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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4일 일요일

강정마을을 야권 공세의 제물로 삼지 말라


이글은 한겨레신문 hook 2012-03-02일자 기사 '강정마을을 야권 공세의 제물로 삼지 말라'를 퍼왔습니다.

시민단체인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로 일하면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블로그 '정욱식의 뚜벅뚜벅'(blog.ohmynews.com/wooksik/)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명박 정부의 제주해군기지 건설 강행 발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부는 2월 29일 김황식 국무총리 주재로 국가정책조정회의를 개최하여 “제주 민군복합형 관광미항” 건설과 관련한 입장을 밝혔다. 핵심적인 내용은 “15만톤 규모의 크루즈 선박 입출항에 문제가 없”고, “국비 5787억원을 포함한 1조 771억원을 투입해 주변지역 발전 사업을 추진”하며, “불법적인 공사방해행위에 대해서는 민․형사상 책임을 묻는 등 엄정하게 대응해 나갈 것” 등이다. 그러면서 2015년까지 공사를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숱한 문제들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묻지마 공사’ 강행 의사를 밝힌 셈이다.
정부가 내세운 명분은 “우리나라 전체 교역 물동량의 99.8%가 통과하는 남방해역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필수적 시설이고, 제주지역의 새로운 관광자원이 되어 지역주민의 소득증대와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는 등 제주 경제발전에 중요한 국가사업”이라는 것이다. 또한 “현재 전체사업비 9,776억원 중 1,653억원(17%)이 집행”되었고, 공사가 지연될수록 “국가예산도 낭비되는 문제”가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남방해역 중요하다. 그래서 제주해군기진 안 된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무역 국가인 대한민국에게 바다의 중요성은 국민 모두가 공감하는 바일 게다. 그런데 건국 이래로 해상 교역에 차질이 빚어질 정도로 남방해역에 군사적 위협이 존재한 적은 없다.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에게 군사적 적대 행위를 하지 않는 한, 이들 나라가 우리나라의 해상 교역을 군사적으로 위협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극히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제주해군기지 건설이 강행되어 한국 해군이 이어도 초계 활동에 나서거나, 미국이 제주해군기지를 사용할 경우 우리의 남방해역을 포함한 국가안보와 국민경제가 총체적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미래의 불확실한 위협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건설되고 있는 제주해군기지가 불확실한 위협을 확실한 위협으로 만들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제주해군기지가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처럼 말하는 것 역시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건설비의 상당 부분은 삼성과 대림 등 거대 건설업체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고 있고, 제주 올레길 가운데 최고로 손꼽히던 제7코스도 거대한 펜스에 가로막혀 관광객도 크게 줄어들었다. 오히려 ‘강정마을을 돕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과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마을 경제를 살리고 있다’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올 정도다.
과연 MB 정부가 국민 혈세를 아까워하는 정권인지도 의문이지만, 지금까지 쓴 돈이 아까워서 공사를 강행하겠다는 말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공사 중단시 적지 않는 예산 손실이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공사 강행시 초래하게 될 비용과 비교하면 10퍼센트 안팎에 불과하다. 또한 공사 자재의 재활용, 원하는 주민을 대상으로 한 보상금과 토지의 교환, 매입 부지에 평화공원 조성, 잔여 토지 매각 등 다양한 방식을 동원하면 이미 투입된 예산의 상당 부분을 회수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공사 강행시 강정마을 주민들의 흐릴 피눈물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MB 정부의 정치적 꼼수
MB 정부가 대통령부터 경찰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제주해군지 반대 진영과 야권을 압박하고 나선 데에는 총선과 대선을 앞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은 2월 22일 기자회견에서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 이해찬 전 총리, 유시민 통합진보당 공동 대표의 입장 변화에 대해 “선거철이 돼 전략적으로 할 수 있지만 매우 안타깝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야당 인사들의 실명과 발언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정치적 공세를 편 것 자체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수구․보수 언론들이 이를 견인하고 또 확대재생산 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필자가 해석하는 MB 정부와 보수 세력의 정치적 의도는 이렇다. 만약 야권이 강력한 맞대응을 선택해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한다면, ‘말 바꾸기’, ‘국가안보 무시’로 몰아붙이면서 이를 선거 쟁점으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거꾸로 야권이 이렇다 할 대응을 안 하면, 해군기지 반대 진영의 반발로 이어져 총선과 대선을 앞둔 야권에게는 적지 않은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MB 정부가 노무현 정부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민군복합 관광 미항”이 자신의 성과인 것처럼 홍보하는 모습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총리실은 “2007년 지난 정부에서 지역주민 및 제주도의 건의를 받아들여 해군기지로 추진되어 오던 중, 현 정부 들어 2008년 9월 제주해군기지를 민과 군이 함께 공존하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으로 건설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눈 가리고 아옹 하는 격’이다.
노무현 정부 재임 당시인 2007년에 국회는 관련 예산을 승인하면서 “민항 위주에 해군 기항지”라는 부대조건을 달았다. 그런데 MB 정부는 이 조건마저 무시하고 ‘민군복합 관광 미항’이라는 이름하에 사실상의 해군기지 건설로 사업을 변질시켰다. 설계 오류 문제가 제기되자 15만톤 규모의 크루즈 선박의 입출항에 별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큰 배가 올 리도 없다는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유시민 대표의 대응도 답답하다. 이들은 MB 정부의 공사 공행을 강력히 비판하면서도 노무현 정부 때 결정되었던 제주해군기지 사업을 왜 지금은 반대하는지,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 이 정부 들어 제주해군기지 사업이 더더욱 변질되고 사회적 비용도 엄청나게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노무현 정부도 이러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 사정이 이렇다면 민주통합당은 자신의 입장 변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는 것이 국민들에 대한 도리일 것이다.

