민이 부담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장정욱 교수는 방사성 물질이 넘나드는 것은 물론이요 국내에서도 비슷한 사고 위험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핵 안보 정상 회의'와 '핵발전소 수출'에 환호하는 한국에 대해서도 고언을 던졌다. 핵발전소 수출이 아니라 '폐로 사업'에 주력하는 것이 한국이 살 길이라고 그는 말한다.

다음은 강연의 주요 내용.



▲ 장정욱 마쓰야마 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온도를 내릴 수 없었던 후쿠시마 핵발전소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왜 일어났는지부터 다시 복기해 보겠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호쿠 지방에 규모 9.0의 지진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쓰나미가 왔다.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사고의 경우 두 번째 쓰나미가 문제가 되어 일어났다. 이날 15시 35분에 높이 13.1미터의 두 번째 쓰나미가 왔는데, 이 높이는 어디까지나 도쿄전력의 추정치이다. 핵발전소가 세워져 있는 지면은 해수면에서 10미터 높았고, 따라서 그것보다 파도가 더 높았기에 물이 들어왔다. 이로 인해 ①냉각용의 바닷물을 퍼 올리는 취수 펌프, ②전원을 공급할 터빈 건물 지하에 있던 비상용 디젤 발전기와 배전판 등이 바닷물에 잠겨 누전되어 작동 불능이 되었다.

자주 하는 표현이지만 핵발전소는 '바닷물을 데우는 기계'다. 핵분열로 발생하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1초당 70톤의 냉각수가 필요한데, 그만큼을 데워서 다시 바다로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원자로에서 나오는 뜨거운 증기를 냉각시킬 때도, 사용 후 핵연료가 담긴 수조를 냉각시키는 데도 해수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해수를 뽑아내는 펌프가 침수되어 기능을 상실했던 것이다. 또 터빈 건물 지하실이 침수되었다. 이러면 물이 들어와도 바깥으로 내보낼 수 있는 동력 자체가 없어진다. 또 내·외부에서 들어온 전선을 배전시키는 배전판도 다 꺼졌다. 이 중 하나라도 차단되면 안 되는데 이번 사고에선 세 개가 다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의 원자로 6기엔 가동 중의 핵분열을 이용한 전기(교류)인 내부 전원 외에 비상시의 전원 확보를 위해 ①13대의 비상용 디젤발전기(교류), ②이동식 전원차(직류) ③용량 8시간의 배터리(직류), ④다른 지역의 발전소로 전원을 공급받는 외부 전원(교류)가 준비되어 있었다. 일단 사고로 내부 전원을 잃었고, ④의 경우 지진의 영향으로 송전탑과 변전소가 파손되어 즉시 사용할 수 없었다.

①의 경우 조금 높은 위치에 있었던 6호기의 공냉식 비상용 디젤 발전기 한 대만이 정상으로 가동하여 5, 6호기는 간신히 전원 상실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동식 전원차(②)의 경우 사고 직후 인근의 그것들을 끌어 모았지만, 지진에 의한 도로 파손 등으로 11일 늦은 밤에야 후쿠시마 핵발전소에 도착했다. 최종적으로 69대가 모였지만, 전원 접속 장치의 규격이 맞지 않아 전선을 벗겨 직접 연결했음에도 전원판 침수, 전선 길이 부족 등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배터리(③)는 냉각재를 공급할 정도의 용량이 없다. 단지 냉각용 배관의 밸브 개폐와 중앙 제어실의 조명 같은 데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이로써 냉각에 필요한 최소한의 전원조차도 없어진 원자로 1~4호기는 그 연료가 융용에 이르게 된 것이다.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는 바닷가에 터빈 건물을, 내륙 쪽에 원자로 건물을 배치하는 구조이다. 이는 미국에서 핵발전소를 처음 개발할 때 만들어진 미국식 구조다. 미국 핵발전소는 지진이 거의 없는 지역, 쓰나미의 침수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지역에 입지하고 있다. 그런데 후쿠시마는 어떠한가? 이는 도쿄전력이 초기에 핵발전소를 수입할 때, 일본 특유의 지형적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미국 방식을 답습한 결과이다. 일본이 쓰나미를 고려했다면 핵발전소를 좀 더 내륙 쪽에 세우거나 방수성을 높였을 것이다. 게다가 당초 해면 30미터 높이의 지면을 20미터나 깎아 10미터 높이의 위치에 핵발전소를건설했다. 이유는 해수 펌프가 기능하는 거리를 짧게 하고 핵연료가 드나드는 항만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즉, 경제성을 위해서다. 한국도 마찬가지 이유로 미국 방식을 도입했다. 한국에는 지진 가능성이 없다고 하지만, 그건 아무도 보장하지 못한다.

사고는 인재였나


ⓒ프레시안(최형락)
도쿄전력은 이번 사고 원인에 대해 예상(5.7미터)보다 높은 쓰나미라는 불가항력적인 자연 재해가 원인인 '천재'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비판자들은 '인재'였다고 반박하고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도쿄전력이 이미 몇 년 전에 높은 쓰나미가 올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대책 비용의 절약을 위해 고의적으로 무시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도쿄 전력이 이미 예상 높이 5.7미터를 넘는 거대 쓰나미가 후쿠시마 핵발전소 지역에 올 수 있다는 시뮬레이션 계산 결과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먼저 2006년에는 5.7미터 이상의 쓰나미가 올 확률이 50년 안에 약 10퍼센트이며, 노심 융용을 일으킬 수 있는 10미터 이상의 쓰나미가 올 확률은 1퍼센트라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왔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 원칙이 '10만 년에 1회 가능성'임을 고려했을 때, 이는 엄청난 차이다.

한편, 도쿄 전력은 2008년 ①1896년에 발생한 산리쿠(三陸) 지진(M8.3 규모), ②869년 발생한 죠칸(貞觀) 지진(M8.4 규모)과 같은 규모의 지진이 발생할 경우의 쓰나미 높이를 예상하는 계산을 해 보았는데, 결과는 놀라웠다. ①의 경우 후쿠시마 핵발전소 지역에 최대 15.7미터 높이의 쓰나미가 올 수 있으며 ②의 경우 최대 9.2미터의 쓰나미가 올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도쿄전력은 이를 정부의 원자력안전·보안원에 보고하긴 했지만, 낮은 수치의 결과는 2009년 9월에 보고한 반면 높은 수치의 결과는 핵발전소 사고 발생 불과 4일 전인 2011년 3월 7일에 보고했다. 2008년부터 이 결과를 존중해 즉시 추가 대책이 실시되었다면 지금과 같았을까? 작년 10월에야 공개된 도쿄전력의 계산 결과 자료에는, 2012년 10월까지 대책을 '검토'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을 뿐이다.

또 하나의 쟁점이 있다. 이 사고가 정말 '쓰나미' 때문이었냐는 것을 둘러싸고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격납 용기의 설계에 관여했던 다나카 마쓰히코 씨는, 가동 41년째의 노후 핵발전소 1호기의 경우 쓰나미가 오기 전에 이미 원자로계의 배관이 파손되어 냉각재의 대량 상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원자로 밑 부분에 붙어 있는 50톤 무게의 재순환 배관이 지진을 만나 깨어졌으며, 그로 인해 뜨거운 증기가 대량 유출되었고 압력도 올라갔다고 말한다. 실제로 쓰나미가 오기 전에 1호기의 압력이 올라갔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도쿄전력은 아직도 이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따라서 누구 말이 맞는지는 오리무중이다.

수상이 말한 '냉온 정지 상태'는 없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현재 상태를 점검해 보자. 지난해 12월 16일 노다 요시히코 일본 수상은 사고 핵발전소 3기 원자로의 밑부분 온도가 섭씨 100도 이하로 내려갔고 방사성 물질 배출량이 감소되었다며 핵발전소가 "냉온 정지 상태에 도달했다"고 대내외적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이는 원래 없는 개념으로, 정치적 판단에 의해 급조된 것이다. 원자력 전문 용어로서 "정상 상태의 핵발전소 원자로의 내부 온도가 섭씨 100도 이하로 낮아진 상태"를 이르는 '냉온 정지'란 말이 있긴 하지만, 원자로 및 격납 용기에서 냉각수가 줄줄 새고 있는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중환자에 대한 수술을 하기도 전에 간단한 응급 조치로 완치되었다는 식으로, 실태를 의도적으로 축소시킨 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발표 이후 도쿄 전력이 사고의 수습에 관한 중장기 대책을 발표했다. 내용은 ①2013년까지 1~4호기 수조 내의 사용 후 핵연료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 ②핵발전소 건물 내의 제염(오염 지역의 제거) 작업을 하고 파손 부분을 수리하며 오염수를 처리하고, 격납 용기 전체를 물로 채워 냉각하는 것, ③2036년까지 격납 용기 및 원자로의 녹은 핵연료를 추출하는 것, ④2051년까지 핵발전소를 완전 해체하는 것이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보아도 완전 수습까지 최소 40년 이상이 걸린다. 또한 이는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단순히 나열한 것으로, 수습 계획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노력 목표에 가깝다. 현재 녹은 핵연료의 무게, 형태 및 위치도 알 수 없는 상태다. 게다가 원자로 및 격납 용기도 크게 파손되어 있다. 일단은 약 35미터 위의 격납 용기의 윗부분에서 크레인을 이용해 그 속에 떨어져 있는 최소 100톤 이상의 녹은 핵연료를 끄집어 낼 계획이지만, 경제적·기술적으로 이 작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체르노빌 핵발전소처럼 시멘트로 핵발전소 건물 전체를 덮는 석관(石棺) 방식이 등장할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다.

피해 원자로에서는 사고 직후만큼 엄청난 양은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히 방사능 물질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물론 2012년 3월 6일 현재 방사능 물질의 시간당 대기 방출량은 1000만 베크렐로, 1년 전인 2011년 3월 15일의 약 8000만분의 1로 감소한 수치다. 1호기의 파괴된 건물 외벽을 완전히 덮는 차폐 시설을 설치했고, 2호기엔 필터가 있는 환기장치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현재 방사능 물질의 배출은 거의 3호기가 그 원인이다.

