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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2일 금요일

체르노빌 사람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3-02일자 기사 '체르노빌 사람들'을 퍼왔습니다.
[정욱식의 '핵과 인간'] 원전은 안전한가?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핵 발전소 4호기가 수 차례의 폭발 후 무너져 내렸다. 대재앙을 몰고 온 원전은 출력 100만킬로와트로 소련의 신형 흑연감속로이었다. 1984년 3월부터 가동된 이 원전의 노심에는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2,600개에 달하는 '죽음의 재'가 쌓여 있었다. 사고 결과 5천만 Ci(퀴리)의 방사성 핵종이 방출됐고, 이 가운데 70%가 이 원전과 인접한 벨라루스를 덮쳤다. 마을 485개가 '죽음의 땅'으로 변했고, 이 가운데 70개는 땅속으로 영원히 묻혔다.

시간이 지나면서 죽음의 재는 지구촌 전체로 퍼져갔다. 체르노빌 사고를 그저 먼 나라의 참사 정도로 간주하기에는 방사능은 넓고 지구는 좁았다. 당초 소련은 이 사고를 감추려했지만, 체르노빌 원전에서 1,250킬로미터 떨어진 스웨덴의 포스막 원전에서 4월 29일고농도의 방사능이 검출돼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뒤이어 유럽 전역에서 고농도 방사성 물질에 측정되기 시작했고, 5월 2일 일본, 4일 중국, 5일 인도, 그리고 6일에는 미국과캐나다에서도 방사능이 차례로 검출됐다. 당시 교토대학 원자로연구소에서 방사능 측정을 담당했던 고이데 히로아키의 증언을 들어보자.

"처음에는 이상한 방사능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8,2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데 설마 일본에까지 날아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5월 3일이 되고, 내가 호흡하고 있는 공기중에서 이상 방사능이 발견되었습니다. 방사능이 8,200킬로미터라는 지리를 날아서 일본에 당도한 것입니다. 그때의 오염 수치는 그 후 날이 가며 서서히 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5월 하순이 되자 다시 수치가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상공까지 날아온 오염이 태평양을 넘어서 아메리카대륙을 통과하여 유럽, 아시아를 넘어서 이렇게 지구를 한바퀴 돌아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사고 수습을 위해 약 50만명의 인력과 180억 루블이 투입됐다. 사고 피해가 가장 컸던 벨라루스는 사고 전 암환자가 10만명당 82명이었으나 2002년에는 6천명으로 급증했다. 해체작업에 두입된 노동자들도 하루 2명꼴로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 인한 사망자 수는 추정기관에 따라 4000천명에서 100만명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그 고통은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고 발생 당시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은 미하엘 고르바초프였다. 그는 이 참사를 목도하고는 핵과 인류의 미래는 양립할 수 없다는 신념을 더욱 굳건히 했고,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보다 20여년 앞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주창했다. 이러한 '신사고'는 미-소 냉전을 평화적으로 종식할 수 있었던 결정적 힘이었고, 노벨상 위원회는 1990년 고르바초프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그의 업적을 기렸다. 고르바초프는 원전 사고 발생 및 악화의 큰 원인을 소련의 경직되고 불투명한 관료주의에 있었다고 보고 정치 개혁(glasnost)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한때 미국과 세계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뤘던 소련 몰락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될 정도로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폭발한 원전 4호기의 이름은 '우크리티예'이다. 2000톤의 우라늄과 1톤의 플루토늄을 비롯해 약 200톤의 핵 물질을 품고 있는 이 원전은 사고 직후 거대한 석관으로 봉쇄되었다. 그러나 체르노빌 참사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현재진행형'이다. 석관의 수명은 30년에 불과한 2016년까지이다. 석관 곳곳에 균열이 생겨 지금 이 시간에도 방사능이 새어 나오고 있다고 한다. 또한 빗물이 스며들면서 핵분열 연쇄반응이 일어날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 정부는 국제 사회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강철관 공사에 들어갔다. 높이 150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구조물에는 무려 2만톤의 금속이 사용되고,수조원의 예산이 소요될 예정이다. 2015년 완공을 목표로 지어지고 있는 이 강철관의 수명은 100년이다. 국제사회의 미진한 기부로 공기가 계속 늦춰졌으나, 후쿠시마 참사가 일어나면서 세계 각국은 우크라이나에 7억8천5백만 달러의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 체르노빌 피해자들 ⓒ뉴시스

