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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26일 월요일

"'삼성생명 국유화' 요구하는 정치적 상상력 필요하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3-25일자 기사 '"'삼성생명 국유화' 요구하는 정치적 상상력 필요하다"'를 퍼왔습니다.
[인터뷰] 저자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개념 정의를 분명히 하는 일, 합리적인 대화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그게 안 되고 있다. 정치권에 밀물처럼 몰려들었던 '경제 민주화'라는 말이 그렇다. 최근 여, 야 정당의 공천 내역을 보면, 벌써 한물 간 개념이 된 모양이다. '경제 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해 왔던 이들에겐 몹시 인색한 공천이었다.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었다. 너도나도 '경제 민주화'를 이야기했지만, 뜻은 온통 제각각이었다. 같은 말을 하면서도 저마다 생각이 달랐던 게다. 이래서는 말에 힘이 붙을 리 없다. '경제 민주화'라는 말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정치권 풍경은 그 결과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를 만났다. 라는 책을 새로 들고 나타난 그의 첫 마디가 '경제 민주화'였다. '경제 민주화'라는 개념으로 담을 수 있는 게 워낙 다양하다는 게다. 옛 유고슬라비아 방식의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부터 덴마크에서 발달한 농민 협동조합까지. 이처럼 폭넓은 개념을 놓고 나누는 대화가 겉돌지 않으려면,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장 교수는 그걸 '1인 1표(1人 1票)'의 원리라고 봤다. 많이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똑같이 권리를 행사하는 '일인일표'의 원리, 그게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런 원리를 경제 영역에 적용하자는 게 '경제 민주화'다. 이렇게 보면 '1주 1표(1株 1票)'의 원리, 즉 주식을 가진 비율에 따라 권리를 행사하는 방식은 '경제 민주화' 개념의 정반대편에 서 있다. 한마디로 주주자본주의 논리와 '경제 민주화'는 상극이라는 말이다.

장 교수가 안타까워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경제 민주화'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주주자본주의 논리가 한국에선 '경제 민주화' 구호 안에 담겨 있다는 게다. 여기엔 한국 경제사의 독특한 맥락이 있다. 재벌들은 정부의 규제를 피하는 명분으로 주주자본주의 논리를 동원하곤 했다. 회사는 주주의 것이니, 주식이 없는 정부는 간섭하지 말라는 게다. 하지만 여기엔 모순이 있었다. 재벌 스스로도 주주자본주의 논리에 충실하지 못했던 게다. 1퍼센트대의 지분으로 삼성그룹을 지배하는 이건희 회장이 대표적인 예다. 개념 그대로의 주주자본주의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주주자본주의 역시 그저 말뿐이었다는 이야기다. 재벌 개혁 운동은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주주자본주의 논리에 비춰 봐도 지금과 같은 재벌 지배 구조는 잘못이라는 것.

여기서 장 교수의 생각과 갈라진다. 그는 진짜 주주자본주의가 자리 잡아서 지금과 같은 재벌 구조가 해체된다한들 '경제 민주화'는 아니라고 본다. 변칙적인 순환출자구조가 깨지면, 해외 투기 자본만 이익을 보리라는 설명이다. 장 교수는 "이건희보다 돈 많은 사람이 와서 한국을 지배해달라는 게 재벌 개혁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이번 책에서 "재벌 해체는 투기 자본을 위한 잔칫상이다"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그의 대안은? '경제 민주화'라는 말의 본래 뜻에 충실하자는 게다. '1인 1표'의 원리가 작동하는 영역, 바로 정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게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기업을 키우기보다 단기적인 이익만 쫓는 투기자본을 정부가 강력히 규제해야 한다는 것. 그간 개혁 진영이 줄곧 주장해 왔던 '중앙은행의 독립성 강화'에 대해 그가 의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앙은행이 담당하는 통화정책이 왜 소수 전문가의 몫이 돼야 하느냐는 게다. 통화정책은 대중의 삶에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다수 국민을 '1인 1표'의 원리에 따라 대표하는 정부가 개입하는 게 옳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른바 관치금융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장 교수는 '그게 왜 나쁜가'라고 되묻는다. 오히려 정부가 책임을 방기하고, 모든 게 시장에만 맡겨진 상황이 진짜 문제라는 게다.

요컨대 그가 정조준한 표적은 박정희식 개발독재라기보다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지배질서가 된 시장만능주의다. '박정희의 유산'과 싸우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는 이들과는갈등이 필연적이다. 실제로 장 교수는 '좌파와 우파에게 모두 욕을 먹는 경제학자'로 종종 소개된다.