또한 해양으로의 오염수 유출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 도쿄 전력은 핵발전소 건물 밑에 고여 있는 고준위 방사성 오염수를 정화하여 약 4킬로미터의 배관을 통해 원자로에 냉각수를 공급하고 있다. 2011년 4월의 계획으로는 그해 말까지 핵발전소 건물 밑에 있는 것을 포함한 25만 톤의 고준위 방사성 오염수의 대부분을 처리할 생각이었지만, 고준위 방사성 오염수는 오히려 늘고 있는 실정이다. 지하의 콘크리트에 금이 나서 현재도 오염수가 흘러나가고 있는데, 사람 접근이 불가능하니 어디로, 어느 정도로 나가는지 알 수도 없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건물 지하로 매일 200~500톤의 지하수가 유입된다는 것이다. 지하수가 격납 용기로부터 새어나오는 원자로의 냉각수와 섞여 고준위 방사성 오염수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유입되는 지하수의 양만큼 처리해야 할 고준위 방사성 오염수도 늘고 있는 셈이 된다. 원자로의 온도를 낮추기 위해 냉각수의 주입량을 늘리면 새어나오는 고준위 방사성 오염수가 증가하고, 건물 지하의 방사성 오염수를 많이 처리하면 수위 변화로 지하수의 유입이 늘어나는 진퇴양난의 상태다. 지하수를 어떻게 막겠는가. 격납 용기를 완전히 막지 않는 이상 같은 일이 반복될 거다. 이건 체르노빌하고 비교가 안 되는 사태다.

한편, 정화 과정을 거친 후에 늘어나는 저준위 방사성 오염수의 저장 문제도 있다. 현재 고준위 오염수에서 기름과 세슘, 염분을 제거하여 저준위 오염수로 만들고, 이것을 다시 원자로에 투입하고 남는 것을 탱크에 저장하는 방식을 쓰고 있는데, 저장할 공간이 부족한 것이다. 3월 6일 기준으로 저장 용량의 72퍼센트에 달하는 약 12만 톤이 차 있으니 오래 못 가 가득 찰 것이고, 따라서 탱크의 증설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오염수를 정화할 때 쓰는 특수 약품, 필터, 폐기물은 또 어떻게 버릴 것인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타개하려면 오염수의 증가 자체를 막아야 하는데, 격납 용기의 파손 부분을 수리하여 한정된 수량에 의한 순환 냉각 시스템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오염의 완전한 제거, 불가능하다

이제 핵발전소 부지 바깥의 상황, 피해 지역으로 눈을 돌려 보자. 일본 정부는 지난해 9월 말 핵발전소으로부터 반경 2~30킬로미터 내의 일부 구역(긴급시 피난 준비 구역)의 해제를 발표했다. 그리고 오는 4월에 시작될 본격적인 제염 작업을 앞두고 기준을 '피폭선량'으로 하여 오염 구역을 재편할 방침이다. 구역은 ①피난 지시 해제 준비 구역(연간 피폭선량 20밀리시버트 이하), ②거주 제한 구역(21~50밀리시버트), ③귀환 곤란 구역(50밀리시버트 이상, 최소 5년 이상)으로 나뉜다.

'귀환 곤란 지역'이 아니라고 해도, 사실상 그 지역의 삶은 제대로 이어질 수 없다. 지난 1월 31일 가와우치무라(川内村)가 해제된 '긴급시 피난 준비 구역'만을 대상으로 자발적 귀촌 선언을 발표했는데, 돌아온 주민은 원래의 1할에도 못 미쳤다. 인근의 히로노쵸(広野町)는 3월 1일에 군청 사무실만 원래의 건물로 복귀했다. 앞으로 지방자치단체가 점차 귀환 선언을 하겠지만 인프라나 관공서, 병원이나 학교 등의 생활 환경이 복구되지 않는 한, 공동체가 유지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본격적인 제염 실시를 앞두고 문부과학성이 방사성 세슘(134와 137)을 조사했는데, 이에 따르면 제염 대상 지역은 1만 1600평방킬로미터로 일본 국토의 3퍼센트에 달한다. 한국 경기도와 서울시를 합친 것보다 넓은 면적이다. 여기에 포함되는 총 115개 시군읍이 제염 대상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농업 및 관광업 등의 지역 산업에의 악영향을 회피할 목적으로 지역 지정을 거부한 지방자치단체들도 있다.

제염에는 한계가 있다. 일본 정부가 작년 11월부터 피난 구역 내에서 시험적으로 실시한 제염 작업의 결과를 보면, 토양 및 낙엽 제거에서는 일정 정도 감소 효과가 나타났으나,아스팔트 도로 및 일반 주택의 지붕에서 실시한 고압수 세척의 제염 작업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또 피폭선량이 높은 귀환 곤란 구역에서는 제염 작업원들의 피폭 문제도 우려되고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우선 50밀리시버트 이하의 두 구역을 2년간에 걸쳐 선량의 50퍼센트 정도로 감소시키는 목표를 정하고 있으나, 실질적인 제염 작업의 효과는 10퍼센트 정도로 나머지 40퍼센트는 자연적인 분산에 기대할 뿐이다.

또 산림 지역의 제염은 거의 불가능하며, 따라서 포기 상태다. 강이나 바다, 갯벌이나 해저도 마찬가지다. 바다의 경우 한국 쪽에도 1년 후에는 오염된 물이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오염된 수산물의 먹이사슬을 통한 내부 피폭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는데, 해저 토양 방사능은 법적인 규제치조차 없는 상황이다. 체르노빌의 경우 먹이사슬 피폭의 피크는 사고 2년 뒤였다고 한다. 여러분도 앞으로 생선을 조심하고, 먹을 때는 꼭 뼈를 확실히 발라 먹는 게 좋겠다.

피해 배상은 가능한가?

핵발전소 사고로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 대한 보상 측면을 살펴보자. 도쿄 전력은 일단 지난해 4월 말에 일본 정부의 지시에 따라 반경 2~30킬로미터 내 지역 주민에 한해, 세대 당 100만 엔의 임시 배상금을 일률적으로 지급했다. 이후 8월부터 원자력 손해 배상지원 기구를 설치·운영하고 있으며, 분쟁 심사회를 설립해 거기서 중간 지침을 만들어 본격적인 배상을 시작했다. 당사자 간에 배상 문제의 대립이 있을 경우 변호사 150여 명으로 구성된 분쟁 센터가 화해를 조정한다. 그래도 안 될 땐 소송 방법이 있다. 그러나 피난민이 총 16만 명에나 이름에도, 2012년 3월 2일 현재까지 배상 신청은 1181건뿐이며 화해가 성립된 경우는 16건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 정부의 피난 지시 지역에서는 일시불·일률적으로 배상금을 지급하고 있지만, 임산부와 18세 이하의 어린이·청소년에 대해선 특별히 위자료를 더 지급해야 한다는 반발이 있다. 도쿄전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주민들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줄어들 거라고 주장하지만, 주민들은 반대로 늘어날 거라고 주장한다. 한편, 지난 12월 초 분쟁 심의회가 배상 지침을 확대하면서, 후쿠시마 현내 23 시군읍의 정부가 피난을 지시하지 않았으나 자주적으로 피난한 주민들에 대해서도 배상을 적용함에 따라, 대상자가 종래 15만 명에서 150만 명으로 대폭 늘었다.

게다가 간접적인 피해가 전국적으로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배상 지역이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가령 교토 지역에 해외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든지,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나라의 물건이란 이유만으로 특정 품목의 해외 수출이 금지된다든지 하는 '소문'에 의한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 또 앞으로 해양 오염수 때문에 중국이나 한국으로부터 제소가 생길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다.

대체 돈이 얼마나 들까. 일단 실질 피해 주민 보상만 봤을 때 정부는 2013년 3월까지 2년간 4.5조 엔(약 60조 원)의 보상액이 들 것으로 추산한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도쿄 전력에 지원한 금액이 약 1.6조 엔이다. 그리고 도쿄전력이 3월 19일 기준으로 실제 지불한 금액이 여기의 4분의 1인 4500억 엔 정도다.

그런데 이뿐만 아니라 제염 작업 비용과 폐로 비용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큰 문제가 제염 비용이다. 대체 어디까지 제염할 건가가 문제다. 일부 학자들은 포기할 지역을 확실히 포기해 쓸데없는 돈을 계속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농업이 중심인 지역의 경우, 2~3년만 방치해도 회복에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제염 비용을 약 60조 엔으로 보고 있는데 여기엔 산림 지역의 제염이나 처분장 건설 비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런 것까지 포함시키면 제염 작업만으로 100조 엔을 넘을 수도 있다. 이 비용은 사고 이전 일본 정부의 1년 예산에 버금간다. 그러나 배상 책임자인 도쿄전력은, 사고 수습비와 핵발전소 가동 중지에 따른 연료비 조달만으로 실질적 파산 상태다.

배상의 어려움은 이 엄청난 금액 규모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핵발전소 사고로 인한 건강의 변화, 생명에 미치는 영향을 알기 어렵다. 보통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직접 피해에 의한 사망자는 그리 많지 않아서 그 부분은 괜찮다는 식으로 얘기된다. 실제로 사망한 사람은 쓰나미가 오기 전, 점검 차 지하에 들어갔다가 사망한 핵발전소 종업원 2명과 사고 후 수습 작업 중 과로사로 인정받은 종업원 1명 등 3명이 전부다.

그러나 사고 당시 피난 과정에서 중환자 14명이 사망했고, 유기농 농민과 무덤으로 피난 간다며 자살한 93세의 노인 등 4명이 자살했다. 또한 핵발전소 30킬로미터 내 13개소의 양로 시설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조사에 따르면 이들 중 사망자는 2009년 89명, 2010년 107명에서 2011년엔 206명으로, 2배나 크게 늘었다. 사망 원인이 뭔가. 환경이 바뀐 데 대한 정신적 쇼크와 스트레스다. 사고 이후 이 환경 변화나 정신적 스트레스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가 후쿠시마에서 621명이다. 이는 쓰나미 피해가 가장 컸던 미야기 현의 환경 변화로 인한 사망자 554명보다 많은 숫자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이후의 상황을 감안하면, 앞으로 후쿠시마 사고 피해에 의한 사망자는 고령자를 중심으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당장 앞으로 4~5년 후부터 어린이의 갑상선암이 나타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일본 핵발전소, 이제 어디로 가나

사고 이후 일본 핵발전소는 어떻게 되었나. 일본 전체 핵발전소 54기 가운데 현재 도쿄전력의 가시와자키 핵발전소 6호기, 홋카이도 전력의 도마루 3호기 등 2기만 가동하고 있다. 지난해 7월 6일 간 나오토 당시 수상은 핵발전소 재가동의 전제 조건으로 모든 핵발전소에 대한 '스트레스 테스트(Stress Test)' 제도를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핵발전소가 지진, 쓰나미, 홍수 등과 같은 재해, 그리고 테러 및 항공기의 충돌 등의 사고에 직면했을 때, 이번 사고와 같은 일이 발생할 때까지 핵발전소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지를 체크하는 안전 여유도 검사다. 3월 초 현재 이 테스트에서 일단 1차만 통과한 것이 후쿠이 현의 오오이 핵발전소 3, 4호기와 시코쿠의 이카타 핵발전소 3호기이다. 일본 정부는 오는 여름의 전력 부족을 들먹이면서 오오이 핵발전소의 재가동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이 워낙 반대하고 있어 불투명하다.