'체르노빌의 목소리'

우크라이나 출신의 세계적인 저널리스트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역작 에는 '체르노빌레츠(체르노빌 사람들)'의 증언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녀는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 이렇게 썼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체르노빌을 겪어 본 인류는 핵 없는 세상을 향해 갈 것만 같았다. 원자력의 시대를 벗어날 것만 같았다. 다른 길을 찾을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체르노빌의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 "체르노빌의 증인"을 자처한 알렉시예비치는 "사고가 발생한 지 벌써 20년이나 흘렀지만, 내가 증언하는 것이 과거인지, 또는 미래인지" 자신에게 묻고 있다며,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더욱 잔인하고 총체적인 과제가 우리를 기다린다"고 역설한다.

약 20년에 걸쳐 체르노빌레츠를 인터뷰해 내놓은 이 책에 담긴 증언의 일부를 보자. 마을 주민들은 주변의 겉모습은 너무나도 익숙하기만 한데, 그 익숙한 환경이 자신들을 죽일 수 있는 무기가 되어버린 현실에 몸서리쳤다. "낚아 올린 물고기가, 사냥한 들새가,사과가" 말이다. "해도 떴고, 연기도 안 보이고 가스 냄새도 안 나는데……. 총도 안 쏘는구먼. 이게 전쟁이야? 그런데 피난을 가라니……." 사고 발생 직후 소련 정부는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해 주민들을 대비시키고 "흙을 흙으로 묻었으며", 길거리를 배회하는 개와고양이 등 동물들을 죽였다.

체르노빌 사태 직후 소련 정부나 언론은 거의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당연히 주민들은 큰 불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들이 발생했다. "아침에 정원에 나가보니 익숙했던 소리가 들리지 않았소. 왠지 벌이 한 마리도 없었소. (중략) 나중에야 원전에 사고가 났다고 들었는데, 그 원전이 옆에 있던 거였소. 벌들은 알았는데, 우리는 모른 거지." 늙은 양봉가의 말이다. "텔레비전으로 설명을 해주기를 기다렸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얘기해줄 줄 알았어. 그런데 지렁이가, 평범한 지렁이가 땅 깊숙이 들어갔어. 그런데 우리는 모르잖아. 그래서 땅을 파고 또 팠지. 그런데도 지렁이를 한 마리도 못 찾아 고기를 못 잡았지." 어부들의 증언이다.

사랑과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임산부의 사연은 "셰익스피어도, 위대한 단테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됩니다! 입 맞추면 안 됩니다! 만지면 안 됩니다! 이제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방사선 오염 덩어리입니다." 원전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소방대원의 젊은 아내 류드밀라 이그나텐코는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편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고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을 지켰다. 몇 개월 후 이 여인은 나타샤라는 딸을 낳았다. 남편이 죽기 전에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4시간만에 숨졌다. 2년 후 다른 남자를 만난 이그나텐코는 사내 아이를 낳았고 안드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주위의 걱정과는 달리 건강해 보이는 아이였다. 그녀가 말한 "행복한 때"였다. 그러나 모자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엄마는 뇌출혈로 쓰러졌고 아들 역시 한 달에 보름은 의사와 함께 집에서 지낼 정도로 아팠다고 한다.