2012년 3월 1일 목요일

고삐풀린 원자력 신화, 그 오만의 대가는…


이글은 프레시안 2012-03-01일 기사 '고삐풀린 원자력 신화, 그 오만의 대가는…'을 퍼왔습니다.
[정욱식의 '핵과 인간'] 원전을 향한 질주

핵은 무기로부터 시작됐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즈음에 그 과학적 원리가 입증되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된 직후 전쟁이 끝났다. 가공할 폭발력을 선보인 핵은 이후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항공모함과 잠수함의 추진력으로 핵을 이용해 대서양과 태평양의 강자로 우뚝 섰고, 이후 소련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도 뒤따랐다. 이들 무기에 추진력으로 사용된 핵 발전은 가압경수로(PWR)였는데, 이후 PWR는 대표적인 핵 발전소의 모델이 된다.

'이 무시무시한 무기를 에너지로 쓸 수 있다면?' 많은 과학자들과 정부들은 이 질문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은 원자력을 "세계 번영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기대를 품고 핵을 에너지로 사용하기 위한 움직임은 1950년대 들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핵을 "기적의 힘"이라고 부르면서 대단히 저렴하고 고갈될 걱정도 없는 에너지원 개발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태양의 일부를 지구에 갖다 놓은 것처럼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핵을 무기로 사용하면 인류 절멸의 무기가 될 수 있지만, 에너지로 사용하면 인류 문명의 신기원을 열 수 있다는 기대감도 높아졌다.

이러한 기대감을 반영하듯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12월 8일 유엔 총회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Peace)'를 발표했다. 그는 말했다. "핵의 시대는 지구촌의 모든 사람이 우려해야 할 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략) 미국은 여러분과 전 세계 앞에 가공할 만한 핵의 딜레마를 해결할 것을 약속합니다. 인간의 경의적인 발명품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기여할 수 있도록 모든 열정과 정성을 다해 노력할 것입니다." 당시 원자력에 대한 환상은 미국 원자력위원회 의장이었던 루이스 스트라우스(Lewis Strauss)가 원전은 "너무 저렴해서 측정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났다. 이러한 환상은 1955년 12월 31일자 일본의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자력을 잠재 전력으로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다. 게다가 석탄 등의 자원이 지구상에서 차차 없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에너지가 갖는 위력은 인류 생존에 불가결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중략) 전기료는 2,000분의 1이면 된다. (중략) 원자력발전에는 화력발전처럼 큰 공장이 필요 없다. 큰 연돌이나 저탄장도 필요 없다. 매일 석탄을 운반하고 재를 버리기 위한 철도나 트럭도 필요 없다. 밀폐식 가스터빈을 이용할 수 있으면 보일러의 물조차 필요 없다. 물론 산간벽지를 선택할 필요도 없다. 빌딩의 지하실이 (핵) 발전소가 될 수도 있다."

'핵무기는 통제하고 원전은 확대하라!'

'신의 불'이라고 불리던 핵을 가장 먼저 손에 넣은 미국은 자신의 핵무기 독점은 유지하면서 핵의 "평화적 이용" 방안 마련에 몰두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 11월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고 평화적 목적의 핵 이용은 철저한 국제 검증 아래에 두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유엔 원자력위원회(UN Atomic Energy Commission)를 만들어 국제적 핵통제 체제를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이듬해 미국 정부는 더욱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새로운 핵무기와 핵분열 물질 생산 금지, 우라늄 광산 통제, 핵연료 주기에 대한 국제적 통제와 엄격한 검증 체제 구축, 완전한 핵무기 폐기, 국제 원자력 개발 기구(International Atomic Development Authority)를 창설 등을 담은 '바루크 플랜'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당시 핵 독점의 지위를 누렸던 미국은 진정성이 결여된 말잔치에 불과했다. 미국이 유일한 핵보유국이었던 만큼, 국제 핵통제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핵무기 폐기를 약속하고 실천해야 했지만, 이를 거부한 것이다.

뒤이어 집권한 아이젠하워는 에너지로도 가공할 무기로도 이용될 수 있는 '핵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국제 원자력 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늘리면서 핵보유국들은 핵무기 보유고를 줄이기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젠하워의 제안은 바루크 플랜과는 사뭇 다른 방향이었다. 바루크 플랜이 핵무기의 완전 폐기를 제안한 반면,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에서는 감축과 통제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우라늄 은행'으로 제안된 IAEA의성격도 변질되었다. IAEA의 당초 기능은 공평하게 우라늄을 모아 이것을 다시 분배하는 것이었는데, 소련이 우라늄 납부를 거부하고 미국 의회가 핵 물질 및 기술 분배의 독점적 권한을 주장하면서 무산되었다. 이렇듯 국제적 핵 통제 구축이 난항을 겪고 있는 사이에 미국, 소련, 영국 등 핵보유국들이 다른 여러 나라들과 양자 협정을 체결해 원자로를 비롯한 핵시설과 핵기술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아이젠하워의 구상은 이후 지지와 비판을 함께 수반하게 된다. 옹호자들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 없었더라도 핵확산은 불가피했고, 이 구상을 통해 그나마 그 속도와 범위를 줄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아이젠하워의 제안에 힘입어 1956년 IAEA가 공식적으로 창립돼 국제적 핵 통제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지적한다. 반면 비판론자들은 아이젠하워의 정책은 미국 원자력 산업계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었고, 오히려 핵확산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반박한다. 소련, 영국, 프랑스 등이 이미 원자력 기술을 갖춘 상태여서 앞으로 미국의 시장 점유율이 줄어들 수 있으므로 미국이 선수를 쳐야 한다는 '이윤 논리'가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이 돈을 벌기 위해 핵 기술을 다른 나라들에게 판매함으로써 인도, 이스라엘, 브라질, 아르헨티나가 미국의 원자력 수출에 힘입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거나 그 문턱에 도달했다고 지적한다.