또 일본 정부는 원자력안전위원회를 별도의 청, '원자력규제청'으로 독립시켰다. 다만 일본의 야당, 주로 자민당은 이를 행정부에서 완전 독립된 제3자 위원회로 구성해야 한다고 반발하며 법을 통과시키지 않고 있다. 이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로 신뢰를 잃은 규제 기관의 재편을 통해 핵발전소의 안전성을 높이려는 정치적인 판단의 결과이지만, 우려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원자력규제청에 필요한 500여 명의 직원이 대부분 원자력안전·보안원에서 그대로 평행 이동할 것이며, 일부의 간부 이외는 여전히 경제산업성 및 문부과학성과의 인사 교류가 허용될 방침이다. 형식적인 조직 개편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핵발전소 사고에 대비해 주민들이 행정 기관과 함께 일종의 훈련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방재 구역을 확대할 방침이다. 현행의 원자력 방재 구역은 핵발전소 반경 8~10킬로미터의 지역인데, 이것을 개정하여 약 3배인 30킬로미터로 확대한다. 30킬로미터는 IAEA에서 정한 긴급 방호조치 구역의 기준으로서, 이제야 국제 표준에 따르게 된 것이다. 개정 방재 지침은 또한 특정 사태 발생 시 즉시 피난하는 5킬로미터 내의 예방 방지 조치 구역도 도입한다. 그리고 50킬로미터 이내의 구역까지 요오드제의 준비를 하도록 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국제 표준을 좋아하는 한국은, 이 방재 구역만은 IAEA의 기준을 따르지 않고 여전히 8~10킬로미터에 머무르고 있다. 방재 구역의 개정엔 엄청난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돈 쓰기 싫다는 거다.

또 핵발전소의 수명을 법적으로 정하기로 한 것도 중요한 정책 변화다. 아직 법 통과는 안 되었지만, 수명 40년을 원칙으로 하면서 매우 예외적으로 최장 20년의 연장을 1회만 허용하기로 했다. 일본에 40년을 넘긴 핵발전소는 3기가 있고, 37년 이상 된 게 4기가 있다. 다만 연장에 대해서 아직까지 이렇다 할 기준은 없다. 한국의 경우 핵발전소의 수명이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고리 핵발전소처럼 1970년대에 만들어진 핵발전소는 금속 재질도 안 좋아서 30년 이상 쓰면 안 된다. 일본 정부는 또 백 피트(back-fit) 제도도 도입하기로 했다. 노후 핵발전소라도 최신의 안전 기준을 반영하도록 지시하고, 반영하지 않은 핵발전소의 경우에는 가동 정지를 명령하는 제도다. 이 제도들은 한국 정부도 시급히 따라가야 한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장기적인 측면에서 현재의 핵연료 주기 정책에 변화가 올 가능성이 있다. 일본은 사용 후 핵연료를 100퍼센트 재처리하여 고속증식로의 핵연료로서 플루토늄을 증식시켜 왔는데, 이 노선을 수정하여 직접 처분과 혼합 산화물 연료를 이용하는 플루서멀(Plu-thermal)을 실용적인 노선으로 검토할 예정이다.

이 내용은 오는 여름 제출을 목표로 작성 중인 '에너지 기본 계획 및 원자력 정책 대강'이라는 중장기 계획에서 드러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무모하다고 비판 받아 온 고속증식로 '몬쥬'는 포기하지 않을까 싶다. 또 현재 3기의 핵발전소가 건설 중인데, 이 3기 이상으로 또 새로 짓는 것은 대단히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거기다 위에서 언급했듯 핵발전소 수명을 40년으로 못 박아 놨기 때문에, 일본은 장기적으로 핵발전소가 축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전망한다.

MB가 꾸는 '핵의 꿈'을 묻다

3월 26·27일에 서울에서 핵 안보 정상 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여기서 논의될 여러 국가 공동의 핵 안보 가운데 테러 방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무래도 핵발전소 안전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반대로 내부의 사정과 정보는 점점 더 바깥으로 공표되기 어려워질 것이다. 안전 시설의 강화는 곧 정보 미공개의 강화라는 얘기다. 한편 IAEA, 즉 핵 확산의 감시의 강화가 핵발전소 안전의 강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데 주목하자. 결국 조약이 만들어져도 국가가 거기에 따르는가 아닌가의 문제인데, 중국 등 신흥 발전국들의 경우 안전 대책이 강화되면 크게 반발한다. 또한 핵 사찰의 강화는 기존의 핵 처리 기술 보유국 간의 연계 강화를 의미할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핵연료 산업계의 득세와 이에 따른 미국의 세계 전략이란 측면이다. 우리가 핵발전소 수출한다고 하면 두산중공업이 돈을 많이 벌겠구나 하지만, 두산중공업은 기계만 만들어 파는 거다. 새로 핵발전소 지을 때 딱 한 번 거래하는 거다. 그런데 핵연료는, 핵발전소 한 번 지어놓으면 40년 동안 팔 수 있다. 핵연료 산업도 석유처럼 메이저가 있는데, 바로 미국이다. 가령 일본은 1970년대까지 핵연료 가운데 3할 이상을 미국에서 사야 하는 규정을 지켰다. 미국의 핵연료 농축 공장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핵발전소는 확산되어야 한다. 이것이 미국의 세계 전략이다.

한편, 핵연료 공급과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의 공동 추진 역시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다. 맨 처음엔 오스트레일리아에 처분장을 건설하기로 했는데 무산되었고, 지난해엔 몽고에서 또 무산되었다. 핵발전소를 돌리는 한 계속 발생하는 폐기물의 문제는 앞으로 점점 더 큰 이슈가 될 텐데, 제발 제대로 알았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 얼마 전 한국방송(KBS)에서 핵 안보 정상 회의와 관련해 이란 스페셜 프로그램을 방송했는데 그걸 보고 화가 많이 났다. 핵연료를 사용 후 재처리 하면 96퍼센트까지 재활용 할 수 있다고 프랑스의 아레바(AREVA)의 입을 빌려 보도한 것이다. 완전히 거짓말이다. 내가 보기에 재활용 할 수 있는 비율은 간단히 계산하면 1퍼센트, 정확히 계산하면 0.1퍼센트 정도밖에 안 된다. 국내 신문사들은 이 과학적 이야기를 제대로 써 주지 않는다. 뒤에 대체 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국민을 완전히 호도하는 짓이다.

아시다시피 한국은 핵발전소 수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새로운 시장은 터키,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인데, 터키나 베트남은 조건이 너무나 좋지 않다. 우리가 건설을 위한 자금을 전부 조달하고 가장 싼 가격을 제시하면 수주한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도 한국 정부가 수주를 위해 힘을 쏟고 있는 나라이지만,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타이도 연기했고, 필리핀은 화산 때문에 IAEA에서도 핵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나라다.

핵발전소 수출 시장에 중국도 더 깊이 들어올 것이다. 그런데 시장은 줄어들고 있는 한편 중국은 한국보다 돈도 자원도 많고, 파는 가격도 싸다. 땅 넓은 중국엔 사용 후 핵연료 보관 장소도 있다. 그것까지 받아주는 조건으로 했을 때 한국이 경쟁할 수 있을까? 승패가 빤히 보인다. 이건 결국 우리가 산업 구조를 바꿔야 하는 문제다. 핵발전소를 짓는 사업이 아니라 핵발전소의 폐로 사업에 집중하면 어떨까. 앞으로 문 닫는 핵발전소가 늘어날 것이다. 그게 우리가 살 길이다.



/안은별 기자(정리)

2012년 3월 2일 금요일

체르노빌 사람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3-02일자 기사 '체르노빌 사람들'을 퍼왔습니다.
[정욱식의 '핵과 인간'] 원전은 안전한가?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핵 발전소 4호기가 수 차례의 폭발 후 무너져 내렸다. 대재앙을 몰고 온 원전은 출력 100만킬로와트로 소련의 신형 흑연감속로이었다. 1984년 3월부터 가동된 이 원전의 노심에는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2,600개에 달하는 '죽음의 재'가 쌓여 있었다. 사고 결과 5천만 Ci(퀴리)의 방사성 핵종이 방출됐고, 이 가운데 70%가 이 원전과 인접한 벨라루스를 덮쳤다. 마을 485개가 '죽음의 땅'으로 변했고, 이 가운데 70개는 땅속으로 영원히 묻혔다.

시간이 지나면서 죽음의 재는 지구촌 전체로 퍼져갔다. 체르노빌 사고를 그저 먼 나라의 참사 정도로 간주하기에는 방사능은 넓고 지구는 좁았다. 당초 소련은 이 사고를 감추려했지만, 체르노빌 원전에서 1,250킬로미터 떨어진 스웨덴의 포스막 원전에서 4월 29일고농도의 방사능이 검출돼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뒤이어 유럽 전역에서 고농도 방사성 물질에 측정되기 시작했고, 5월 2일 일본, 4일 중국, 5일 인도, 그리고 6일에는 미국과캐나다에서도 방사능이 차례로 검출됐다. 당시 교토대학 원자로연구소에서 방사능 측정을 담당했던 고이데 히로아키의 증언을 들어보자.