이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 지 25년 후, 고르바초프는 '핵과학자협회보(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3/4월호 기고문을 통해 '체르노빌을 잊지 말 것'을 호소하고 나섰다. 그는 "체르노빌 사고 25주년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장엄한 임무를 되새기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이정표"라며, "우리 모두 체르노빌을 기억하자. 체르노빌 사태의 부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더 안전하고 보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희망의 횃불로써 되새기자"고 호소했다. 고르바초프는 25년 전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하면서 제2의 체르노빌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예방, 재생 에너지, 투명성, 테러리즘과 폭력에의 취약성 등 4가지문제에 인류사회가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가운데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바로 '재생 에너지'이다. 그는 "우리가 오늘날 핵 에너지를 쉽게 거부할 수는 없지만, 핵 발전이 에너지 공급과 기후 변화에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그는 마치 핵 발전이 '비용 절감형' 에너지인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이는 "과장된 것"이라며, 미국의 예를 들었다. 미국 정부는 1947년부터 1999년까지 원자력 분야에 모두 2천6백억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한 반면에, 풍력과 태양열 발전에는 불과 55억 달러밖에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원자력만큼이나 재생 에너지에 투자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대안적이고 지속가능한 에너지원, 즉 바람, 태양열, 지열, 수소 등에 투자"해,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면서도 깨지기 쉬운 지구를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원전은 안전한가?

체르노빌 참사 25주년이 다가오면서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탈원전'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바로 그 때, 원전 선진국이라고 자부했던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했다. 체르노빌을 과거지사로 묻고 또 다시 원전 르네상스에 심취해 있었던 인류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미국 스리마일 원전 사고는 기술자의 실수로, 체르노빌 참사는 과학자들의 무리한 실험 과정에서, 그리고 후쿠시마 참사는 지진과 쓰나미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지진 8.0 규모에도 끄떡없다던 일본의 자존심은 9.0이라는 수치 앞에 비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또 다시 참사를 거치고서야 인류 사회는 다시 묻기 시작했다. '핵과 인간'은 양립가능하냐고.

우리는 원자력이 깨끗하고 안전하며 저렴한 에너지원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방사능에 피폭되더라도 "기준치 이하는 안전하다"라는 말에도 익숙하다. 화석 연료가 주범으로 일컬어지는 지구 온난화 시대에 원전은 유력한 대안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죽음의 재'로 일컬어지는 방사능 물질이 인체에 들어가면 DNA를 포함한 분자결합을 절단‧파괴‧손상되고 피폭 수준에 따라 그 증상은 빠르게 나타날 수도 있고, 아주 서서히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데 바로 원전은 어마어마한 양의 '죽음의 재'를 만들어낸다. 이는 히로시마 원폭과 비교하면 그 심각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히로시마의 8킬로그램의 우라늄 핵폭탄에서 실제로 연소된 우라늄의 양은 800그램 정도였다. 그런데 100만킬로와트의 현대식 원자로가 1년에 태우는 우라늄의 양은 약 1천킬로그램으로 히로시마 핵폭탄보다 1200배 가량 많다. 당연히 죽음의 재도 이에 비례해서 만들어진다. 이를 세슘-137로 비교해보면, 히로시마 원폭이 뿜어낸 양은 약 3,000Ci였고, 체르노빌 원전사고료 방출된 양은 약 250만Ci, 그리고 100만킬로와트 원전이 1년간 만들어내는 양은 약 300만Ci 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늘날 표준이 된 100만킬로와트급 원전은 원자로 내부에서 300만킬로와트의 열을 만들어내는데 이 중에 전기로 전환되는 양은 100만킬로와트에 불과하고 나머지 200만킬로와트는 바다에 버리는 구조로 운전된다. 원전의 효율이 이렇게 떨어지는 이유는 연료 건전성의 제약에 있는데, 터빈으로 보내는 증기의 온도를 280도 이상 올릴 수 없다. 반면 화력발전소는 500도까지 올릴 수 있어 발전 열효율이 50% 이상이다. 원전은 바닷물을 냉각수로 이용하는데, 100만킬로와트 원전 1기는 초당 바닷물 70톤의 온도를 7도 가량 상승시킨다. 이를 두고 도쿄대의 미토 이와오 교수는 "'원자력발전소'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아. 정확히 말하면 '바다 데우기 장치'야"라고 지적했다. 수온의 급격한 상승은 해양 생태계에 여러 부작용을 동반할 뿐만 아니라, 바닷물의 수온이 상승하면 대기 중으로 뿜어져 나오는 이산화탄소도 늘어나게 된다.

