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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27일 금요일

<부러진 화살>, 그 실체적 진실이란?


이글은 프레시안 2012-01-27일자 기사 ', 그 실체적 진실이란?'를 퍼왔습니다.
[김민웅 칼럼] 100만 관객을 넘으면서

쏜 사람은 없는데 맞은 사람이 있다면?

쏜 사람이 없으면 맞은 사람은 없게 마련이다. 그러나 맞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증거를 확보하는 것은 누구라도 가장 먼저 떠올릴 기본이다. 더군다나 맞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법정에서 증거논쟁을 정리하는 판사라면 그 증거가 얼마나 중대한지도 알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해의 증거라는 것도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의 몸에 박혔다고 하니 그건 가해자가 어떻게 인멸할 수 없는, 피해자의 손에 들어간 가장 확실한 물증이다. 그런데 그 증거가 사라졌다. 누구의 손에 의해서일까? 어떤 경로로?

가령 누군가를 칼로 찌른 뒤, 그걸 범인이 없애버렸다고 그 범죄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찌른 칼을 찾지 못한다고 해서 찔린 상처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칼이라는 물증이 없을 때에는 다른 정황 증거가 범죄를 입증하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결정적 물증이 없다고 그 범인이 잡히든 아니든 해당 범죄 사실이 부인될 수 없다. 그러나 이 경우, 그 결정적 물증이 실종된 것은 범인이 은폐 인멸했을 때의 이야기다.

만일 피해자가 주장하는 상처가 석궁 발사의 결과인지 아닌지도 확증되지 못했고, 발사체인 화살이라고 하는 물증도 없어진 상태이며 혈흔이 피해자의 것인지도 밝히는 과정이 없는 상태에서 내려진 판결이라면, 그걸 승복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주인공 김명호로 분한 안성기 ⓒ부산국제영화제

사법부의 권위를 몰락시키고 있는 당사자는...

법정에서 판사가 전문가를 불러 실험해 본 과학적 결과도 부정하고, 피해자의 혈흔 검증도 거부하고 결정적 물증이 사라진 경위에 대해서도 묻지 않고 피해자, 그것도 동료 판사의 말만 근거로 판결을 내려가는 모습을 보였다면 그 재판의 일방성은 도마 위에 오르지 않을 수 없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셈이기 때문이다.

증거로 제출된 것의 증거능력 판별은 판사의 자유재량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상식적 설득력이 있을 경우에 한 한다. 판사의 자유재량 발동에 필요한 절차를 엄밀하게 구성하는 것이 바로 공판주의의 정신이기도 하고 법의 권위를 확보하는 첩경이기도 하다. 이걸 판사 스스로가 무너뜨리는 순간, 법의 권위를 몰락시킨 당사자는 다름 아닌 판사 자신이다.

물론 '판결에 불만을 품고 석궁을 들고 갈 수 있는가'라는 윤리적 문제가 생긴다. 석궁을 들고 해당 판사를 겁주려 한 것은 찬동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라는생각 대신 "오죽하면"이라는 시각을 가지는 순간 그를 대표로 하는 무수한 이들의 억울한 심정을 읽어내는 것이 판사의 양심이어야 한다. 이 행위를 벌주는 것에 진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담긴 절규를 듣는 것이 판사의 책임이다. 그런 판사가 있으면 그 행위에 대한 지탄은 사회가 알아서 하게 되어 있다.

영화 이 사법부를 겨냥했다고들 난리인 모양이나, 이 영화는 사법부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사법부의 오만과 특권의식, 그리고 기득권 동맹 체제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만들어낸 것은 영화가 아니라 사법부 자신이다.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며, 이 영화에 열광하는 이들이 이렇게 매일 급증할 수도 없다.

앙시앙 레짐의 몰락과 2012년의 시대정신

이제 영화 이 일주일을 넘기면서 관객 100만을 기록했다. 이런 식의 고공 행진이 계속된다면 여기에 0이 하나 더 붙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사태가 그렇게방향을 잡아나가는 추세가 되면, 기존질서의 가장 강력한 보루인 사법부를 비롯하여 이른바 낡은 질서의 총체적 구조인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이 일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2012년의 시대정신"과도 그대로 일치하는 현상이 될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단지 사법부의 현실만을 문제 삼고 있지 않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제기하고 고민하며 토론하고 해결해야 할 사안들과 두루두루 직면하게 된다. 사립학교법, 국가보안법, 노동자 탄압, 사법피해, 교도소 인권상황,언론의 비굴함, 이명박과 BBK, 검찰개혁 등 하나 둘이 아니다. 특히 노동자 탄압은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아래에서도 잔혹하게 벌어졌던 사건들이다.