"처음에는 이상한 방사능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8,2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데 설마 일본에까지 날아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5월 3일이 되고, 내가 호흡하고 있는 공기중에서 이상 방사능이 발견되었습니다. 방사능이 8,200킬로미터라는 지리를 날아서 일본에 당도한 것입니다. 그때의 오염 수치는 그 후 날이 가며 서서히 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5월 하순이 되자 다시 수치가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상공까지 날아온 오염이 태평양을 넘어서 아메리카대륙을 통과하여 유럽, 아시아를 넘어서 이렇게 지구를 한바퀴 돌아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사고 수습을 위해 약 50만명의 인력과 180억 루블이 투입됐다. 사고 피해가 가장 컸던 벨라루스는 사고 전 암환자가 10만명당 82명이었으나 2002년에는 6천명으로 급증했다. 해체작업에 두입된 노동자들도 하루 2명꼴로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 인한 사망자 수는 추정기관에 따라 4000천명에서 100만명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그 고통은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고 발생 당시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은 미하엘 고르바초프였다. 그는 이 참사를 목도하고는 핵과 인류의 미래는 양립할 수 없다는 신념을 더욱 굳건히 했고,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보다 20여년 앞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주창했다. 이러한 '신사고'는 미-소 냉전을 평화적으로 종식할 수 있었던 결정적 힘이었고, 노벨상 위원회는 1990년 고르바초프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그의 업적을 기렸다. 고르바초프는 원전 사고 발생 및 악화의 큰 원인을 소련의 경직되고 불투명한 관료주의에 있었다고 보고 정치 개혁(glasnost)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한때 미국과 세계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뤘던 소련 몰락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될 정도로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폭발한 원전 4호기의 이름은 '우크리티예'이다. 2000톤의 우라늄과 1톤의 플루토늄을 비롯해 약 200톤의 핵 물질을 품고 있는 이 원전은 사고 직후 거대한 석관으로 봉쇄되었다. 그러나 체르노빌 참사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현재진행형'이다. 석관의 수명은 30년에 불과한 2016년까지이다. 석관 곳곳에 균열이 생겨 지금 이 시간에도 방사능이 새어 나오고 있다고 한다. 또한 빗물이 스며들면서 핵분열 연쇄반응이 일어날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 정부는 국제 사회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강철관 공사에 들어갔다. 높이 150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구조물에는 무려 2만톤의 금속이 사용되고,수조원의 예산이 소요될 예정이다. 2015년 완공을 목표로 지어지고 있는 이 강철관의 수명은 100년이다. 국제사회의 미진한 기부로 공기가 계속 늦춰졌으나, 후쿠시마 참사가 일어나면서 세계 각국은 우크라이나에 7억8천5백만 달러의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 체르노빌 피해자들 ⓒ뉴시스

'체르노빌의 목소리'

우크라이나 출신의 세계적인 저널리스트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역작 에는 '체르노빌레츠(체르노빌 사람들)'의 증언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녀는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 이렇게 썼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체르노빌을 겪어 본 인류는 핵 없는 세상을 향해 갈 것만 같았다. 원자력의 시대를 벗어날 것만 같았다. 다른 길을 찾을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체르노빌의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 "체르노빌의 증인"을 자처한 알렉시예비치는 "사고가 발생한 지 벌써 20년이나 흘렀지만, 내가 증언하는 것이 과거인지, 또는 미래인지" 자신에게 묻고 있다며,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더욱 잔인하고 총체적인 과제가 우리를 기다린다"고 역설한다.

약 20년에 걸쳐 체르노빌레츠를 인터뷰해 내놓은 이 책에 담긴 증언의 일부를 보자. 마을 주민들은 주변의 겉모습은 너무나도 익숙하기만 한데, 그 익숙한 환경이 자신들을 죽일 수 있는 무기가 되어버린 현실에 몸서리쳤다. "낚아 올린 물고기가, 사냥한 들새가,사과가" 말이다. "해도 떴고, 연기도 안 보이고 가스 냄새도 안 나는데……. 총도 안 쏘는구먼. 이게 전쟁이야? 그런데 피난을 가라니……." 사고 발생 직후 소련 정부는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해 주민들을 대비시키고 "흙을 흙으로 묻었으며", 길거리를 배회하는 개와고양이 등 동물들을 죽였다.

체르노빌 사태 직후 소련 정부나 언론은 거의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당연히 주민들은 큰 불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들이 발생했다. "아침에 정원에 나가보니 익숙했던 소리가 들리지 않았소. 왠지 벌이 한 마리도 없었소. (중략) 나중에야 원전에 사고가 났다고 들었는데, 그 원전이 옆에 있던 거였소. 벌들은 알았는데, 우리는 모른 거지." 늙은 양봉가의 말이다. "텔레비전으로 설명을 해주기를 기다렸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얘기해줄 줄 알았어. 그런데 지렁이가, 평범한 지렁이가 땅 깊숙이 들어갔어. 그런데 우리는 모르잖아. 그래서 땅을 파고 또 팠지. 그런데도 지렁이를 한 마리도 못 찾아 고기를 못 잡았지." 어부들의 증언이다.

사랑과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임산부의 사연은 "셰익스피어도, 위대한 단테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됩니다! 입 맞추면 안 됩니다! 만지면 안 됩니다! 이제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방사선 오염 덩어리입니다." 원전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소방대원의 젊은 아내 류드밀라 이그나텐코는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편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고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을 지켰다. 몇 개월 후 이 여인은 나타샤라는 딸을 낳았다. 남편이 죽기 전에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4시간만에 숨졌다. 2년 후 다른 남자를 만난 이그나텐코는 사내 아이를 낳았고 안드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주위의 걱정과는 달리 건강해 보이는 아이였다. 그녀가 말한 "행복한 때"였다. 그러나 모자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엄마는 뇌출혈로 쓰러졌고 아들 역시 한 달에 보름은 의사와 함께 집에서 지낼 정도로 아팠다고 한다.

이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 지 25년 후, 고르바초프는 '핵과학자협회보(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3/4월호 기고문을 통해 '체르노빌을 잊지 말 것'을 호소하고 나섰다. 그는 "체르노빌 사고 25주년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장엄한 임무를 되새기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이정표"라며, "우리 모두 체르노빌을 기억하자. 체르노빌 사태의 부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더 안전하고 보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희망의 횃불로써 되새기자"고 호소했다. 고르바초프는 25년 전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제2의 체르노빌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예방, 재생 에너지, 투명성, 테러리즘과 폭력에의 취약성 등 4가지문제에 인류사회가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가운데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바로 '재생 에너지'이다. 그는 "우리가 오늘날 핵 에너지를 쉽게 거부할 수는 없지만, 핵 발전이 에너지 공급과 기후 변화에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그는 마치 핵 발전이 '비용 절감형' 에너지인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이는 "과장된 것"이라며, 미국의 예를 들었다. 미국 정부는 1947년부터 1999년까지 원자력 분야에 모두 2천6백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한 반면에, 풍력과 태양열 발전에는 불과 55억 달러밖에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원자력만큼이나 재생 에너지에 투자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대안적이고 지속가능한 에너지원, 즉 바람, 태양열, 지열, 수소 등에 투자"해,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면서도 깨지기 쉬운 지구를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원전은 안전한가?

체르노빌 참사 25주년이 다가오면서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탈원전'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바로 그 때, 원전 선진국이라고 자부했던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했다. 체르노빌을 과거지사로 묻고 또 다시 원전 르네상스에 심취해 있었던 인류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미국 스리마일 원전 사고는 기술자의 실수로, 체르노빌 참사는 과학자들의 무리한 실험 과정에서, 그리고 후쿠시마 참사는 지진과 쓰나미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지진 8.0 규모에도 끄떡없다던 일본의 자존심은 9.0이라는 수치 앞에 비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또 다시 참사를 거치고서야 인류 사회는 다시 묻기 시작했다. '핵과 인간'은 양립가능하냐고.

우리는 원자력이 깨끗하고 안전하며 저렴한 에너지원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방사능에 피폭되더라도 "기준치 이하는 안전하다"라는 말에도 익숙하다. 화석 연료가 주범으로 일컬어지는 지구 온난화 시대에 원전은 유력한 대안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죽음의 재'로 일컬어지는 방사능 물질이 인체에 들어가면 DNA를 포함한 분자결합을 절단‧파괴‧손상되고 피폭 수준에 따라 그 증상은 빠르게 나타날 수도 있고, 아주 서서히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데 바로 원전은 어마어마한 양의 '죽음의 재'를 만들어낸다. 이는 히로시마 원폭과 비교하면 그 심각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히로시마의 8킬로그램의 우라늄 핵폭탄에서 실제로 연소된 우라늄의 양은 800그램 정도였다. 그런데 100만킬로와트의 현대식 원자로가 1년에 태우는 우라늄의 양은 약 1천킬로그램으로 히로시마 핵폭탄보다 1200배 가량 많다. 당연히 죽음의 재도 이에 비례해서 만들어진다. 이를 세슘-137로 비교해보면, 히로시마 원폭이 뿜어낸 양은 약 3,000Ci였고, 체르노빌 원전사고료 방출된 양은 약 250만Ci, 그리고 100만킬로와트 원전이 1년간 만들어내는 양은 약 300만Ci 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늘날 표준이 된 100만킬로와트급 원전은 원자로 내부에서 300만킬로와트의 열을 만들어내는데 이 중에 전기로 전환되는 양은 100만킬로와트에 불과하고 나머지 200만킬로와트는 바다에 버리는 구조로 운전된다. 원전의 효율이 이렇게 떨어지는 이유는 연료 건전성의 제약에 있는데, 터빈으로 보내는 증기의 온도를 280도 이상 올릴 수 없다. 반면 화력발전소는 500도까지 올릴 수 있어 발전 열효율이 50% 이상이다. 원전은 바닷물을 냉각수로 이용하는데, 100만킬로와트 원전 1기는 초당 바닷물 70톤의 온도를 7도 가량 상승시킨다. 이를 두고 도쿄대의 미토 이와오 교수는 "'원자력발전소'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아. 정확히 말하면 '바다 데우기 장치'야"라고 지적했다. 수온의 급격한 상승은 해양 생태계에 여러 부작용을 동반할 뿐만 아니라, 바닷물의 수온이 상승하면 대기 중으로 뿜어져 나오는 이산화탄소도 늘어나게 된다.

'죽음의 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인류 사회가 안고 있는 최대 숙제이기도 하다. 핵폐기물은 원전 전과정에서 나온다. 우라늄을 채굴‧정련할 때에도, 이를 농축‧가공해 핵 연료봉을 만들 때에도, 원자로를 가동할 때에도 나오고, 무엇보다도 사용후연료봉은 그 자체가 엄청난 방사능 덩어리이다. 죽음의 재 가운데 반감기가 짧은 것으로 알려진 세슘-137은 30년이고, 플루토늄-239는 무려 2만4천년이다. 장갑, 옷, 장비 등 저준위 폐기물의 반감기는 300년이다. 사용후 연료를 일컫는 고준위 폐기물은 무려 1백만년에 달한다.

과학자들은 반감기도 대단히 길고 또 방사능 농도도 대단히 높은 고준위 폐기물, 즉, 사용후연료봉 처리에 골몰해왔다. 우주에 갖다버리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렵고, 해양 처분은 런던 조약에 의해, 남극 깊이 파묻는 것은 남극조약에 의해 금지돼 있다. 그래서 처분 방법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재처리인데,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 재처리를 하더라도 고준위 폐기물은 남는다. 심지층 처분이다. 그런데 원전이 가동된 지 60년이 지났지만, 핵 폐기물의 처리를 확실히 하고 있는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 "인류는 원전이 만들어내는 폐기물의 처분방법도 없이 오늘날까지 와버린" 셈이다.