'경제 민주화' 구호가 허망하게 날아간 지금, 장 교수의 새 책이 나온 건 그래서 다행스럽다.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이종태 기자와 함께 나눈 대화를 묶어 낸 이번 책은 '경제 민주화'라는 개념을 차근차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7년 전, 같은 방식으로 낸 에 담긴 문제의식이 보다 정교하고 깊어졌다. 그가 새로 낸 책이 널리 읽힌 뒤, 다시 등장할 '경제 민주화' 구호는 지금보다 견고한 뜻을 담고 있을 게다. 지난 20일, 서울 삼성동에서 장 교수와 만나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이날 인터뷰는 박인규 발행인이 진행했다.



▲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적의 적'은 우리 편?…투기자본은 재벌보다 더 나쁘다!"

프레시안 : 이번 책에서 국제투기자본의 폐해에 대해 강력히 경고했다. 야당을 중심으로 나오는 '경제 민주화' 담론에선 빠진 대목이다.

장하준 : 시장 논리를 강화해서 '경제 민주화'를 이룬다는 주장은 개념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1주 1표(1株 1票)', 또는 '1원 1표(1元 1票)'의 원리가 작동하는 시장과 '1인 1표(1人 1票)'를 원칙으로 삼는 민주주의는 원래 양립하기 어렵다. 개혁 진영에 있는 이들 가운데서 '적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이들을 종종 본다. 재벌은 우리의 적인데, 국제투기자본이 재벌에겐 경영권을 위협하는 적이므로 국제투기자본이 우리 편이라는 식이다. 몹시 위험한 발상이다.

감상적인 애국주의를 주장하는 건 아니다. 요컨대 해외투기자본만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금융자본주의, 주주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다. 이른바 '토종 금융자본'를 키우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나는 반대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금융자본을 규제해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다.

국경을 넘나들며 이익을 챙기는 금융자본을 빼고는 경제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이들 금융자본의 움직임은 합리성과 거리가 멀다. 원래 시장 자체가 그렇다. 합리적인 시장 원리는 환상일 뿐이다.

1970년대 말부터 각종 규제에서 풀려나기 시작한 국제금융자본은 1990년대 이후 고수익을 찾아 동아시아, 남미 등 이른바 신흥경제지역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다 수익률이 떨어지기 시작한 1997년 일제히 이 지역을 떠나면서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이후 금융자본은 미국의 IT버블을, 그 뒤엔 주택부동산버블을 일으켰다. 결과는 2008년 8월 세계 금융위기였다. 이즈음 거품 해소에 따른 달러화 가치 하락을 우려한 금융계 큰손들이 석유, 곡물, 광물 등 현물자산으로 대거 투자처를 옮기면서 세계 원자재 가격이 두 배 이상 폭등했다. 그리고 이 같은 곡물가격의 급등이 중동 자스민 혁명의 원인이 됐다. 한국도 영향을 받았다.

"IMF조차 자본 규제를 권한다"


▲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투기자본이 대중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잘 알겠다. 그런데 정부가 그걸 규제할 방법이 있을까.

장하준 : 단기 이익만 노리고 들어오는 자본은 규제해야 한다. 이미 많은 나라가 그렇게 하고 있다. 예치금 제도라는게 있다. 외국인이 투자를 하러 들어올 때 갖고 오는 돈의 일정한 비용을 중앙은행에 예치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돈을 정해진 기한 이내에 갖고 나가면 예치금을 못 받는다. 너무 단기적인 투자는 못 들어오게 막자는 거다. 또 외국인 자본거래 이득에 대해, 특히 국채거래를 통한 이득에 세금을 걷는 나라가 많이 새겼다. 외국 금융기관 역시 외환 관계 파생상품거래 규제를 강화하는 추세다.

과거엔 이런 정책을 주장하면 IMF가 핏대를 올리며 반대했다. 그런데 요즘은 IMF마저 달라졌다. 후진국에는 이런 규제 정책을 권한다. 그만큼 국제유동자본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다.

세계적인 추세, 이른바 '대세'를 핑계 삼는 이들이 많다. 과거엔 금융자유화가 세계적인 추세라며 반대 주장을 억눌렀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규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대세'가 바뀌었다. 그러자 '대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편리한 때만 '대세'를 이야기하는 셈이다. 이들은 리먼브러더스가 망하기 직전까지도 산업은행이 리먼브러더스를 인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게 '대세'를 따르는 길이라는 게다. 만약 당시 그들의 주장을 따랏다면 어떻게 됐을까. 후유증이 막심했을 게다. 자본통제,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규제는 우리도 해야 한다.