NPT와 IAEA의 '생얼'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의 근본 취지는 핵이 인류 문명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평화적 이용은 증진하는 대신에, 인류 문명의 파괴를 가져올 수 있는 핵무기의 확산은 방지하자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의도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취지와 맥락을 같이한다. '평화를 위한 원자력'은 몇 가지 중대한 문제를 드러냈다. 첫째, 세계 최대 핵보유국인 미국 스스로가 핵무기 보유를 전제로 이 구상을 추진한 탓에 국제 사회의 광범위한 지지와 참여를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둘째, 미국의 실질적 행보는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과 거리가 멀었다. 그가 백악관에 들어갈 때 1,400개였던 미국의 핵무기는 그가 백악관을 떠날 때는 2만개까지 증가해 있었다. 셋째, 미국은 핵 기술과 물질이 군사용으로 전용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핵 국가에 대한 원자력 수출에 적극적이었다. 훗날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거나 개발에 성공한 많은 나라들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원자력을 수입한 나라들이 대부분인데, 여기에는 비밀 핵개발에 성공한 남아프리카 공화국뿐만 아니라 오늘날 미국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이란도 포함되어 있다. 끝으로 스리마일 섬과 체르노빌, 그리고 후쿠시마로 이어진 원전 사고가 입증해준 것처럼, 핵 '발전' 역시 핵 '무기' 못지 않게 인류 생존과 지구 환경을 위협하고 있다. '평화를 위한 원자력'은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는 형용모순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이젠하워의 제안에 힘입어 1956년에 창설된 IAEA에 대한 비판론도 거세지고 있다. 이 기구는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증진하는 대신에, 핵기술이 군사적 용도로 전용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그 결과 1961년에는 최초로 안전조치협정을 만들었고, 1967년에는 기존의 내용을 강화한 새로운 안전조치협정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1970년 NPT가 탄생하면서 IAEA는 비핵 국가의 의무를 검증하는 유엔 기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런데 설립 취지에 "원자력 에너지의 공헌을 진전시키고 확대한다"고 명시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IAEA가 원전 확대를 존재 이유로 삼다보니 '국제 원전 마피아'라는 오명을 자초하고 있다. IAEA의 홍보부장을 지낸 요시다 야스히코의 말이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목으로 각국으로부터 온, 원자력 산업 대리인들이 업계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만 활동한다. 국제기구라고 하면 뭔가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만, 실태를 냉정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IAEA의 횡포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또 다른 유엔 기구인 세계보건기구(WHO)와의 관계이다. WHO는 1956년까지는 "원자력 산업과 방사능원의 증대에 의해 미래 세대가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했었다. 그런데 1959년 WHO는 IAEA와 맺은 협약을 맺고는 IAEA의 방사능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 IAEA 입장이 다른 것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핵 강대국들이 유엔을 장악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이에 따라 WHO는 IAEA의 하수인으로 전락했고, 이러한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IAEA와 WHO의 협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IAEA의 횡포는 체르노빌 사태에 대한 평가에서 또 다시 입증된다. IAEA는 2006년 체르노빌 사고에 관한 국제회의를 개최하면서 이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가 약 4000명이라고 발표했다. 반론은 즉각 구소련에서 원전 설계에 관여했던 과학자들을 통해 나왔다. 이들은 IAEA의 평가가 ▲영어 이외의 슬라브어로 된 1차 차례를 이용하지 않았고 ▲방사성 물질 43%가 배출된 지역을 조사 대상에서 제외했으며 ▲의도적으로 방사선 농도의 수치를 과소 평가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는 98만5천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NPT를 살펴보자. 1968년부터 서명에 들어가 1970년 3월에 발효된 NPT는 핵무기 확산을 예방하고 궁극적으로 완전한 핵무기 폐기의 달성을 목표로 하는 대표적인 국제 군축 조약이다. NPT가 발효될 당시에는 회원국이 43개국에 불과했으나 점차 늘어나 2012년 2월 현재 189개국으로 늘어났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은 NPT에 줄곧 비회원국으로 남아 있으면서 핵무기를 개발‧보유하고 있으며, 북한도 이들 나라의 길을 걷고 있다. 이들 네 나라가 NPT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핵무기를 폐기하거나 핵무기 폐기를 약속하고 IAEA의 감시와 사찰에 동의해야 한다.

NPT는 '세 개의 기둥'으로 이뤄져 있다. 비핵 국가와 핵보유국 사이의 균형된 의무로서 '비확산(non-proliferation)'과 '핵군축(disarmament)'을 함께 요구하는 한편, 회원국의 '평화적 핵이용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비확산'은 비핵 국가들이 평화적 핵이용 권리는 보장받는 대신에 이를 핵무기 개발로 전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고, '핵군축'은 핵보유국의 핵무기 폐기 의무를 의미한다. 그러나 NPT는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확산'에 초점을 맞춘 조약이다. 또한 생물무기금지협약, 화학무기금지협약, 대인지뢰금지협약, 집속탄금지협약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 군축 조약은 해당 무기의 사용 및 실험 금지와 폐기를 명시한다. 반면 NPT는 핵보유국의 핵무기 사용 금지는 물론이고 추가적인 핵무기 제조 금지와 핵폐기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NPT는 1967년 1월 1일 이전에 핵실험을 했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미국, 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의 핵무기 보유는 인정하면서 핵폐기 의무를 '선의(good faith)'에 맡겼다. 반면 다른 회원국들의 핵무기 개발은 금지하고 IAEA를 통해 이를 검증하는 대신에 평화적 핵이용을 보장하고 있다.