'죽음의 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인류 사회가 안고 있는 최대 숙제이기도 하다. 핵폐기물은 원전 전과정에서 나온다. 우라늄을 채굴‧정련할 때에도, 이를 농축‧가공해 핵 연료봉을 만들 때에도, 원자로를 가동할 때에도 나오고, 무엇보다도 사용후연료봉은 그 자체가 엄청난 방사능 덩어리이다. 죽음의 재 가운데 반감기가 짧은 것으로 알려진 세슘-137은 30년이고, 플루토늄-239는 무려 2만4천년이다. 장갑, 옷, 장비 등 저준위 폐기물의 반감기는 300년이다. 사용후 연료를 일컫는 고준위 폐기물은 무려 1백만년에 달한다.

과학자들은 반감기도 대단히 길고 또 방사능 농도도 대단히 높은 고준위 폐기물, 즉, 사용후연료봉 처리에 골몰해왔다. 우주에 갖다버리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렵고, 해양 처분은 런던 조약에 의해, 남극 깊이 파묻는 것은 남극조약에 의해 금지돼 있다. 그래서 처분 방법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재처리인데,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 재처리를 하더라도 고준위 폐기물은 남는다. 심지층 처분이다. 그런데 원전이 가동된 지 60년이 지났지만, 핵 폐기물의 처리를 확실히 하고 있는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 "인류는 원전이 만들어내는 폐기물의 처분방법도 없이 오늘날까지 와버린" 셈이다.

원자력이 지구 온난화를 늦출 유력한 대안이라는 주장도 검증할 필요가 있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원자력발전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적 에너지로서 지구환경문제를 방지할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관심을 갖고 있는 기후변화협약에도 대비할 수 있습니다"라고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눈 가리고 아옹'하는 격이다. 원자력이 발전할 때에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우라늄 채굴, 제련, 농축 및 가공, 원자로 건설 및 운전, 핵폐기물 처리 과정에서 엄청난 자재와 에너지가 소모되고, 소모되는 자재와 에너지의 상당 부분은 화석 연료에 의존하고 때문이다. 더구나 원전의 원리가 되는 핵분열 반응시 이산화탄소는 배출되지 않지만, 이산화탄소보다 훨씬 위험한 방사성 물질, 즉 죽음의 재를 배출한다.

"기준치 이하라서 안전하다"라는 말도 사람들을 안심시키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다. 여기서 기준치는 IAEA가 정하고 세계보건기구(WHO)가 동의한 것이다. 그러나 WHO가 IAEA에 굴복한 결과라는 비판이 많다. 동국의대 미생물학과 교수인 김익중은 이렇게 반박한다. "방사능은 그 피폭량에 비례하여 암을 발생시킨다. 이는 기준치 이하에서도 마찬가지다. 안전한 방사능은 없다."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미국과학아카데미위원회는 2005년 6월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최소한의 피폭이라도 인간에게 위험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일본의 원자력 전문가인 고이데 히로아키 역시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피폭량에 비례해서 영향이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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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2012년 1월 27일 금요일

조지 오웰의 경고, 핵을 가진 두세 개의 괴물과 냉전


이글은 프레시안 2012-01-27일자 기사 '조지 오웰의 경고, 핵을 가진 두세 개의 괴물과 냉전'을 퍼왔습니다.
[정욱식의 '핵과 인간'] 미국 핵 독점의 종말과 '슈퍼 폭탄'의 등장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두 달 후에 쓴 칼럼에서 소련이 수년 내에 핵무기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며, "우리는 몇 초 만에 수백만의 사람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무기를 보유한 두세 개의 괴물과 같은 슈퍼파워 국가들이 세계를 분단시키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대규모의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줄어들겠지만, 영원히 '평화가 없는 평화'의 상태, 즉 '냉전(cold war)'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후 인류의 역사는 그의 경고대로 진행되고 만다.