이 영화는 이러한 사회적 악폐와 구질서의 억압구조를 사법부의 현실에서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뿐이며, 그렇다고 다른 구질서의 권력기관들은 그냥 넘어가도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정부 10년의 공과 과, 그리고 이명박 정권의 폐습, 사법부를 비롯한 권력기관의 오만과 특권체제 이 모든 것이 이 영화에서 하나로 뭉뚱그려 얽혀 있음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감독의 시야는 결코 좁지 않다. 하나로 열을 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 정지영 감독에게 <부러진 화살>의 영화화를 권했던 배우 문성근(오른쪽)이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영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배우 안성기, 감독 정지영, 배우 김지호, 박원상 ⓒ연합뉴스

'2013년 체제'를 향해 하는 길목에서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2013년 체제'를 향해 가는 길목에 서 있는 작품이다. 민주주의의 완성과 남북관계의 진화, 그리고 복지체제의 건설을 위해 필요한 우리의 의식과 시선을 재정리하는 매우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사법부라는 특정한 실체를 놓고 만들어진 영화라는 점에서 그 주제를 놓쳐서는 안 되지만, 그 한계에 갇혀 논란을 벌이는 것도 기득권 질서의 담론 전략에 갇혀 버리는 일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석궁 사건의 실체 논란과 영화의 사실성, 허구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논란은 그 나름으로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의 의미를 한정시켜버린다면 그건 또 다른 "농간"에 놀아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정작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는 "우리가 이길 수 있다"이다. 방법도 나와 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가 보는 것이다. 대담하게. 그렇다면 누가?

2008년 촛불 광장에서부터 한미FTA 반대, 그리고 야권의 연대와 통합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현실을 역동적으로 변화시켜온 힘의 밑바닥에는 "보통 사람들의 미미하게만 보였던 목소리"가 있다. 세상으로부터 잊힐 뻔했던 석궁 사건의 김명호 교수도 그런 목소리의 하나이고,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 자체가 또한 그런 목소리며 노 개런티로 출연한 연기자들과 스텝도 그런 목소리를 만들어낸 이들이다. 이 영화를 설 개봉으로 과감히 배급 결정한 이들도 마찬가지다.

어디 그뿐인가? 영화 은 거대한 자본의 공세와 벽 앞에서도 SNS를 통한 사회적 응원에 힘입고 있지 않은가? 개봉 1주일 100만 관객도 그런 이들의 위력이 만들어낸 거사이다. 그렇지 않아도 2011년, 세계는 "작은 자들의 반란"과 이들의 힘이 폭발적으로 자라나는 것을 목격했다. 이슬람권에서, 미국에서, 유럽에서, 우리는 "더는 쫄지 않는 작은 자들의 목소리와 행동"을 통해 현실이 바뀌어가고 있는 것을 체험했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다.

이 영화는 이미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현관이 되었다. 한 시대의 의미를 규정하는 사회적 자산으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으로 들어서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이걸 따고 들어가서 만들어가야 할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바로 거기에 "의 실체적 진실"이 있다.

이번에는 제대로 쏘게 될 것이다. 영화처럼 유쾌하게.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

2012년 1월 20일 금요일

곽노현의 복귀, 제대로 된 논쟁이 시작돼야


이글은 프레시안 2012-01-19일자 기사 '곽노현의 복귀, 제대로 된 논쟁이 시작돼야'를 퍼왔습니다.
[김민웅 칼럼] 곽노현 교육감 판결에 대해

법적 결론 완결되지 않았다.

곽노현 교육감의 벌금형 선고는 실정법적 제약과 곽 교육감의 진심에 대한 경계선에서 내려진 판결로 보인다. 그러나 법원의 최종판단이 3심까지 있다는 점에서 이번 1심 유죄선고가 곽 교육감에 대한 법적 결론이 완결된 것은 아니다.

우선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곽 교육감의 직무복귀가 이루어짐으로써 그간 이명박 정권과 보수 세력이 저지하려 했던 교육 개혁의 방향과 의지가 다시 점화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번 재판에서 곽 교육감이 돈과 관련한 사전 합의에 대한 인지 여부, 사후라도 대가성이 입증된다면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이 핵심 사안으로 떠올랐다. 이는 돈의 성격을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의 문제이자, 실정법이 규정한 대가성 금품 제공의 기준에 대한 논란이 걸려 있는 사안이었다.