NPT는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189 대 4'(회원국 대 비회원국)라는 스코어가 보여주듯, NPT는 군비 통제 조약 가운데 가장 많은 회원국이 참여하고 있다. 또한 '184 대 9'(비핵 국가 대 핵보유국)라는 숫자는 NPT 등장 이전에 우려되었던 핵확산이 이 조약 발효 이후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비확산 분야의 베테랑 외교관이었던 조지 번George Bunn은 "NPT가 없었다면, 오늘날 9개국이 아니라 30~40개국이 핵무기를 보유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NPT가 핵 비확산이라는 국제 규범을 확고히 함으로써 비핵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 동기를 크게 위축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핵 국가들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한 것은 NPT 때문이 아니라 독자적인 정치적‧안보적‧경제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NPT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고 그 의무의 이행도 차별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불평등 조약'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그리고 아래의 표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NPT는 5대 핵보유국의 핵군축에 이렇다 할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미국 쓰리마일 원자력 발전소

핵은 무기로부터 시작됐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즈음에 그 과학적 원리가 입증되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된 직후 전쟁이 끝났다. 가공할 폭발력을 선보인 핵은 이후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항공모함과 잠수함의 추진력으로 핵을 이용해 대서양과 태평양의 강자로 우뚝 섰고, 이후 소련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도 뒤따랐다. 이들 무기에 추진력으로 사용된 핵 발전은 가압경수로(PWR)였는데, 이후 PWR는 대표적인 핵 발전소의 모델이 된다.

'이 무시무시한 무기를 에너지로 쓸 수 있다면?' 많은 과학자들과 정부들은 이 질문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은 원자력을 "세계 번영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기대를 품고 핵을 에너지로 사용하기 위한 움직임은 1950년대 들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핵을 "기적의 힘"이라고 부르면서 대단히 저렴하고 고갈될 걱정도 없는 에너지원 개발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태양의 일부를 지구에 갖다 놓은 것처럼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핵을 무기로 사용하면 인류 절멸의 무기가 될 수 있지만, 에너지로 사용하면 인류 문명의 신기원을 열 수 있다는 기대감도 높아졌다.

이러한 기대감을 반영하듯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12월 8일 유엔 총회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Peace)'를 발표했다. 그는 말했다. "핵의 시대는 지구촌의 모든 사람이 우려해야 할 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중략) 미국은 여러분과 전 세계 앞에 가공할 만한 핵의 딜레마를 해결할 것을 약속합니다. 인간의 경의적인 발명품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기여할 수 있도록 모든 열정과 정성을 다해 노력할 것입니다." 당시 원자력에 대한 환상은 미국 원자력위원회 의장이었던 루이스 스트라우스(Lewis Strauss)가 원전은 "너무 저렴해서 측정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났다. 이러한 환상은 1955년 12월 31일자 일본의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자력을 잠재 전력으로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다. 게다가 석탄 등의 자원이 지구상에서 차차 없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에너지가 갖는 위력은 인류 생존에 불가결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중략) 전기료는 2,000분의 1이면 된다. (중략) 원자력발전에는 화력발전처럼 큰 공장이 필요 없다. 큰 연돌이나 저탄장도 필요 없다. 매일 석탄을 운반하고 재를 버리기 위한 철도나 트럭도 필요 없다. 밀폐식 가스터빈을 이용할 수 있으면 보일러의 물조차 필요 없다. 물론 산간벽지를 선택할 필요도 없다. 빌딩의 지하실이 (핵) 발전소가 될 수도 있다."

'핵무기는 통제하고 원전은 확대하라!'

'신의 불'이라고 불리던 핵을 가장 먼저 손에 넣은 미국은 자신의 핵무기 독점은 유지하면서 핵의 "평화적 이용" 방안 마련에 몰두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 11월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고 평화적 목적의 핵 이용은 철저한 국제 검증 아래에 두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유엔 원자력위원회(UN Atomic Energy Commission)를 만들어 국제적 핵통제 체제를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이듬해 미국 정부는 더욱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새로운 핵무기와 핵분열 물질 생산 금지, 우라늄 광산 통제, 핵연료 주기에 대한 국제적 통제와 엄격한 검증 체제 구축, 완전한 핵무기 폐기, 국제 원자력 개발 기구(International Atomic Development Authority)를 창설 등을 담은 '바루크 플랜'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당시 핵 독점의 지위를 누렸던 미국은 진정성이 결여된 말잔치에 불과했다. 미국이 유일한 핵보유국이었던 만큼, 국제 핵통제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핵무기 폐기를 약속하고 실천해야 했지만, 이를 거부한 것이다.

뒤이어 집권한 아이젠하워는 에너지로도 가공할 무기로도 이용될 수 있는 '핵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국제 원자력 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늘리면서 핵보유국들은 핵무기 보유고를 줄이기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젠하워의 제안은 바루크 플랜과는 사뭇 다른 방향이었다. 바루크 플랜이 핵무기의 완전 폐기를 제안한 반면,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에서는 감축과 통제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우라늄 은행'으로 제안된 IAEA의성격도 변질되었다. IAEA의 당초 기능은 공평하게 우라늄을 모아 이것을 다시 분배하는 것이었는데, 소련이 우라늄 납부를 거부하고 미국 의회가 핵 물질 및 기술 분배의 독점적 권한을 주장하면서 무산되었다. 이렇듯 국제적 핵 통제 구축이 난항을 겪고 있는 사이에 미국, 소련, 영국 등 핵보유국들이 다른 여러 나라들과 양자 협정을 체결해 원자로를 비롯한 핵시설과 핵기술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아이젠하워의 구상은 이후 지지와 비판을 함께 수반하게 된다. 옹호자들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 없었더라도 핵확산은 불가피했고, 이 구상을 통해 그나마 그 속도와 범위를 줄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아이젠하워의 제안에 힘입어 1956년 IAEA가 공식적으로 창립돼 국제적 핵 통제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지적한다. 반면 비판론자들은 아이젠하워의 정책은 미국 원자력 산업계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었고, 오히려 핵확산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반박한다. 소련, 영국, 프랑스 등이 이미 원자력 기술을 갖춘 상태여서 앞으로 미국의 시장 점유율이 줄어들 수 있으므로 미국이 선수를 쳐야 한다는 '이윤 논리'가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이 돈을 벌기 위해 핵 기술을 다른 나라들에게 판매함으로써 인도, 이스라엘, 브라질, 아르헨티나가 미국의 원자력 수출에 힘입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거나 그 문턱에 도달했다고 지적한다.