▲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백악관 앞에서 열광하는 미국 시민들. ⓒ트루먼 도서관

앞선 글에서 자세히 살펴본 것처럼, 미국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소련을 상대로 한 무력시위의 성격이 강했다. 원폭 투하를 통해 미국이 노렸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소련의 참전 이전에 미국의 힘에 의해 일본을 패망시키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미 싹트고 있던 냉전 질서에서 소련에 대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무력시위'의 성격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런데 애초에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요구한 당사자는 미국이었다.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미영 연합군은 소련의 개입이 태평양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보고, 소련에게 참전에 따른 '전리품'을 제시했었다. 소련에게 쿠릴 섬 및 사할린 섬 남단 이양 및 만주 해군기지 사용 허용 등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로 획득한 것을 소련에게 돌려주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독일이 패망하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탈린은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 이러한 약속을 거듭 확인하면서 "나치 독일의 패망 3개월 후에 대일전에 참전하겠다"라고 재확인했고, 포츠담 회담에서는 8월 15일이라는 구체적인 일정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은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서 계산을 달리 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소련의 참전에 의한 일본의 항복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키워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는데, 핵무기로 소련의 개입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원폭 투하는 소련의 지원 없이 일제를 패망시키고자 하는 동기와 함께 경쟁자로 부상한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의 성격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 이는 반대의 해석도 가능케 한다. 트루먼이 밝힌 것처럼, 소련의 대일본 선전포고는 8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예정보다 6일이 빠른 8월 9일 참전을 단행했다. 아마도 스탈린의 머릿속에도 '미국이 전쟁을 끝나기 전에 우리도 서둘러 참전해야 한다'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스탈린 "히로시마가 세계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미국의 핵무기 및 원폭 투하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스탈린은 1940년대 초반부터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미국이 포츠담 회담에서 '핵 외교'를 선보이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기 이전까지 심혈을 기울이진 않았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한 작은 대비책"으로 간주하는 수준이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이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는 것을 정탐 활동과 일부 과학자들의 '자진 보고'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스탈린이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트루먼의 통보를 듣고 그리 놀라지 않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미국이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한 것에는 상당히 놀랐던 것으로 보인다. 히로시마 피폭 직후 스탈린은 "히로시마가 세계를 뒤흔들었다. 균형은 깨졌다. 핵폭탄을 만들어라. 그것은 우리로부터 거대한 위험을 제거해줄 것이다"라며, 소련 과학자들에게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미국의 핵 사용을 소련의 양보를 강제하기 위한 협박 외교로 규정하고, "우리가 협박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트루먼의 무력시위는 노련한 독재자 스탈린을 위축시키기보다 핵무기를 개발해 미국에 맞서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핵 독점은 2차 대전 말엽은 물론이고 종전 이후에도 "미국의 외교정책을 혁명화"시켰다. 