그런데 곽 교육감이 선거 과정에서 경쟁 상대였던 박명기 교수에게 선거가 끝난 후, 돈을 주었다는 사실은 명백했고 이는 곽 교육감 자신이 인정했다는 점에서 사실 관계의 일차적 진실은 변함이 없었다. 여기서 대립되는 지점은, 어려운 박명기 교수의 처지에 긴급 조력을 했다는 곽 교육감의 주장과 선거 이후 사전 합의에 따른 대가성 금품 제공이라는 검찰의 주장이다.

상황논리와 진심의 대결



ⓒ뉴시스
곽 교육감이 박 교수에게 돈을 준 것은 그 어떤 정상을 참작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그런 식이라면 우리 사회는 너무도 인심이 사나와질 것이라는 반박이 있다. 어디에서는 갓끈도 매지 말고 신발 끈도 고쳐 신지 말라고 하는데, 이건 상황에 따른 오해의 가능성을 피하라는 교훈이다.

진보 교육감이라는 위상을 어렵게 얻은마당에 보수 세력의 공세가 뻔한데 아무리 상대의 처지가 급해도 그러지 않는 것이 당연히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옳은 처신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 논리가 모든 것을 압도할 경우, 그 상황논리를 넘어서는 진심의 수용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번 재판의 사실상 핵심은 곽 교육감의 진심을 판단하는 문제이다. 선거과정에서 경쟁상대가 사퇴함으로써 유리한 입장에 서 있게 된 것도 사실이고, 그 상대가 사퇴의 대가를 기대할 만한 정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가 곽 교육감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간 것도 사실이며, 돈이 건네진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과 조건만 보면 이는 대가성 금품 제공이라는 판단을 내리기에 족하다. 유죄판결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재판은 바로 이러한 조건과 상황이 얽혀 있는 사안의 진실을 파헤치는데서 시작된다. 또한 이 사안에 깔려 있는 진정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명 재판의 의미다.

긴급부조의 진실성, 그리고 윤리적 논쟁

묻자. 우리는 문제가 불거지면 자신에게 불리할 수 있음에도 상대의 처지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돈을 건네주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결론 내릴 수 있는가? 만일 돈의 성격이 정말 "긴급부조"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무리 긴급부조를 해야 할 상황이라도 상대에 따라 그 긴급부조는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가령 "원수를 사랑하라"는 종교적 윤리는 언제나 실정법적 판단의 잣대에 묶여야 하는가?

나는 곽 교육감이 실로 용기 있다고 본다. 경쟁 상대였던 후보에게 돈을 주는 일은 위험하다. 뿐만 아니라 사건 직후 이에 대한 사실 인정을 했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정황논리를 뛰어넘어, 교육감 선거를 거치면서 진보교육 운동에 뛰어든 이들이 어떤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으며 힘겨운 처지에 빠지는가를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가 교육의 진보적 개혁에 진력을 다하는 것 이상으로, 함께 선거에 나섰던 이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했다. 정치적으로 순진하고 교육감의 위치에서 무책임한 일을 저질렀다고 비난받을 수 있다.

그런데 곽 교육감이 바로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기에, 그는 현실의 비난과 오해를 뚫고 교육개혁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진정 조력이 필요한 곳에 조력을 하는 것. 그것이 이 사회를 보다 윤리적으로 진보시킬 수 있는 출발점이다. 이 일을 하는 것은, 현실의 오해라는 거대한 벽을 허물고 나가는 이에게만 가능하다.

곽노현 표 교육 개혁 힘차게 다시 시동을 걸어야

곽노현 교육감 재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쟁은 이제 비로소 제대로 시작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태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는 향후 우리 교육의 내용과 가치에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에 더해 그간 곽노현 교육감의 진보교육 개혁을 막고자 했던 세력이 이번 일로 어떤 대응을 하게 될는지 주목된다.