원자력이 지구 온난화를 늦출 유력한 대안이라는 주장도 검증할 필요가 있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원자력발전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적 에너지로서 지구환경문제를 방지할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관심을 갖고 있는 기후변화협약에도 대비할 수 있습니다"라고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눈 가리고 아옹'하는 격이다. 원자력이 발전할 때에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우라늄 채굴, 제련, 농축 및 가공, 원자로 건설 및 운전, 핵폐기물 처리 과정에서 엄청난 자재와 에너지가 소모되고, 소모되는 자재와 에너지의 상당 부분은 화석 연료에 의존하고 때문이다. 더구나 원전의 원리가 되는 핵분열 반응시 이산화탄소는 배출되지 않지만, 이산화탄소보다 훨씬 위험한 방사성 물질, 즉 죽음의 재를 배출한다.

"기준치 이하라서 안전하다"라는 말도 사람들을 안심시키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다. 여기서 기준치는 IAEA가 정하고 세계보건기구(WHO)가 동의한 것이다. 그러나 WHO가 IAEA에 굴복한 결과라는 비판이 많다. 동국의대 미생물학과 교수인 김익중은 이렇게 반박한다. "방사능은 그 피폭량에 비례하여 암을 발생시킨다. 이는 기준치 이하에서도 마찬가지다. 안전한 방사능은 없다."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미국과학아카데미위원회는 2005년 6월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최소한의 피폭이라도 인간에게 위험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일본의 원자력 전문가인 고이데 히로아키 역시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피폭량에 비례해서 영향이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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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2012년 3월 1일 목요일

고삐풀린 원자력 신화, 그 오만의 대가는…


이글은 프레시안 2012-03-01일 기사 '고삐풀린 원자력 신화, 그 오만의 대가는…'을 퍼왔습니다.
[정욱식의 '핵과 인간'] 원전을 향한 질주

핵은 무기로부터 시작됐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즈음에 그 과학적 원리가 입증되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된 직후 전쟁이 끝났다. 가공할 폭발력을 선보인 핵은 이후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항공모함과 잠수함의 추진력으로 핵을 이용해 대서양과 태평양의 강자로 우뚝 섰고, 이후 소련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도 뒤따랐다. 이들 무기에 추진력으로 사용된 핵 발전은 가압경수로(PWR)였는데, 이후 PWR는 대표적인 핵 발전소의 모델이 된다.

'이 무시무시한 무기를 에너지로 쓸 수 있다면?' 많은 과학자들과 정부들은 이 질문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은 원자력을 "세계 번영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기대를 품고 핵을 에너지로 사용하기 위한 움직임은 1950년대 들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핵을 "기적의 힘"이라고 부르면서 대단히 저렴하고 고갈될 걱정도 없는 에너지원 개발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태양의 일부를 지구에 갖다 놓은 것처럼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핵을 무기로 사용하면 인류 절멸의 무기가 될 수 있지만, 에너지로 사용하면 인류 문명의 신기원을 열 수 있다는 기대감도 높아졌다.

이러한 기대감을 반영하듯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12월 8일 유엔 총회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Peace)'를 발표했다. 그는 말했다. "핵의 시대는 지구촌의 모든 사람이 우려해야 할 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략) 미국은 여러분과 전 세계 앞에 가공할 만한 핵의 딜레마를 해결할 것을 약속합니다. 인간의 경의적인 발명품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기여할 수 있도록 모든 열정과 정성을 다해 노력할 것입니다." 당시 원자력에 대한 환상은 미국 원자력위원회 의장이었던 루이스 스트라우스(Lewis Strauss)가 원전은 "너무 저렴해서 측정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났다. 이러한 환상은 1955년 12월 31일자 일본의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자력을 잠재 전력으로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다. 게다가 석탄 등의 자원이 지구상에서 차차 없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에너지가 갖는 위력은 인류 생존에 불가결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중략) 전기료는 2,000분의 1이면 된다. (중략) 원자력발전에는 화력발전처럼 큰 공장이 필요 없다. 큰 연돌이나 저탄장도 필요 없다. 매일 석탄을 운반하고 재를 버리기 위한 철도나 트럭도 필요 없다. 밀폐식 가스터빈을 이용할 수 있으면 보일러의 물조차 필요 없다. 물론 산간벽지를 선택할 필요도 없다. 빌딩의 지하실이 (핵) 발전소가 될 수도 있다."

'핵무기는 통제하고 원전은 확대하라!'

'신의 불'이라고 불리던 핵을 가장 먼저 손에 넣은 미국은 자신의 핵무기 독점은 유지하면서 핵의 "평화적 이용" 방안 마련에 몰두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 11월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고 평화적 목적의 핵 이용은 철저한 국제 검증 아래에 두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유엔 원자력위원회(UN Atomic Energy Commission)를 만들어 국제적 핵통제 체제를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이듬해 미국 정부는 더욱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새로운 핵무기와 핵분열 물질 생산 금지, 우라늄 광산 통제, 핵연료 주기에 대한 국제적 통제와 엄격한 검증 체제 구축, 완전한 핵무기 폐기, 국제 원자력 개발 기구(International Atomic Development Authority)를 창설 등을 담은 '바루크 플랜'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당시 핵 독점의 지위를 누렸던 미국은 진정성이 결여된 말잔치에 불과했다. 미국이 유일한 핵보유국이었던 만큼, 국제 핵통제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핵무기 폐기를 약속하고 실천해야 했지만, 이를 거부한 것이다.

뒤이어 집권한 아이젠하워는 에너지로도 가공할 무기로도 이용될 수 있는 '핵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국제 원자력 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늘리면서 핵보유국들은 핵무기 보유고를 줄이기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젠하워의 제안은 바루크 플랜과는 사뭇 다른 방향이었다. 바루크 플랜이 핵무기의 완전 폐기를 제안한 반면,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에서는 감축과 통제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우라늄 은행'으로 제안된 IAEA의성격도 변질되었다. IAEA의 당초 기능은 공평하게 우라늄을 모아 이것을 다시 분배하는 것이었는데, 소련이 우라늄 납부를 거부하고 미국 의회가 핵 물질 및 기술 분배의 독점적 권한을 주장하면서 무산되었다. 이렇듯 국제적 핵 통제 구축이 난항을 겪고 있는 사이에 미국, 소련, 영국 등 핵보유국들이 다른 여러 나라들과 양자 협정을 체결해 원자로를 비롯한 핵시설과 핵기술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아이젠하워의 구상은 이후 지지와 비판을 함께 수반하게 된다. 옹호자들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 없었더라도 핵확산은 불가피했고, 이 구상을 통해 그나마 그 속도와 범위를 줄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아이젠하워의 제안에 힘입어 1956년 IAEA가 공식적으로 창립돼 국제적 핵 통제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지적한다. 반면 비판론자들은 아이젠하워의 정책은 미국 원자력 산업계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었고, 오히려 핵확산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반박한다. 소련, 영국, 프랑스 등이 이미 원자력 기술을 갖춘 상태여서 앞으로 미국의 시장 점유율이 줄어들 수 있으므로 미국이 선수를 쳐야 한다는 '이윤 논리'가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이 돈을 벌기 위해 핵 기술을 다른 나라들에게 판매함으로써 인도, 이스라엘, 브라질, 아르헨티나가 미국의 원자력 수출에 힘입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거나 그 문턱에 도달했다고 지적한다.

NPT와 IAEA의 '생얼'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의 근본 취지는 핵이 인류 문명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평화적 이용은 증진하는 대신에, 인류 문명의 파괴를 가져올 수 있는 핵무기의 확산은 방지하자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의도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취지와 맥락을 같이한다. '평화를 위한 원자력'은 몇 가지 중대한 문제를 드러냈다. 첫째, 세계 최대 핵보유국인 미국 스스로가 핵무기 보유를 전제로 이 구상을 추진한 탓에 국제 사회의 광범위한 지지와 참여를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둘째, 미국의 실질적 행보는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과 거리가 멀었다. 그가 백악관에 들어갈 때 1,400개였던 미국의 핵무기는 그가 백악관을 떠날 때는 2만개까지 증가해 있었다. 셋째, 미국은 핵 기술과 물질이 군사용으로 전용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핵 국가에 대한 원자력 수출에 적극적이었다. 훗날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거나 개발에 성공한 많은 나라들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원자력을 수입한 나라들이 대부분인데, 여기에는 비밀 핵개발에 성공한 남아프리카 공화국뿐만 아니라 오늘날 미국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이란도 포함되어 있다. 끝으로 스리마일 섬과 체르노빌, 그리고 후쿠시마로 이어진 원전 사고가 입증해준 것처럼, 핵 '발전' 역시 핵 '무기' 못지 않게 인류 생존과 지구 환경을 위협하고 있다. '평화를 위한 원자력'은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는 형용모순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이젠하워의 제안에 힘입어 1956년에 창설된 IAEA에 대한 비판론도 거세지고 있다. 이 기구는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증진하는 대신에, 핵기술이 군사적 용도로 전용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그 결과 1961년에는 최초로 안전조치협정을 만들었고, 1967년에는 기존의 내용을 강화한 새로운 안전조치협정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1970년 NPT가 탄생하면서 IAEA는 비핵 국가의 의무를 검증하는 유엔 기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런데 설립 취지에 "원자력 에너지의 공헌을 진전시키고 확대한다"고 명시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IAEA가 원전 확대를 존재 이유로 삼다보니 '국제 원전 마피아'라는 오명을 자초하고 있다. IAEA의 홍보부장을 지낸 요시다 야스히코의 말이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목으로 각국으로부터 온, 원자력 산업 대리인들이 업계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만 활동한다. 국제기구라고 하면 뭔가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만, 실태를 냉정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IAEA의 횡포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또 다른 유엔 기구인 세계보건기구(WHO)와의 관계이다. WHO는 1956년까지는 "원자력 산업과 방사능원의 증대에 의해 미래 세대가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했었다. 그런데 1959년 WHO는 IAEA와 맺은 협약을 맺고는 IAEA의 방사능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 IAEA 입장이 다른 것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핵 강대국들이 유엔을 장악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이에 따라 WHO는 IAEA의 하수인으로 전락했고, 이러한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IAEA와 WHO의 협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IAEA의 횡포는 체르노빌 사태에 대한 평가에서 또 다시 입증된다. IAEA는 2006년 체르노빌 사고에 관한 국제회의를 개최하면서 이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가 약 4000명이라고 발표했다. 반론은 즉각 구소련에서 원전 설계에 관여했던 과학자들을 통해 나왔다. 이들은 IAEA의 평가가 ▲영어 이외의 슬라브어로 된 1차 차례를 이용하지 않았고 ▲방사성 물질 43%가 배출된 지역을 조사 대상에서 제외했으며 ▲의도적으로 방사선 농도의 수치를 과소 평가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는 98만5천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NPT를 살펴보자. 1968년부터 서명에 들어가 1970년 3월에 발효된 NPT는 핵무기 확산을 예방하고 궁극적으로 완전한 핵무기 폐기의 달성을 목표로 하는 대표적인 국제 군축 조약이다. NPT가 발효될 당시에는 회원국이 43개국에 불과했으나 점차 늘어나 2012년 2월 현재 189개국으로 늘어났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은 NPT에 줄곧 비회원국으로 남아 있으면서 핵무기를 개발‧보유하고 있으며, 북한도 이들 나라의 길을 걷고 있다. 이들 네 나라가 NPT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핵무기를 폐기하거나 핵무기 폐기를 약속하고 IAEA의 감시와 사찰에 동의해야 한다.