대표적으로 "핵무기가 없었다면 미국 대통령이 결코 생각하기 힘든 정책, 즉 독일의 재건과 재무장을 선택하게 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독일의 재건 및 재무장에 따른 유럽 국가들의 두려움은 미국의 핵 억제로 차단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트루먼 대통령과 번스 국무장관은 1945년 8월 22일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독일의 위협이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며, "원자 폭탄은 도발을 일으키려는 나라들을 중지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미국의 양보가 불가피한 소련과의 협력도, 독일 재무장을 두려워하는 소련의 우려도 크게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핵의 위력을 믿은 미국의 대담한 행보가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독일 문제를 비롯한 소련과의 외교 협상에서 핵무기를 강압 외교의 수단으로 동원했다. 미국은 핵무기의 위력을 스탈린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원폭을 당한 히로시마에 소련 관료를 초청하기도 했고, 태평양에서 실시한 핵실험에 소련 관료를 참관시켰다. 또한 번스가 소련의 몰로토프 외무장관을 만나 독일 문제를 두고 담판을 벌이고 있었던 1946년 6월에는 태평양 비키니섬에서 대규모의 핵실험을 실시해 소련의 강한 반발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련이 그토록 거부했던 독일 재건에도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미국의 두 가지 카드, 즉 핵 시위와 독일 재건은 소련으로 하여금 미국이 전쟁을준비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강하게 갖게 했다. 당시 소련의 위협 인식은 소련 해체 이후 해제된 비밀문서에서 잘 나타난다. 1946년 주미 소련대사인 노비코프(Nikolai Novikov)는 미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 근거로 해외 해공군 기지 건설, 원자폭탄 등 신형무기의 증강, 독일의 재건 및 재무장 추진 등을 제시했다. 특히 "미국은 독일에서의 연합국의 임무, 즉 무장해제와 민주화를 달성하기 이전에 임무를 종식시키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데, 이는 독일 제국주의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고, 미국은 재무장한 독일을 자기편으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미국의 의도에 강한 의혹을 품으면서 "앵글로-색슨의 침공"을 막기 위해 강력한 대응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의 불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구상을 밀어붙였다. 소련의 강력한 반발을 뒤로 하고 유럽경제부흥계획인 '마셜 플랜'을 단행했다. 또한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와 이듬해 베를린 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은 핵무기 보유고를 크게 늘려 1949년에는 그 수를 200개로 늘렸다. 핵 능력 강화와 유럽경제부흥계획을 통해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아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을 침공 준비로 간주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유력한 대응책으로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주목할 점은 핵의 위력을 앞세운 미국의 강경 외교에 '핵 강압 외교'의 주역이었던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이 일찍이 강한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그는 1945년 9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소련과의 신뢰구축을 위해서는 미국의 핵 계획을 소련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그는 편지와 함께 동봉한 메모를 통해 그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미국의 원자 폭탄 보유는) 대륙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상쇄할 수 있는 중요한 무기로 간주되어왔습니다. 우리는 또한 소련 정부가 이러한 경향을 간파하고 있고, 가능한 최단시간 내에 이 무기를 획득하려는 소련의 정치ㆍ군사 지도자들의 유혹도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이 핵 독점을 통해 소련에 맞서는 앵글로-색슨 진영을 구축하면 "매우 절망적인 방식으로 비밀 군비경쟁이 야기"되고, "우리의 목적과 의도에 대한 소련의 의심과 불신은 증가될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추가적인 핵무기 개발과 생산을 중단하고, 소련 및 영국과 핵 기술 협력 및 통제를 놓고 협상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그의 충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련의 핵실험과 미국의 대응