NPT와 IAEA의 '생얼'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의 근본 취지는 핵이 인류 문명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평화적 이용은 증진하는 대신에, 인류 문명의 파괴를 가져올 수 있는 핵무기의 확산은 방지하자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의도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취지와 맥락을 같이한다. '평화를 위한 원자력'은 몇 가지 중대한 문제를 드러냈다. 첫째, 세계 최대 핵보유국인 미국 스스로가 핵무기 보유를 전제로 이 구상을 추진한 탓에 국제 사회의 광범위한 지지와 참여를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둘째, 미국의 실질적 행보는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과 거리가 멀었다. 그가 백악관에 들어갈 때 1,400개였던 미국의 핵무기는 그가 백악관을 떠날 때는 2만개까지 증가해 있었다. 셋째, 미국은 핵 기술과 물질이 군사용으로 전용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핵 국가에 대한 원자력 수출에 적극적이었다. 훗날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거나 개발에 성공한 많은 나라들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원자력을 수입한 나라들이 대부분인데, 여기에는 비밀 핵개발에 성공한 남아프리카 공화국뿐만 아니라 오늘날 미국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이란도 포함되어 있다. 끝으로 스리마일 섬과 체르노빌, 그리고 후쿠시마로 이어진 원전 사고가 입증해준 것처럼, 핵 '발전' 역시 핵 '무기' 못지 않게 인류 생존과 지구 환경을 위협하고 있다. '평화를 위한 원자력'은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는 형용모순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이젠하워의 제안에 힘입어 1956년에 창설된 IAEA에 대한 비판론도 거세지고 있다. 이 기구는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증진하는 대신에, 핵기술이 군사적 용도로 전용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그 결과 1961년에는 최초로 안전조치협정을 만들었고, 1967년에는 기존의 내용을 강화한 새로운 안전조치협정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1970년 NPT가 탄생하면서 IAEA는 비핵 국가의 의무를 검증하는 유엔 기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런데 설립 취지에 "원자력 에너지의 공헌을 진전시키고 확대한다"고 명시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IAEA가 원전 확대를 존재 이유로 삼다보니 '국제 원전 마피아'라는 오명을 자초하고 있다. IAEA의 홍보부장을 지낸 요시다 야스히코의 말이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목으로 각국으로부터 온, 원자력 산업 대리인들이 업계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만 활동한다. 국제기구라고 하면 뭔가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만, 실태를 냉정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IAEA의 횡포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또 다른 유엔 기구인 세계보건기구(WHO)와의 관계이다. WHO는 1956년까지는 "원자력 산업과 방사능원의 증대에 의해 미래 세대가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했었다. 그런데 1959년 WHO는 IAEA와 맺은 협약을 맺고는 IAEA의 방사능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 IAEA 입장이 다른 것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핵 강대국들이 유엔을 장악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이에 따라 WHO는 IAEA의 하수인으로 전락했고, 이러한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IAEA와 WHO의 협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IAEA의 횡포는 체르노빌 사태에 대한 평가에서 또 다시 입증된다. IAEA는 2006년 체르노빌 사고에 관한 국제회의를 개최하면서 이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가 약 4000명이라고 발표했다. 반론은 즉각 구소련에서 원전 설계에 관여했던 과학자들을 통해 나왔다. 이들은 IAEA의 평가가 ▲영어 이외의 슬라브어로 된 1차 차례를 이용하지 않았고 ▲방사성 물질 43%가 배출된 지역을 조사 대상에서 제외했으며 ▲의도적으로 방사선 농도의 수치를 과소 평가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는 98만5천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NPT를 살펴보자. 1968년부터 서명에 들어가 1970년 3월에 발효된 NPT는 핵무기 확산을 예방하고 궁극적으로 완전한 핵무기 폐기의 달성을 목표로 하는 대표적인 국제 군축 조약이다. NPT가 발효될 당시에는 회원국이 43개국에 불과했으나 점차 늘어나 2012년 2월 현재 189개국으로 늘어났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은 NPT에 줄곧 비회원국으로 남아 있으면서 핵무기를 개발‧보유하고 있으며, 북한도 이들 나라의 길을 걷고 있다. 이들 네 나라가 NPT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핵무기를 폐기하거나 핵무기 폐기를 약속하고 IAEA의 감시와 사찰에 동의해야 한다.

NPT는 '세 개의 기둥'으로 이뤄져 있다. 비핵 국가와 핵보유국 사이의 균형된 의무로서 '비확산(non-proliferation)'과 '핵군축(disarmament)'을 함께 요구하는 한편, 회원국의 '평화적 핵이용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비확산'은 비핵 국가들이 평화적 핵이용 권리는 보장받는 대신에 이를 핵무기 개발로 전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고, '핵군축'은 핵보유국의 핵무기 폐기 의무를 의미한다. 그러나 NPT는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확산'에 초점을 맞춘 조약이다. 또한 생물무기금지협약, 화학무기금지협약, 대인지뢰금지협약, 집속탄금지협약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 군축 조약은 해당 무기의 사용 및 실험 금지와 폐기를 명시한다. 반면 NPT는 핵보유국의 핵무기 사용 금지는 물론이고 추가적인 핵무기 제조 금지와 핵폐기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NPT는 1967년 1월 1일 이전에 핵실험을 했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미국, 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의 핵무기 보유는 인정하면서 핵폐기 의무를 '선의(good faith)'에 맡겼다. 반면 다른 회원국들의 핵무기 개발은 금지하고 IAEA를 통해 이를 검증하는 대신에 평화적 핵이용을 보장하고 있다.