NPT는 '세 개의 기둥'으로 이뤄져 있다. 비핵 국가와 핵보유국 사이의 균형된 의무로서 '비확산(non-proliferation)'과 '핵군축(disarmament)'을 함께 요구하는 한편, 회원국의 '평화적 핵이용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비확산'은 비핵 국가들이 평화적 핵이용 권리는 보장받는 대신에 이를 핵무기 개발로 전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고, '핵군축'은 핵보유국의 핵무기 폐기 의무를 의미한다. 그러나 NPT는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확산'에 초점을 맞춘 조약이다. 또한 생물무기금지협약, 화학무기금지협약, 대인지뢰금지협약, 집속탄금지협약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 군축 조약은 해당 무기의 사용 및 실험 금지와 폐기를 명시한다. 반면 NPT는 핵보유국의 핵무기 사용 금지는 물론이고 추가적인 핵무기 제조 금지와 핵폐기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NPT는 1967년 1월 1일 이전에 핵실험을 했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미국, 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의 핵무기 보유는 인정하면서 핵폐기 의무를 '선의(good faith)'에 맡겼다. 반면 다른 회원국들의 핵무기 개발은 금지하고 IAEA를 통해 이를 검증하는 대신에 평화적 핵이용을 보장하고 있다.

NPT는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189 대 4'(회원국 대 비회원국)라는 스코어가 보여주듯, NPT는 군비 통제 조약 가운데 가장 많은 회원국이 참여하고 있다. 또한 '184 대 9'(비핵 국가 대 핵보유국)라는 숫자는 NPT 등장 이전에 우려되었던 핵확산이 이 조약 발효 이후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비확산 분야의 베테랑 외교관이었던 조지 번George Bunn은 "NPT가 없었다면, 오늘날 9개국이 아니라 30~40개국이 핵무기를 보유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NPT가 핵 비확산이라는 국제 규범을 확고히 함으로써 비핵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 동기를 크게 위축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핵 국가들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한 것은 NPT 때문이 아니라 독자적인 정치적‧안보적‧경제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NPT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고 그 의무의 이행도 차별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불평등 조약'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그리고 아래의 표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NPT는 5대 핵보유국의 핵군축에 이렇다 할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미국 쓰리마일 원자력 발전소

핵은 무기로부터 시작됐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즈음에 그 과학적 원리가 입증되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된 직후 전쟁이 끝났다. 가공할 폭발력을 선보인 핵은 이후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항공모함과 잠수함의 추진력으로 핵을 이용해 대서양과 태평양의 강자로 우뚝 섰고, 이후 소련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도 뒤따랐다. 이들 무기에 추진력으로 사용된 핵 발전은 가압경수로(PWR)였는데, 이후 PWR는 대표적인 핵 발전소의 모델이 된다.

'이 무시무시한 무기를 에너지로 쓸 수 있다면?' 많은 과학자들과 정부들은 이 질문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은 원자력을 "세계 번영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기대를 품고 핵을 에너지로 사용하기 위한 움직임은 1950년대 들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핵을 "기적의 힘"이라고 부르면서 대단히 저렴하고 고갈될 걱정도 없는 에너지원 개발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태양의 일부를 지구에 갖다 놓은 것처럼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핵을 무기로 사용하면 인류 절멸의 무기가 될 수 있지만, 에너지로 사용하면 인류 문명의 신기원을 열 수 있다는 기대감도 높아졌다.

이러한 기대감을 반영하듯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12월 8일 유엔 총회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Peace)'를 발표했다. 그는 말했다. "핵의 시대는 지구촌의 모든 사람이 우려해야 할 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략) 미국은 여러분과 전 세계 앞에 가공할 만한 핵의 딜레마를 해결할 것을 약속합니다. 인간의 경의적인 발명품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기여할 수 있도록 모든 열정과 정성을 다해 노력할 것입니다." 당시 원자력에 대한 환상은 미국 원자력위원회 의장이었던 루이스 스트라우스(Lewis Strauss)가 원전은 "너무 저렴해서 측정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났다. 이러한 환상은 1955년 12월 31일자 일본의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자력을 잠재 전력으로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다. 게다가 석탄 등의 자원이 지구상에서 차차 없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에너지가 갖는 위력은 인류 생존에 불가결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중략) 전기료는 2,000분의 1이면 된다. (중략) 원자력발전에는 화력발전처럼 큰 공장이 필요 없다. 큰 연돌이나 저탄장도 필요 없다. 매일 석탄을 운반하고 재를 버리기 위한 철도나 트럭도 필요 없다. 밀폐식 가스터빈을 이용할 수 있으면 보일러의 물조차 필요 없다. 물론 산간벽지를 선택할 필요도 없다. 빌딩의 지하실이 (핵) 발전소가 될 수도 있다."

'핵무기는 통제하고 원전은 확대하라!'

'신의 불'이라고 불리던 핵을 가장 먼저 손에 넣은 미국은 자신의 핵무기 독점은 유지하면서 핵의 "평화적 이용" 방안 마련에 몰두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 11월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고 평화적 목적의 핵 이용은 철저한 국제 검증 아래에 두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유엔 원자력위원회(UN Atomic Energy Commission)를 만들어 국제적 핵통제 체제를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이듬해 미국 정부는 더욱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새로운 핵무기와 핵분열 물질 생산 금지, 우라늄 광산 통제, 핵연료 주기에 대한 국제적 통제와 엄격한 검증 체제 구축, 완전한 핵무기 폐기, 국제 원자력 개발 기구(International Atomic Development Authority)를 창설 등을 담은 '바루크 플랜'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당시 핵 독점의 지위를 누렸던 미국은 진정성이 결여된 말잔치에 불과했다. 미국이 유일한 핵보유국이었던 만큼, 국제 핵통제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핵무기 폐기를 약속하고 실천해야 했지만, 이를 거부한 것이다.

뒤이어 집권한 아이젠하워는 에너지로도 가공할 무기로도 이용될 수 있는 '핵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국제 원자력 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늘리면서 핵보유국들은 핵무기 보유고를 줄이기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젠하워의 제안은 바루크 플랜과는 사뭇 다른 방향이었다. 바루크 플랜이 핵무기의 완전 폐기를 제안한 반면,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에서는 감축과 통제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우라늄 은행'으로 제안된 IAEA의성격도 변질되었다. IAEA의 당초 기능은 공평하게 우라늄을 모아 이것을 다시 분배하는 것이었는데, 소련이 우라늄 납부를 거부하고 미국 의회가 핵 물질 및 기술 분배의 독점적 권한을 주장하면서 무산되었다. 이렇듯 국제적 핵 통제 구축이 난항을 겪고 있는 사이에 미국, 소련, 영국 등 핵보유국들이 다른 여러 나라들과 양자 협정을 체결해 원자로를 비롯한 핵시설과 핵기술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아이젠하워의 구상은 이후 지지와 비판을 함께 수반하게 된다. 옹호자들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 없었더라도 핵확산은 불가피했고, 이 구상을 통해 그나마 그 속도와 범위를 줄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아이젠하워의 제안에 힘입어 1956년 IAEA가 공식적으로 창립돼 국제적 핵 통제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지적한다. 반면 비판론자들은 아이젠하워의 정책은 미국 원자력 산업계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었고, 오히려 핵확산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반박한다. 소련, 영국, 프랑스 등이 이미 원자력 기술을 갖춘 상태여서 앞으로 미국의 시장 점유율이 줄어들 수 있으므로 미국이 선수를 쳐야 한다는 '이윤 논리'가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이 돈을 벌기 위해 핵 기술을 다른 나라들에게 판매함으로써 인도, 이스라엘, 브라질, 아르헨티나가 미국의 원자력 수출에 힘입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거나 그 문턱에 도달했다고 지적한다.