결국 미국의 핵 독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카자흐스탄 사막 '세미팔라틴스크-21'에서 핵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 나가사키에 투하한 플루토늄 핵폭탄 '뚱보(Fat man)'와 흡사한 것으로써, 소련이 1950년대 중반에 가서야 핵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는 미국의 판단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1948년과 1949년 정보분석 보고서를 통해 소련의 핵무기 개발 성공 시점을 "1953년 중반기를 가장 가능성이 높은 때"라고 분석했다. 핵실험에 성공한 스탈린은 이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로 붙이고 싶어했다. 자극받은 미국이 대대적인 군비증강에 나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첨단 장비는 소련의 핵실험 사실을 포착했고, 트루먼은 9월 23일 이를 공식 발표했다. 미국은 소련의 핵무기를 스탈린의 이름을 따 'JOE-1'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미국은 대대적인 군비증강 계획에 착수하고 되는데, 당시 '슈퍼 폭탄'으로 불렸던 수소 폭탄 개발과 NSC-68는 이를 대표한다. 스탈린이 피하고 싶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만 것이다.


▲ 소련의 최초 핵실험 장면. ⓒ미국 에너지부

예상보다 빨리 실시된 소련의 핵실험에 당황한 트루먼 행정부는 세 가지 조치를 단행했다. 첫째는 유럽에서 소련의 재래식 군사력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영구적인 미군 주둔 및 재래식 군비증강이었다. 이는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폭등한 군사비를 줄이고 군부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자 했던 트루먼의 의도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둘째는 소련에 대한 핵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원자폭탄의 양과 질을 크게 늘리는 것이었다. 이미 트루먼 행정부는 원자폭탄 증강을 통해 재래식 군사력 감축을 상쇄할 생각이었는데, 소련의 핵실험 성공 소식은 원자폭탄 증강 열기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셋째는 당시 '슈퍼 폭탄'으로 불렸던 수소폭탄 개발 승인이었다. 트루먼은 1950년 1월 31일자 성명을 통해, "우리나라를 잠재적인 도발자로부터 방어하는 것은 최고 군통수권자의 의무"라며, "나는 원자력위원회에 수소 폭탄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핵무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수소 폭탄의 개발 방침은 핵의 역사에서 두 가지 심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수소 폭탄의 파괴력이 원자 폭탄의 수십배에 달해 단 한발의 폭탄으로도 대도시나 작은 나라를 완전히 날려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가공할 파괴력에 놀란 많은 사람들이 반핵주의자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대소 봉쇄 정책의 설계자인 조지 캐넌과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이들을 비롯한 많은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 과학자들은 "수소 폭탄의 사용은 원자 폭탄을 훨씬 능가하는 대량 살상을 가져올 것"이라며, 설사 소련이 이 무기를 손에 쥔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원자 폭탄으로 소련을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현재와 같은 군사 기술 수준에서 (핵)무장을 통해 안보를 달성하겠다는 것은 파멸적인 환상"이라며, "미-소 간의 군비 경쟁은 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소련의 핵실험 성공에 충격을 받은 트루먼 행정부는 '슈퍼 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소련보다 핵전력이 앞서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미국이 주저하는 사이에 소련이 먼저 수소 폭탄을 개발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팽배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1952년 11월 1일에 태평양에서 수소 폭탄 실험을 강행했다. 폭발 규모는 원자 폭탄 실험이었던 '트리니티'보다 500배 강력한 10메가톤을 넘어섰다. 소련 역시 그 이듬해인 1953년 8월 12일에 중앙아시아 사막에서 수소 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이처럼 미국과 소련은 조지 오웰인 말한 "두 개의 괴물"이 되어갔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1954년 3월 1일에 태평양 비키니 섬에서 실시된 미국의 수소 폭탄 실험은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낳았다. 폭발 규모가 무려 15메가톤에 달해,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탄보다 750배, 미국 정부가 예상했던 것보다 2.5배나 강력했던 것이다. 또한 직경 6,500피트, 깊이 250피트의 거대한 분화구가 생겨났으며, 버섯구름은 1분 후 직경 15킬로미터, 8분 후에는 100킬로미터까지 커졌고 높이도 무려 16.5킬로미터에 달했다. 더구나 방사능 낙진이 140여킬로미텉까지 날아가 조업 중이던 일본인 어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세계 곳곳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고 이상 기후가 나타났다.


▲ 1954년 3월에 실시된 미국의 수소 폭탄 실험 브라보

가공한 폭발력 앞에 인류 사회는 전율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핵무기를 다른 무기와 특별히 다르게 봐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던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까지 핵무기 옹호자였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역시 이 실험을 목도하고는 핵전쟁이 일어나면 영국은 더 이상 살 수 없는 땅에 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무엇보다도 수소 폭탄 실험 '브라보(Bravo)'는 반핵 운동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미국의 저명한 반핵단체인 분별있는 핵정책을 위한 전국위원회(National Committee for a Sane Nuclear Policy)와 비폭력행동위원회(Committee for Non-Violent Action) 등과 영국의 핵폐기캠페인(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그리고 초국적 단체인 퍼그워시(Pugwash) 등 저명한 반핵단체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대규모 반핵 집회 개최, 신문광고, 시민 불복종 운동 및 핵무기 시설 침투와 핵실험 지역에서의 해상 시위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반핵 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반핵 운동은 언론을 통해 전세계에 타진되었다. 그러자 핵무기 사용에 대한 미국 여론도 바뀌기 시작했는데, 1950년대 중반에는 선제 핵사용에 대한 반대 여론이 과반수를 넘어서기도 했다.