NPT는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189 대 4'(회원국 대 비회원국)라는 스코어가 보여주듯, NPT는 군비 통제 조약 가운데 가장 많은 회원국이 참여하고 있다. 또한 '184 대 9'(비핵 국가 대 핵보유국)라는 숫자는 NPT 등장 이전에 우려되었던 핵확산이 이 조약 발효 이후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비확산 분야의 베테랑 외교관이었던 조지 번George Bunn은 "NPT가 없었다면, 오늘날 9개국이 아니라 30~40개국이 핵무기를 보유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NPT가 핵 비확산이라는 국제 규범을 확고히 함으로써 비핵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 동기를 크게 위축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핵 국가들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한 것은 NPT 때문이 아니라 독자적인 정치적‧안보적‧경제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NPT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고 그 의무의 이행도 차별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불평등 조약'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그리고 아래의 표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NPT는 5대 핵보유국의 핵군축에 이렇다 할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12년 1월 27일 금요일

조지 오웰의 경고, 핵을 가진 두세 개의 괴물과 냉전


이글은 프레시안 2012-01-27일자 기사 '조지 오웰의 경고, 핵을 가진 두세 개의 괴물과 냉전'을 퍼왔습니다.
[정욱식의 '핵과 인간'] 미국 핵 독점의 종말과 '슈퍼 폭탄'의 등장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두 달 후에 쓴 칼럼에서 소련이 수년 내에 핵무기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며, "우리는 몇 초 만에 수백만의 사람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무기를 보유한 두세 개의 괴물과 같은 슈퍼파워 국가들이 세계를 분단시키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대규모의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줄어들겠지만, 영원히 '평화가 없는 평화'의 상태, 즉 '냉전(cold war)'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후 인류의 역사는 그의 경고대로 진행되고 만다.


▲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백악관 앞에서 열광하는 미국 시민들. ⓒ트루먼 도서관

앞선 글에서 자세히 살펴본 것처럼, 미국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소련을 상대로 한 무력시위의 성격이 강했다. 원폭 투하를 통해 미국이 노렸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소련의 참전 이전에 미국의 힘에 의해 일본을 패망시키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미 싹트고 있던 냉전 질서에서 소련에 대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무력시위'의 성격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런데 애초에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요구한 당사자는 미국이었다.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미영 연합군은 소련의 개입이 태평양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보고, 소련에게 참전에 따른 '전리품'을 제시했었다. 소련에게 쿠릴 섬 및 사할린 섬 남단 이양 및 만주 해군기지 사용 허용 등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로 획득한 것을 소련에게 돌려주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독일이 패망하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탈린은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 이러한 약속을 거듭 확인하면서 "나치 독일의 패망 3개월 후에 대일전에 참전하겠다"라고 재확인했고, 포츠담 회담에서는 8월 15일이라는 구체적인 일정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은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서 계산을 달리 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소련의 참전에 의한 일본의 항복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키워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는데, 핵무기로 소련의 개입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원폭 투하는 소련의 지원 없이 일제를 패망시키고자 하는 동기와 함께 경쟁자로 부상한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의 성격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 이는 반대의 해석도 가능케 한다. 트루먼이 밝힌 것처럼, 소련의 대일본 선전포고는 8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정보다 6일이 빠른 8월 9일 참전을 단행했다. 아마도 스탈린의 머릿속에도 '미국이 전쟁을 끝나기 전에 우리도 서둘러 참전해야 한다'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스탈린 "히로시마가 세계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미국의 핵무기 및 원폭 투하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스탈린은 1940년대 초반부터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미국이 포츠담 회담에서 '핵 외교'를 선보이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기 이전까지 심혈을 기울이진 않았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한 작은 대비책"으로 간주하는 수준이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이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는 것을 정탐 활동과 일부 과학자들의 '자진 보고'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스탈린이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트루먼의 통보를 듣고 그리 놀라지 않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미국이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한 것에는 상당히 놀랐던 것으로 보인다. 히로시마 피폭 직후 스탈린은 "히로시마가 세계를 뒤흔들었다. 균형은 깨졌다. 핵폭탄을 만들어라. 그것은 우리로부터 거대한 위험을 제거해줄 것이다"라며, 소련 과학자들에게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미국의 핵 사용을 소련의 양보를 강제하기 위한 협박 외교로 규정하고, "우리가 협박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트루먼의 무력시위는 노련한 독재자 스탈린을 위축시키기보다 핵무기를 개발해 미국에 맞서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핵 독점은 2차 대전 말엽은 물론이고 종전 이후에도 "미국의 외교정책을 혁명화"시켰다. 대표적으로 "핵무기가 없었다면 미국 대통령이 결코 생각하기 힘든 정책, 즉 독일의 재건과 재무장을 선택하게 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독일의 재건 및 재무장에 따른 유럽 국가들의 두려움은 미국의 핵 억제로 차단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트루먼 대통령과 번스 국무장관은 1945년 8월 22일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독일의 위협이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며, "원자 폭탄은 도발을 일으키려는 나라들을 중지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미국의 양보가 불가피한 소련과의 협력도, 독일 재무장을 두려워하는 소련의 우려도 크게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핵의 위력을 믿은 미국의 대담한 행보가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독일 문제를 비롯한 소련과의 외교 협상에서 핵무기를 강압 외교의 수단으로 동원했다. 미국은 핵무기의 위력을 스탈린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원폭을 당한 히로시마에 소련 관료를 초청하기도 했고, 태평양에서 실시한 핵실험에 소련 관료를 참관시켰다. 또한 번스가 소련의 몰로토프 외무장관을 만나 독일 문제를 두고 담판을 벌이고 있었던 1946년 6월에는 태평양 비키니섬에서 대규모의 핵실험을 실시해 소련의 강한 반발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련이 그토록 거부했던 독일 재건에도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미국의 두 가지 카드, 즉 핵 시위와 독일 재건은 소련으로 하여금 미국이 전쟁을준비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강하게 갖게 했다. 당시 소련의 위협 인식은 소련 해체 이후 해제된 비밀문서에서 잘 나타난다. 1946년 주미 소련대사인 노비코프(Nikolai Novikov)는 미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 근거로 해외 해공군 기지 건설, 원자폭탄 등 신형무기의 증강, 독일의 재건 및 재무장 추진 등을 제시했다. 특히 "미국은 독일에서의 연합국의 임무, 즉 무장해제와 민주화를 달성하기 이전에 임무를 종식시키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데, 이는 독일 제국주의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고, 미국은 재무장한 독일을 자기편으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미국의 의도에 강한 의혹을 품으면서 "앵글로-색슨의 침공"을 막기 위해 강력한 대응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의 불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구상을 밀어붙였다. 소련의 강력한 반발을 뒤로 하고 유럽경제부흥계획인 '마셜 플랜'을 단행했다. 또한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와 이듬해 베를린 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은 핵무기 보유고를 크게 늘려 1949년에는 그 수를 200개로 늘렸다. 핵 능력 강화와 유럽경제부흥계획을 통해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아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을 침공 준비로 간주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유력한 대응책으로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주목할 점은 핵의 위력을 앞세운 미국의 강경 외교에 '핵 강압 외교'의 주역이었던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이 일찍이 강한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그는 1945년 9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소련과의 신뢰구축을 위해서는 미국의 핵 계획을 소련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그는 편지와 함께 동봉한 메모를 통해 그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미국의 원자 폭탄 보유는) 대륙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상쇄할 수 있는 중요한 무기로 간주되어왔습니다. 우리는 또한 소련 정부가 이러한 경향을 간파하고 있고, 가능한 최단시간 내에 이 무기를 획득하려는 소련의 정치ㆍ군사 지도자들의 유혹도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이 핵 독점을 통해 소련에 맞서는 앵글로-색슨 진영을 구축하면 "매우 절망적인 방식으로 비밀 군비경쟁이 야기"되고, "우리의 목적과 의도에 대한 소련의 의심과 불신은 증가될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추가적인 핵무기 개발과 생산을 중단하고, 소련 및 영국과 핵 기술 협력 및 통제를 놓고 협상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그의 충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련의 핵실험과 미국의 대응