NPT와 IAEA의 '생얼'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의 근본 취지는 핵이 인류 문명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평화적 이용은 증진하는 대신에, 인류 문명의 파괴를 가져올 수 있는 핵무기의 확산은 방지하자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의도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취지와 맥락을 같이한다. '평화를 위한 원자력'은 몇 가지 중대한 문제를 드러냈다. 첫째, 세계 최대 핵보유국인 미국 스스로가 핵무기 보유를 전제로 이 구상을 추진한 탓에 국제 사회의 광범위한 지지와 참여를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둘째, 미국의 실질적 행보는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과 거리가 멀었다. 그가 백악관에 들어갈 때 1,400개였던 미국의 핵무기는 그가 백악관을 떠날 때는 2만개까지 증가해 있었다. 셋째, 미국은 핵 기술과 물질이 군사용으로 전용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핵 국가에 대한 원자력 수출에 적극적이었다. 훗날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거나 개발에 성공한 많은 나라들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원자력을 수입한 나라들이 대부분인데, 여기에는 비밀 핵개발에 성공한 남아프리카 공화국뿐만 아니라 오늘날 미국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이란도 포함되어 있다. 끝으로 스리마일 섬과 체르노빌, 그리고 후쿠시마로 이어진 원전 사고가 입증해준 것처럼, 핵 '발전' 역시 핵 '무기' 못지 않게 인류 생존과 지구 환경을 위협하고 있다. '평화를 위한 원자력'은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는 형용모순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이젠하워의 제안에 힘입어 1956년에 창설된 IAEA에 대한 비판론도 거세지고 있다. 이 기구는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증진하는 대신에, 핵기술이 군사적 용도로 전용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그 결과 1961년에는 최초로 안전조치협정을 만들었고, 1967년에는 기존의 내용을 강화한 새로운 안전조치협정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1970년 NPT가 탄생하면서 IAEA는 비핵 국가의 의무를 검증하는 유엔 기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런데 설립 취지에 "원자력 에너지의 공헌을 진전시키고 확대한다"고 명시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IAEA가 원전 확대를 존재 이유로 삼다보니 '국제 원전 마피아'라는 오명을 자초하고 있다. IAEA의 홍보부장을 지낸 요시다 야스히코의 말이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목으로 각국으로부터 온, 원자력 산업 대리인들이 업계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만 활동한다. 국제기구라고 하면 뭔가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만, 실태를 냉정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IAEA의 횡포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또 다른 유엔 기구인 세계보건기구(WHO)와의 관계이다. WHO는 1956년까지는 "원자력 산업과 방사능원의 증대에 의해 미래 세대가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했었다. 그런데 1959년 WHO는 IAEA와 맺은 협약을 맺고는 IAEA의 방사능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 IAEA 입장이 다른 것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핵 강대국들이 유엔을 장악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이에 따라 WHO는 IAEA의 하수인으로 전락했고, 이러한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IAEA와 WHO의 협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IAEA의 횡포는 체르노빌 사태에 대한 평가에서 또 다시 입증된다. IAEA는 2006년 체르노빌 사고에 관한 국제회의를 개최하면서 이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가 약 4000명이라고 발표했다. 반론은 즉각 구소련에서 원전 설계에 관여했던 과학자들을 통해 나왔다. 이들은 IAEA의 평가가 ▲영어 이외의 슬라브어로 된 1차 차례를 이용하지 않았고 ▲방사성 물질 43%가 배출된 지역을 조사 대상에서 제외했으며 ▲의도적으로 방사선 농도의 수치를 과소 평가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는 98만5천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NPT를 살펴보자. 1968년부터 서명에 들어가 1970년 3월에 발효된 NPT는 핵무기 확산을 예방하고 궁극적으로 완전한 핵무기 폐기의 달성을 목표로 하는 대표적인 국제 군축 조약이다. NPT가 발효될 당시에는 회원국이 43개국에 불과했으나 점차 늘어나 2012년 2월 현재 189개국으로 늘어났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은 NPT에 줄곧 비회원국으로 남아 있으면서 핵무기를 개발‧보유하고 있으며, 북한도 이들 나라의 길을 걷고 있다. 이들 네 나라가 NPT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핵무기를 폐기하거나 핵무기 폐기를 약속하고 IAEA의 감시와 사찰에 동의해야 한다.

NPT는 '세 개의 기둥'으로 이뤄져 있다. 비핵 국가와 핵보유국 사이의 균형된 의무로서 '비확산(non-proliferation)'과 '핵군축(disarmament)'을 함께 요구하는 한편, 회원국의 '평화적 핵이용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비확산'은 비핵 국가들이 평화적 핵이용 권리는 보장받는 대신에 이를 핵무기 개발로 전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고, '핵군축'은 핵보유국의 핵무기 폐기 의무를 의미한다. 그러나 NPT는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확산'에 초점을 맞춘 조약이다. 또한 생물무기금지협약, 화학무기금지협약, 대인지뢰금지협약, 집속탄금지협약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 군축 조약은 해당 무기의 사용 및 실험 금지와 폐기를 명시한다. 반면 NPT는 핵보유국의 핵무기 사용 금지는 물론이고 추가적인 핵무기 제조 금지와 핵폐기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NPT는 1967년 1월 1일 이전에 핵실험을 했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미국, 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의 핵무기 보유는 인정하면서 핵폐기 의무를 '선의(good faith)'에 맡겼다. 반면 다른 회원국들의 핵무기 개발은 금지하고 IAEA를 통해 이를 검증하는 대신에 평화적 핵이용을 보장하고 있다.

NPT는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189 대 4'(회원국 대 비회원국)라는 스코어가 보여주듯, NPT는 군비 통제 조약 가운데 가장 많은 회원국이 참여하고 있다. 또한 '184 대 9'(비핵 국가 대 핵보유국)라는 숫자는 NPT 등장 이전에 우려되었던 핵확산이 이 조약 발효 이후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비확산 분야의 베테랑 외교관이었던 조지 번George Bunn은 "NPT가 없었다면, 오늘날 9개국이 아니라 30~40개국이 핵무기를 보유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NPT가 핵 비확산이라는 국제 규범을 확고히 함으로써 비핵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 동기를 크게 위축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핵 국가들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한 것은 NPT 때문이 아니라 독자적인 정치적‧안보적‧경제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NPT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고 그 의무의 이행도 차별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불평등 조약'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그리고 아래의 표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NPT는 5대 핵보유국의 핵군축에 이렇다 할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12년 1월 27일 금요일

조지 오웰의 경고, 핵을 가진 두세 개의 괴물과 냉전


이글은 프레시안 2012-01-27일자 기사 '조지 오웰의 경고, 핵을 가진 두세 개의 괴물과 냉전'을 퍼왔습니다.
[정욱식의 '핵과 인간'] 미국 핵 독점의 종말과 '슈퍼 폭탄'의 등장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두 달 후에 쓴 칼럼에서 소련이 수년 내에 핵무기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며, "우리는 몇 초 만에 수백만의 사람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무기를 보유한 두세 개의 괴물과 같은 슈퍼파워 국가들이 세계를 분단시키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대규모의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줄어들겠지만, 영원히 '평화가 없는 평화'의 상태, 즉 '냉전(cold war)'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후 인류의 역사는 그의 경고대로 진행되고 만다.


▲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백악관 앞에서 열광하는 미국 시민들. ⓒ트루먼 도서관

앞선 글에서 자세히 살펴본 것처럼, 미국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소련을 상대로 한 무력시위의 성격이 강했다. 원폭 투하를 통해 미국이 노렸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소련의 참전 이전에 미국의 힘에 의해 일본을 패망시키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미 싹트고 있던 냉전 질서에서 소련에 대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무력시위'의 성격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런데 애초에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요구한 당사자는 미국이었다.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미영 연합군은 소련의 개입이 태평양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보고, 소련에게 참전에 따른 '전리품'을 제시했었다. 소련에게 쿠릴 섬 및 사할린 섬 남단 이양 및 만주 해군기지 사용 허용 등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로 획득한 것을 소련에게 돌려주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독일이 패망하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탈린은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 이러한 약속을 거듭 확인하면서 "나치 독일의 패망 3개월 후에 대일전에 참전하겠다"라고 재확인했고, 포츠담 회담에서는 8월 15일이라는 구체적인 일정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은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서 계산을 달리 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소련의 참전에 의한 일본의 항복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키워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는데, 핵무기로 소련의 개입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원폭 투하는 소련의 지원 없이 일제를 패망시키고자 하는 동기와 함께 경쟁자로 부상한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의 성격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 이는 반대의 해석도 가능케 한다. 트루먼이 밝힌 것처럼, 소련의 대일본 선전포고는 8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정보다 6일이 빠른 8월 9일 참전을 단행했다. 아마도 스탈린의 머릿속에도 '미국이 전쟁을 끝나기 전에 우리도 서둘러 참전해야 한다'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스탈린 "히로시마가 세계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미국의 핵무기 및 원폭 투하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스탈린은 1940년대 초반부터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미국이 포츠담 회담에서 '핵 외교'를 선보이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기 이전까지 심혈을 기울이진 않았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한 작은 대비책"으로 간주하는 수준이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이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는 것을 정탐 활동과 일부 과학자들의 '자진 보고'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스탈린이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트루먼의 통보를 듣고 그리 놀라지 않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미국이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한 것에는 상당히 놀랐던 것으로 보인다. 히로시마 피폭 직후 스탈린은 "히로시마가 세계를 뒤흔들었다. 균형은 깨졌다. 핵폭탄을 만들어라. 그것은 우리로부터 거대한 위험을 제거해줄 것이다"라며, 소련 과학자들에게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미국의 핵 사용을 소련의 양보를 강제하기 위한 협박 외교로 규정하고, "우리가 협박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트루먼의 무력시위는 노련한 독재자 스탈린을 위축시키기보다 핵무기를 개발해 미국에 맞서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핵 독점은 2차 대전 말엽은 물론이고 종전 이후에도 "미국의 외교정책을 혁명화"시켰다. 대표적으로 "핵무기가 없었다면 미국 대통령이 결코 생각하기 힘든 정책, 즉 독일의 재건과 재무장을 선택하게 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독일의 재건 및 재무장에 따른 유럽 국가들의 두려움은 미국의 핵 억제로 차단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트루먼 대통령과 번스 국무장관은 1945년 8월 22일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독일의 위협이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며, "원자 폭탄은 도발을 일으키려는 나라들을 중지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미국의 양보가 불가피한 소련과의 협력도, 독일 재무장을 두려워하는 소련의 우려도 크게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핵의 위력을 믿은 미국의 대담한 행보가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독일 문제를 비롯한 소련과의 외교 협상에서 핵무기를 강압 외교의 수단으로 동원했다. 미국은 핵무기의 위력을 스탈린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원폭을 당한 히로시마에 소련 관료를 초청하기도 했고, 태평양에서 실시한 핵실험에 소련 관료를 참관시켰다. 또한 번스가 소련의 몰로토프 외무장관을 만나 독일 문제를 두고 담판을 벌이고 있었던 1946년 6월에는 태평양 비키니섬에서 대규모의 핵실험을 실시해 소련의 강한 반발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련이 그토록 거부했던 독일 재건에도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미국의 두 가지 카드, 즉 핵 시위와 독일 재건은 소련으로 하여금 미국이 전쟁을준비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강하게 갖게 했다. 당시 소련의 위협 인식은 소련 해체 이후 해제된 비밀문서에서 잘 나타난다. 1946년 주미 소련대사인 노비코프(Nikolai Novikov)는 미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 근거로 해외 해공군 기지 건설, 원자폭탄 등 신형무기의 증강, 독일의 재건 및 재무장 추진 등을 제시했다. 특히 "미국은 독일에서의 연합국의 임무, 즉 무장해제와 민주화를 달성하기 이전에 임무를 종식시키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데, 이는 독일 제국주의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고, 미국은 재무장한 독일을 자기편으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미국의 의도에 강한 의혹을 품으면서 "앵글로-색슨의 침공"을 막기 위해 강력한 대응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의 불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구상을 밀어붙였다. 소련의 강력한 반발을 뒤로 하고 유럽경제부흥계획인 '마셜 플랜'을 단행했다. 또한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와 이듬해 베를린 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은 핵무기 보유고를 크게 늘려 1949년에는 그 수를 200개로 늘렸다. 핵 능력 강화와 유럽경제부흥계획을 통해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아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을 침공 준비로 간주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유력한 대응책으로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주목할 점은 핵의 위력을 앞세운 미국의 강경 외교에 '핵 강압 외교'의 주역이었던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이 일찍이 강한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그는 1945년 9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소련과의 신뢰구축을 위해서는 미국의 핵 계획을 소련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그는 편지와 함께 동봉한 메모를 통해 그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미국의 원자 폭탄 보유는) 대륙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상쇄할 수 있는 중요한 무기로 간주되어왔습니다. 우리는 또한 소련 정부가 이러한 경향을 간파하고 있고, 가능한 최단시간 내에 이 무기를 획득하려는 소련의 정치ㆍ군사 지도자들의 유혹도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이 핵 독점을 통해 소련에 맞서는 앵글로-색슨 진영을 구축하면 "매우 절망적인 방식으로 비밀 군비경쟁이 야기"되고, "우리의 목적과 의도에 대한 소련의 의심과 불신은 증가될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추가적인 핵무기 개발과 생산을 중단하고, 소련 및 영국과 핵 기술 협력 및 통제를 놓고 협상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그의 충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련의 핵실험과 미국의 대응