이처럼 원자 폭탄보다 파괴력이 훨씬 큰 수소 폭탄은 '핵분열' 반응을 이용하는 원자 폭탄과 달리 '핵융합' 반응을 이용하는 무기다. 수소 폭탄의 핵융합 반응은 원자 폭탄의 핵분열 반응에 비해 단위당 방출 에너지 양이 10퍼센트 정도로 작지만,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의 질량이 핵분열 물질의 2퍼센트밖에 안 되기 때문에 핵물질당 방출 에너지의 양은 원자 폭탄보다 4배 이상 많다. 예를 들어 10킬로그램의 핵물질이 포함된 수소 폭탄은 같은 질량의 원자 폭탄보다 파괴력이 42배 강하다. 그래서 "핵분열 폭탄은 태양 표면에 해당하는 온도를 만들어내는 반면에, 핵융합 폭탄은 태양의 일부를 지구에 갖다 놓은 것과 같은 엄청난 온도를 발산한다."

한편 소련이 미국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 내에서는 '매카시즘'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련의 최초 핵무기는 미국의 예상보다 5년 정도 빨리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플루토늄 핵폭탄인 '가제트' 및 '뚱보'와도 흡사했다. 소련 핵실험 5개월 후에는 소련 스파이의 핵심인물인 클라우스 푹스(Klaus Fucks)가 미 정보기관에 체포되었다. 그는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물리학자였는데, 1944년부터 로스앨라모스 연구소에 파견 근무하면서 핵심 정보를 소련 측에 넘겼다. 이 사건 직후에도 국무부 고위관료인 앨저 히스 간첩 논란 및 로젠버그 부부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미국 내 소련 스파이가 소련의 핵개발을 도왔다"는 심증은 확신을 갖게 됐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의 핵실험에 이어 10월 1일에는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미국 내 '적재 공포'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소련의 핵실험 성공이 미국 핵 독점체제를 무너뜨렸다면, 중국의 공산화 성공은 오랜 기간 미국의 동맹국으로 인식되었던 중국이 공산국가로 변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미국의 충격도 컸다. 특히 1950년 1월 들어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유엔 가입 문제로 미국과 소련이 날카로운 대립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 해 2월에 중소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이를 틈타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인 매카시(Joseph McCarthy)는 1950년 2월 9일 "나에게 국무부에서 일하는 205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이 있다. 그런데 국무장관은 이들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계속 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무명에 가까웠던 매카시는 이 폭탄 발언 한방으로 일약 저명한 정치인으로 올라섰다. 그가 경고한 '적색 공포'를 실증하듯 4개월 후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매카시즘은 미국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대외정책의 급격한 우경화를 야기했다. 국제정세가 급변하던 시기를 틈타 몰아치기 시작한 매카시즘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이 신속한 개입을 선택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에 신속한 개입을 선택함으로써 안보와 공산주의에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 주요 참고문헌

George Orwell, "You and the Atomic Bomb," Tribune, 19 October 1945.Joseph Cirincione, Bomb Scare: The History & Future of Nuclear Weapons, (ColumbiaUniversity Press, 2007)Nina Tannenwald, "Stigmatizing the Bomb: Origins of the Nuclear Taboo," International Security(Spring, 2005).William Burr, "U.S. Intelligence and the Detection of the First Soviet Nuclear Test, September 1949," September 22, 2009John Lewis Gaddis, The Cold War: A New History,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05).정욱식,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 (책세상, 2010년).카이 버드ㆍ마틴 셔원 지음, 최형섭 옮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사이언스북스, 2010년).트루먼 도서관: http://www.trumanlibrary.org조지워싱턴대 국가안보문서 보관소: http://www.gwu.edu/~nsarchiv/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