결국 미국의 핵 독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카자흐스탄 사막 '세미팔라틴스크-21'에서 핵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 나가사키에 투하한 플루토늄 핵폭탄 '뚱보(Fat man)'와 흡사한 것으로써, 소련이 1950년대 중반에 가서야 핵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는 미국의 판단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1948년과 1949년 정보분석 보고서를 통해 소련의 핵무기 개발 성공 시점을 "1953년 중반기를 가장 가능성이 높은 때"라고 분석했다. 핵실험에 성공한 스탈린은 이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로 붙이고 싶어했다. 자극받은 미국이 대대적인 군비증강에 나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첨단 장비는 소련의 핵실험 사실을 포착했고, 트루먼은 9월 23일 이를 공식 발표했다. 미국은 소련의 핵무기를 스탈린의 이름을 따 'JOE-1'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미국은 대대적인 군비증강 계획에 착수하고 되는데, 당시 '슈퍼 폭탄'으로 불렸던 수소 폭탄 개발과 NSC-68는 이를 대표한다. 스탈린이 피하고 싶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만 것이다.


▲ 소련의 최초 핵실험 장면. ⓒ미국 에너지부

예상보다 빨리 실시된 소련의 핵실험에 당황한 트루먼 행정부는 세 가지 조치를 단행했다. 첫째는 유럽에서 소련의 재래식 군사력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영구적인 미군 주둔 및 재래식 군비증강이었다. 이는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폭등한 군사비를 줄이고 군부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자 했던 트루먼의 의도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둘째는 소련에 대한 핵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원자폭탄의 양과 질을 크게 늘리는 것이었다. 이미 트루먼 행정부는 원자폭탄 증강을 통해 재래식 군사력 감축을 상쇄할 생각이었는데, 소련의 핵실험 성공 소식은 원자폭탄 증강 열기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셋째는 당시 '슈퍼 폭탄'으로 불렸던 수소폭탄 개발 승인이었다. 트루먼은 1950년 1월 31일자 성명을 통해, "우리나라를 잠재적인 도발자로부터 방어하는 것은 최고 군통수권자의 의무"라며, "나는 원자력위원회에 수소 폭탄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핵무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수소 폭탄의 개발 방침은 핵의 역사에서 두 가지 심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수소 폭탄의 파괴력이 원자 폭탄의 수십배에 달해 단 한발의 폭탄으로도 대도시나 작은 나라를 완전히 날려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가공할 파괴력에 놀란 많은 사람들이 반핵주의자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대소 봉쇄 정책의 설계자인 조지 캐넌과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이들을 비롯한 많은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 과학자들은 "수소 폭탄의 사용은 원자 폭탄을 훨씬 능가하는 대량 살상을 가져올 것"이라며, 설사 소련이 이 무기를 손에 쥔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원자 폭탄으로 소련을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현재와 같은 군사 기술 수준에서 (핵)무장을 통해 안보를 달성하겠다는 것은 파멸적인 환상"이라며, "미-소 간의 군비 경쟁은 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소련의 핵실험 성공에 충격을 받은 트루먼 행정부는 '슈퍼 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소련보다 핵전력이 앞서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미국이 주저하는 사이에 소련이 먼저 수소 폭탄을 개발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팽배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1952년 11월 1일에 태평양에서 수소 폭탄 실험을 강행했다. 폭발 규모는 원자 폭탄 실험이었던 '트리니티'보다 500배 강력한 10메가톤을 넘어섰다. 소련 역시 그 이듬해인 1953년 8월 12일에 중앙아시아 사막에서 수소 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이처럼 미국과 소련은 조지 오웰인 말한 "두 개의 괴물"이 되어갔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1954년 3월 1일에 태평양 비키니 섬에서 실시된 미국의 수소 폭탄 실험은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낳았다. 폭발 규모가 무려 15메가톤에 달해,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탄보다 750배, 미국 정부가 예상했던 것보다 2.5배나 강력했던 것이다. 또한 직경 6,500피트, 깊이 250피트의 거대한 분화구가 생겨났으며, 버섯구름은 1분 후 직경 15킬로미터, 8분 후에는 100킬로미터까지 커졌고 높이도 무려 16.5킬로미터에 달했다. 더구나 방사능 낙진이 140여킬로미텉까지 날아가 조업 중이던 일본인 어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세계 곳곳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고 이상 기후가 나타났다.