결국 미국의 핵 독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카자흐스탄 사막 '세미팔라틴스크-21'에서 핵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 나가사키에 투하한 플루토늄 핵폭탄 '뚱보(Fat man)'와 흡사한 것으로써, 소련이 1950년대 중반에 가서야 핵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는 미국의 판단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1948년과 1949년 정보분석 보고서를 통해 소련의 핵무기 개발 성공 시점을 "1953년 중반기를 가장 가능성이 높은 때"라고 분석했다. 핵실험에 성공한 스탈린은 이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로 붙이고 싶어했다. 자극받은 미국이 대대적인 군비증강에 나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첨단 장비는 소련의 핵실험 사실을 포착했고, 트루먼은 9월 23일 이를 공식 발표했다. 미국은 소련의 핵무기를 스탈린의 이름을 따 'JOE-1'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미국은 대대적인 군비증강 계획에 착수하고 되는데, 당시 '슈퍼 폭탄'으로 불렸던 수소 폭탄 개발과 NSC-68는 이를 대표한다. 스탈린이 피하고 싶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만 것이다.


▲ 소련의 최초 핵실험 장면. ⓒ미국 에너지부

예상보다 빨리 실시된 소련의 핵실험에 당황한 트루먼 행정부는 세 가지 조치를 단행했다. 첫째는 유럽에서 소련의 재래식 군사력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영구적인 미군 주둔 및 재래식 군비증강이었다. 이는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폭등한 군사비를 줄이고 군부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자 했던 트루먼의 의도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둘째는 소련에 대한 핵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원자폭탄의 양과 질을 크게 늘리는 것이었다. 이미 트루먼 행정부는 원자폭탄 증강을 통해 재래식 군사력 감축을 상쇄할 생각이었는데, 소련의 핵실험 성공 소식은 원자폭탄 증강 열기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셋째는 당시 '슈퍼 폭탄'으로 불렸던 수소폭탄 개발 승인이었다. 트루먼은 1950년 1월 31일자 성명을 통해, "우리나라를 잠재적인 도발자로부터 방어하는 것은 최고 군통수권자의 의무"라며, "나는 원자력위원회에 수소 폭탄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핵무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수소 폭탄의 개발 방침은 핵의 역사에서 두 가지 심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수소 폭탄의 파괴력이 원자 폭탄의 수십배에 달해 단 한발의 폭탄으로도 대도시나 작은 나라를 완전히 날려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가공할 파괴력에 놀란 많은 사람들이 반핵주의자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대소 봉쇄 정책의 설계자인 조지 캐넌과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이들을 비롯한 많은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 과학자들은 "수소 폭탄의 사용은 원자 폭탄을 훨씬 능가하는 대량 살상을 가져올 것"이라며, 설사 소련이 이 무기를 손에 쥔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원자 폭탄으로 소련을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현재와 같은 군사 기술 수준에서 (핵)무장을 통해 안보를 달성하겠다는 것은 파멸적인 환상"이라며, "미-소 간의 군비 경쟁은 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소련의 핵실험 성공에 충격을 받은 트루먼 행정부는 '슈퍼 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소련보다 핵전력이 앞서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미국이 주저하는 사이에 소련이 먼저 수소 폭탄을 개발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팽배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1952년 11월 1일에 태평양에서 수소 폭탄 실험을 강행했다. 폭발 규모는 원자 폭탄 실험이었던 '트리니티'보다 500배 강력한 10메가톤을 넘어섰다. 소련 역시 그 이듬해인 1953년 8월 12일에 중앙아시아 사막에서 수소 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이처럼 미국과 소련은 조지 오웰인 말한 "두 개의 괴물"이 되어갔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1954년 3월 1일에 태평양 비키니 섬에서 실시된 미국의 수소 폭탄 실험은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낳았다. 폭발 규모가 무려 15메가톤에 달해,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탄보다 750배, 미국 정부가 예상했던 것보다 2.5배나 강력했던 것이다. 또한 직경 6,500피트, 깊이 250피트의 거대한 분화구가 생겨났으며, 버섯구름은 1분 후 직경 15킬로미터, 8분 후에는 100킬로미터까지 커졌고 높이도 무려 16.5킬로미터에 달했다. 더구나 방사능 낙진이 140여킬로미텉까지 날아가 조업 중이던 일본인 어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세계 곳곳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고 이상 기후가 나타났다.


▲ 1954년 3월에 실시된 미국의 수소 폭탄 실험 브라보

가공한 폭발력 앞에 인류 사회는 전율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핵무기를 다른 무기와 특별히 다르게 봐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던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까지 핵무기 옹호자였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역시 이 실험을 목도하고는 핵전쟁이 일어나면 영국은 더 이상 살 수 없는 땅에 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무엇보다도 수소 폭탄 실험 '브라보(Bravo)'는 반핵 운동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미국의 저명한 반핵단체인 분별있는 핵정책을 위한 전국위원회(National Committee for a Sane Nuclear Policy)와 비폭력행동위원회(Committee for Non-Violent Action) 등과 영국의 핵폐기캠페인(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그리고 초국적 단체인 퍼그워시(Pugwash) 등 저명한 반핵단체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대규모 반핵 집회 개최, 신문광고, 시민 불복종 운동 및 핵무기 시설 침투와 핵실험 지역에서의 해상 시위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반핵 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반핵 운동은 언론을 통해 전세계에 타진되었다. 그러자 핵무기 사용에 대한 미국 여론도 바뀌기 시작했는데, 1950년대 중반에는 선제 핵사용에 대한 반대 여론이 과반수를 넘어서기도 했다.

이처럼 원자 폭탄보다 파괴력이 훨씬 큰 수소 폭탄은 '핵분열' 반응을 이용하는 원자 폭탄과 달리 '핵융합' 반응을 이용하는 무기다. 수소 폭탄의 핵융합 반응은 원자 폭탄의 핵분열 반응에 비해 단위당 방출 에너지 양이 10퍼센트 정도로 작지만,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의 질량이 핵분열 물질의 2퍼센트밖에 안 되기 때문에 핵물질당 방출 에너지의 양은 원자 폭탄보다 4배 이상 많다. 예를 들어 10킬로그램의 핵물질이 포함된 수소 폭탄은 같은 질량의 원자 폭탄보다 파괴력이 42배 강하다. 그래서 "핵분열 폭탄은 태양 표면에 해당하는 온도를 만들어내는 반면에, 핵융합 폭탄은 태양의 일부를 지구에 갖다 놓은 것과 같은 엄청난 온도를 발산한다."

한편 소련이 미국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 내에서는 '매카시즘'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련의 최초 핵무기는 미국의 예상보다 5년 정도 빨리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플루토늄 핵폭탄인 '가제트' 및 '뚱보'와도 흡사했다. 소련 핵실험 5개월 후에는 소련 스파이의 핵심인물인 클라우스 푹스(Klaus Fucks)가 미 정보기관에 체포되었다. 그는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물리학자였는데, 1944년부터 로스앨라모스 연구소에 파견 근무하면서 핵심 정보를 소련 측에 넘겼다. 이 사건 직후에도 국무부 고위관료인 앨저 히스 간첩 논란 및 로젠버그 부부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미국 내 소련 스파이가 소련의 핵개발을 도왔다"는 심증은 확신을 갖게 됐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의 핵실험에 이어 10월 1일에는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미국 내 '적재 공포'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소련의 핵실험 성공이 미국 핵 독점체제를 무너뜨렸다면, 중국의 공산화 성공은 오랜 기간 미국의 동맹국으로 인식되었던 중국이 공산국가로 변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미국의 충격도 컸다. 특히 1950년 1월 들어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유엔 가입 문제로 미국과 소련이 날카로운 대립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 해 2월에 중소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이를 틈타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인 매카시(Joseph McCarthy)는 1950년 2월 9일 "나에게 국무부에서 일하는 205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이 있다. 그런데 국무장관은 이들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계속 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무명에 가까웠던 매카시는 이 폭탄 발언 한방으로 일약 저명한 정치인으로 올라섰다. 그가 경고한 '적색 공포'를 실증하듯 4개월 후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매카시즘은 미국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대외정책의 급격한 우경화를 야기했다. 국제정세가 급변하던 시기를 틈타 몰아치기 시작한 매카시즘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이 신속한 개입을 선택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에 신속한 개입을 선택함으로써 안보와 공산주의에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 주요 참고문헌

George Orwell, "You and the Atomic Bomb," Tribune, 19 October 1945.Joseph Cirincione, Bomb Scare: The History & Future of Nuclear Weapons, (ColumbiaUniversity Press, 2007)Nina Tannenwald, "Stigmatizing the Bomb: Origins of the Nuclear Taboo," International Security(Spring, 2005).William Burr, "U.S. Intelligence and the Detection of the First Soviet Nuclear Test, September 1949," September 22, 2009John Lewis Gaddis, The Cold War: A New History,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05).정욱식,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 (책세상, 2010년).카이 버드ㆍ마틴 셔원 지음, 최형섭 옮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사이언스북스, 2010년).트루먼 도서관: http://www.trumanlibrary.org조지워싱턴대 국가안보문서 보관소: http://www.gwu.edu/~nsarchiv/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