이제 우리는 곽노현 교육감의 복귀로, 그간 흐트러져 있던 서울시 교육정책의 흐름을 다시 잡아 교육의 미래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박원순 시장과 곽노현 교육감, 이 쌍두마차가 서울시의 내일을 밝게 해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곽노현 교육감의 무상급식 정책이 오세훈 전 시장의 사퇴를 결과적으로 가져왔고 박원순 서울시장 체제를 만들어내는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박원순-곽노현, 이 서울시 개혁의 두 동력이 힘차게 손을 잡고 2012년을 더더욱 흥분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

2011년 12월 20일 화요일

북 체제 안정 역량, 생각 이상으로 높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1-12-20일자 기사 '북 체제 안정 역량, 생각 이상으로 높다'를 퍼왔습니다.
[김민웅 칼럼] 조문 정국으로 전환이 필요하다

이틀간의 시간 동안 북이 보여준 것

북한의 체제 생존력은 일단 생각 이상으로 높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과 관련한정보를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알 수 없게 완벽하게 관리한 점은 북의 체제 방어 수준이 만만치 않음을 증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북의 내부를 향한 외부의 개입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과시한 셈이기도 하다.

북으로서는 김정일 위원장의 급서가 주는 충격과 위기를 관리하고 차기 체제를 조속하게 안정시키는 일 외의 중대사는 지금 없다. 여차하면 북한 붕괴론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런 대응은 체제적 필연성을 가진다.

더군다나 김정일 위원장의 죽음에 대한 애도 못지않게 김정은 체제의 안정을 입증해 보이지 못하면, 북한 주민들이 겪을 혼란과 위기감은 통제 불가능의 상태가 된다. 그런 점에서 북의 체제 방어 시스템이 이틀에 걸쳐 이를 해결했다고 판단하고 사망 정보를 공개한 것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이명박 정권의 대북 정보 파악 역량에 대한 질타가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의미하다. 이명박 정권만이 아니라 미국도 북의 체제 방어력과 정보관리의 벽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여기서 중요하게 봐야 할 대목은 김정일 이후의 북이 자신을 철저하게 방어하고 정권 교체 동요기에 외부의 개입 가능성을 치밀하게 차단하는 작업을 완료했다는 점이다. 이걸 제대로 보지 못할 경우, 북의 김정일 이후 체제에 대한 전망은 오판에 기초할 수 있다.

순직한 지도자의 이미지

뿐만 아니라, 김일성 주석의 경우 남북관계를 재정비하는 작업에 몰두하다가 유명을 달리하고 김정일 위원장의 경우에는 북한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현지 지도에 골몰하다가 세상을 떴다는 대목은 북한 주민들에게 김정은 체제로 넘어가는 3대 세습의 정서적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다가 순직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는 대를 이어 계승되고, 그에 따라 김정은 체제는 북한 주민들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얻은 것이다.

이 두 가지 면모, 즉 (1) 위기의 조건에서 작동한 체제 방어력의 수준과 (2) 지도자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결집도는 북한의 장래에 대한 섣부른 부정적 예상이나 평가를 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렇지 않아도 북은 김일성 주석 사후 체제 위기를 관리한 경험과 경제적 곤경을 헤쳐 온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이번의 경우 그 학습효과가 가동할 수 있는 기반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덧붙여,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상태 악화와 김정은 후계 지목이 겹쳐서 진행되었다는 점은 만일의 유고사태에 대비하는 내부의 시스템 작동 준비가 상당 정도 정비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볼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쪽에서 생각하듯이 핵심적 지도자의 사망으로 인한 어떤 정치적 혼란이나 군사적 동요란 적어도 체제적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김정일 위원장의 예기치 않은 사망은 북 내부에 엄청난 충격과 위기감을 조성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때를 위해 그토록 주변 열강들과의 외교적 관계를 다져놓고 후계구도를 확정했던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존경심이 더더욱 우러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비상관리체제와 계승 시스템을 김정일 위원장이 정치적 유산으로 남겨놓았다고 본다면, 북의 생존력은 결코 불안정하지 않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김정은이 지난해 10월 노동절 행사 당시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 옆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AP=연합

준비된 후계체제와 유리한 주변 환경

또한 김정일 이후의 북은 김정은 하나의 주도 아래 모든 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체제의 방어와 생존을 위해 그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는 방식을 선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안정될 수 있다. 주변 환경도 좋은 편이다. 중국의 대북 정책은 북의 체제 생존력에 기본 조건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과 러시아를 교차 방문하면서 후계체제의 안정화 전략을 구사하고, 사망 직전 미국과의 관계개선의 의지도 진전시켜나간 것은 모두 자신의 부재 이후를 염두에 둔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북의 지배 엘리트 들 역시 김정일 위원장이 마련해놓은 기반을 다지는 것 외의 생존전략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김정은 체제의 공고화에 진력을 다할 것이며 "선군정치"의 최대 수혜자인 군 역시 이런 방향으로 힘을 쏟을 것이다.