▲ 1954년 3월에 실시된 미국의 수소 폭탄 실험 브라보

가공한 폭발력 앞에 인류 사회는 전율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핵무기를 다른 무기와 특별히 다르게 봐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던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까지 핵무기 옹호자였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역시 이 실험을 목도하고는 핵전쟁이 일어나면 영국은 더 이상 살 수 없는 땅에 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무엇보다도 수소 폭탄 실험 '브라보(Bravo)'는 반핵 운동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미국의 저명한 반핵단체인 분별있는 핵정책을 위한 전국위원회(National Committee for a Sane Nuclear Policy)와 비폭력행동위원회(Committee for Non-Violent Action) 등과 영국의 핵폐기캠페인(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그리고 초국적 단체인 퍼그워시(Pugwash) 등 저명한 반핵단체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대규모 반핵 집회 개최, 신문광고, 시민 불복종 운동 및 핵무기 시설 침투와 핵실험 지역에서의 해상 시위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반핵 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반핵 운동은 언론을 통해 전세계에 타진되었다. 그러자 핵무기 사용에 대한 미국 여론도 바뀌기 시작했는데, 1950년대 중반에는 선제 핵사용에 대한 반대 여론이 과반수를 넘어서기도 했다.

이처럼 원자 폭탄보다 파괴력이 훨씬 큰 수소 폭탄은 '핵분열' 반응을 이용하는 원자 폭탄과 달리 '핵융합' 반응을 이용하는 무기다. 수소 폭탄의 핵융합 반응은 원자 폭탄의 핵분열 반응에 비해 단위당 방출 에너지 양이 10퍼센트 정도로 작지만,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의 질량이 핵분열 물질의 2퍼센트밖에 안 되기 때문에 핵물질당 방출 에너지의 양은 원자 폭탄보다 4배 이상 많다. 예를 들어 10킬로그램의 핵물질이 포함된 수소 폭탄은 같은 질량의 원자 폭탄보다 파괴력이 42배 강하다. 그래서 "핵분열 폭탄은 태양 표면에 해당하는 온도를 만들어내는 반면에, 핵융합 폭탄은 태양의 일부를 지구에 갖다 놓은 것과 같은 엄청난 온도를 발산한다."

한편 소련이 미국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 내에서는 '매카시즘'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련의 최초 핵무기는 미국의 예상보다 5년 정도 빨리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플루토늄 핵폭탄인 '가제트' 및 '뚱보'와도 흡사했다. 소련 핵실험 5개월 후에는 소련 스파이의 핵심인물인 클라우스 푹스(Klaus Fucks)가 미 정보기관에 체포되었다. 그는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물리학자였는데, 1944년부터 로스앨라모스 연구소에 파견 근무하면서 핵심 정보를 소련 측에 넘겼다. 이 사건 직후에도 국무부 고위관료인 앨저 히스 간첩 논란 및 로젠버그 부부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미국 내 소련 스파이가 소련의 핵개발을 도왔다"는 심증은 확신을 갖게 됐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의 핵실험에 이어 10월 1일에는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미국 내 '적재 공포'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소련의 핵실험 성공이 미국 핵 독점체제를 무너뜨렸다면, 중국의 공산화 성공은 오랜 기간 미국의 동맹국으로 인식되었던 중국이 공산국가로 변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미국의 충격도 컸다. 특히 1950년 1월 들어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유엔 가입 문제로 미국과 소련이 날카로운 대립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 해 2월에 중소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이를 틈타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인 매카시(Joseph McCarthy)는 1950년 2월 9일 "나에게 국무부에서 일하는 205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이 있다. 그런데 국무장관은 이들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계속 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무명에 가까웠던 매카시는 이 폭탄 발언 한방으로 일약 저명한 정치인으로 올라섰다. 그가 경고한 '적색 공포'를 실증하듯 4개월 후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매카시즘은 미국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대외정책의 급격한 우경화를 야기했다. 국제정세가 급변하던 시기를 틈타 몰아치기 시작한 매카시즘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이 신속한 개입을 선택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에 신속한 개입을 선택함으로써 안보와 공산주의에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 주요 참고문헌

George Orwell, "You and the Atomic Bomb," Tribune, 19 October 1945.Joseph Cirincione, Bomb Scare: The History & Future of Nuclear Weapons, (ColumbiaUniversity Press, 2007)Nina Tannenwald, "Stigmatizing the Bomb: Origins of the Nuclear Taboo," International Security(Spring, 2005).William Burr, "U.S. Intelligence and the Detection of the First Soviet Nuclear Test, September 1949," September 22, 2009John Lewis Gaddis, The Cold War: A New History,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05).정욱식,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 (책세상, 2010년).카이 버드ㆍ마틴 셔원 지음, 최형섭 옮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사이언스북스, 2010년).트루먼 도서관: http://www.trumanlibrary.org조지워싱턴대 국가안보문서 보관소: http://www.gwu.edu/~nsarchiv/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