김정은이 너무 어린 나이라고 하지만, 3대에 걸친 혁명 가계의 적통이라는 자의식과 짧은 시간의 훈련이지만 최고 지도자 과정을 밟았고 젊은 시절 김일성 주석의 이미지와 혼재되어 있는 면모는 그의 지도력에 일정한 카리스마를 부여하게 되어 있다. 할아버지가 항일 독립투쟁의 경륜을 가지고 있고 아버지는 대미 관계와 경제위기를 관리하고 돌파하기 위한 역량을 보였다면, 김정은의 경우는 세기적 격변기에 강성대국 내지 강성국가의 진로를 구체화하는 과제를 받은 셈이다.

그가 성공할지 아니면 실패하고 말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을 보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그로서는 생각보다 신중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 그것이 그의 나이와 경력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모를 수 없고, 또 권력의 핵심 주체 세력도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김정은 체제는 견고하게 다져진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상속받을 뿐만 아니라, 내부의 강력한 지지와 외부의 지원을 받는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북에게 있어서 이것 외의 대안은 없고 중국과 러시아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일본도 이미 예상대로 북에 대한 조의표시를 했고 대북 접근의 밀도를 높이려 들고 있다.

조문 정국으로의 전환

따라서 김정일 위원장 이후 대북 정책에서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은, 김정일 사망에 대한 기본적인 조의의 예를 갖추지 않는다거나 북의 체제 생존력을 가볍게 본다든지 김정은 체제를 우습게 보는 일 따위다. 만일 그렇게 해버린다면, 그것은 북 체제 내부에 긴장을 불러일으켜 한반도의 평화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향후 대북관계 개선의 통로를 스스로 차단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은 뻔하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 조의 내지 조문 정국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물론 그렇다고 이명박 정권의 문제가 이로써 덮어진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한-미 FTA문제가 망각된다고 여기는 것 역시 착각이다. 잠시 우선순위가 바뀌어 일차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북은 외국의 조문사절을 받지 않는다고 했지 같은 민족의 조문까지 거부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중국의 후진타오가 영결식 참석을 하겠다고 했으니 조문사절 논란은 동양적 예로 볼 때 일단 "굳이 오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한 정도이다. 그게 조의 표시마저 거부하거나 조문의지를 밝히는 것까지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충격에 빠져 있는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우리가 진정 위로하고 한반도 평화의 내일을 위해 필요한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북에 분명하게 표시하는 일이다. '문상정치'라는 말도 있고 '조문외교'라는 말도 있다. 통 크게 그런 각도로 북의 상황을 대하는 노력과 모습을 보인다면, 이제까지의 여러 복잡한 감정과 정책의 모순이 일거에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정도로 풀려나갈 수 있다.

동양의 역사에서 조문이란...

김일성 주석의 죽음을 아버지의 죽음으로, 다시 세대가 바뀌어 김정일 위원장의 죽음을 또한 아버지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북한의 현실에서 매우 현명하게 처신할 일이다. 상대는 의외로 강력한 체제 생존력을 가지고 있으며, 불안정한 요소가 있다 해도 적지 않은 기간 동안 북의 현실을 장악하면서 한반도의 장래를 결정해나가는 주체의 하나다. 그런 상대를 외면하고 무시해버린다면, 그건 한반도의 평화체제 수립에 역행하는 처사가 된다.

이제 곧 오바마 행정부도 북에 대해 조의를 표시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국면에 처한 북한과의 대화통로를 복구하는 일에 지체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대 중국 전략에 있어서도 유리한 선택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잇달아 이명박 정부의 공식적인 조의 표시를 요구하고 있다. 북은 예의주시할 것이다. 그리고 기억할 것이다.

동양의 역사에서는 적장이 죽어도 조문은 가는 법이다. 아니면 조의 정도라도 표한다. 이명박 정권은 그 의미를 혹여 부정하고 싶어도 하물며, 고(故) 김대중 대통령과 손을 잡고 한반도의 평화를 이룩하자고 했던 북의 지도자다. 노벨 평화상의 사실상 한 쪽 당사자다.

그렇다면 북의 핵은 뭐냐고 할지 모르지만, 미국의 대북 압박정책에 대한 대응과정의 산물 아니던가? 대북압박 내지 적대시 정책의 포기와 북한의 핵전략 포기는 서로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는 사안이다.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가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는 법이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더 길게 말하지 않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