"주주 이익만 생각하는 은행, 부동산 거품 키웠다"

프레시안 :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부동산 시장이 급등한 현상도 금융자본주의 질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장하준 : 1998년 이후 들어선 민주정부가 영미식 시장 개혁을 추진하면서 은행과 제2금융권이 주택 대출과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대폭 늘렸다. 저성장·저투자 기조 속에서 생긴 집값 상승과 부동산 투기는 금융시장의 유동성 공급 과잉 때문으로 봐야 한다. 고도성장기의 집값 상승과는 다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유화됐다가 다시 민영화된 은행들은 주주 중시 경영의 대명사가 됐다. 그 결과, 은행들은 단기 수익에 골몰하게 됐고 손쉬운 돈벌이인 주택 대출을 늘리게 됐다. 이렇게 늘어난 유동성이 부동산 거품을 키웠다. 개별 은행들로 보면 합리적인 선택이다. 주택이라는 확실한 담보가 있으니, 위험도 적다. 하지만 경제 전체로는 해롭다. 케인스가 말한 '구성의 오류'가 바로 이런 경우다.

프레시안 :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신랄하다. 같은 맥락에서 재벌 해체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예컨대 삼성그룹의 순환출자구조가 깨지면, 삼성 계열사가 국제투기자본의 사냥감이 될 거라는 주장이다. 재벌의 변칙적인 지배구조를 비판해 왔던 개혁 진영의 주장과 충돌하는 대목인데….

장하준 : 재벌, 특히 삼성은 참 나쁘다. 자식들에게 편법 상속을 했고, 우리 사회 엘리트들을 매수했다. 여기에 대해선 법에 따라 단호하게 처벌을 해야 한다. 하지만 삼성그룹을 해체하자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삼성 계열사의 주인이 누가 되나. 국가가 주인이 된다면, 그건 차라리 낫다. 하지만 실제론 해외 투기자본이 주인이 될 게다. 이건희 회장은 우리가 정체를 아니까 그나마 낫다. 집 앞에서 데모라도 할 수 있지 않나. 얼굴도 모르고, 어떻게 돈을 마련했는지도 모르는 투기자본에 대해선 저항하고 통제할 길이 없다. 삼성이 과거 사카린 밀수했다고 비난을 한다. 하지만 삼성그룹이 해체 됐을 때 새로운 주인이 될 자본이 꼭 깨끗하리라는 법은 없다. 마약 거래를 했는지, 무기를 팔았는지 어떻게 알 건가.

과거 재벌과의 대타협을 주장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재벌의 최대 관심사는 경영권 보장이다. 그걸 해주고, 대신 다른 부분에서 양보를 받자는 거다.

스웨덴의 거대 기업집단을 거느린 발렌베리 가문을 칭찬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건 이들 가문 구성원이 남달리 착하기 때문이 아니다. 차등의결권 제도를 통해 오너 일가에게 경영권을 확실히 보장해주는 대신, 거대 기업집단이 국민경제에 순기능을 하게끔 강제한 타협의 결과물이다.

주주들의 천국인 미국에도 차등의결권이 도입된 경우가 많다. 포드자동차가 대표적인 사례다. 총수 일가가 보유한 A주와 그렇지 않은 B주가 있는데, M&A 등 중요한 결정에선 B주 보유자들이 압도적으로 지지해도 소용이 없다. A주 보유자들 과반수가 동의해야만 한다. 나라마다 방식은 다르지만, 기업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는 대부분 있다. 독일의 경우, 노동자 이사가 비슷한 역할을 한다. 공장 매각, M&A 등의 결정은 노조의 동의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다.

하지만 한국에선 아무런 경영권 보호 장치가 없다. 주식만 사들이면 누구든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순환출자 같은 방식으로 경영권을 보호한 것이다. 유독 우리나라 재벌만 사악해서 선진국은 상상도 못한 경영권 보호 방법을 고안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기업지배구조의 모범, GM은 왜 망했을까?"

▲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경영권을 뺏길 수 있다는 위험이 경영자를 긴장하게 하는 면도 있지 않나. 또 주주자본주의가 강화되면 경영 투명성이 강화되리라는 기대도 있다.

장하준 : 구체적인 현실을 봐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내 대기업의 주주 배당률이 대폭 뛰어올랐다. 그래야만 주가를 높게 유지할 수 있고, 기업 사냥꾼들로부터 기업을 보호할 수 있다. 배당률이 높다는 건, 기업에 투자할 몫은 줄어든다는 뜻이다.

심지어 이익보다 더 많이 배당한 경우도 있다. 기업 사냥꾼인 칼 아이칸과 경영권 분쟁을 벌였던 KT&G의 경우, 2005년 주주 이익 환원율이 156퍼센트다. 이익을 다 퍼주고도 모자라서 내부 유보금까지 꺼내야 했다. 주주들에겐 신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게 전체 경제로서도 좋은 일일까. 아니라고 본다. 기업이 장기적으로 생존하려면, 미래를 대비한 투자를 해야 한다. 연구개발에 꾸준히 투자해야 하고, 직원 교육에도 돈을 써야 한다. 연구개발은 당장은 돈이 안 된다. 실패 위험도 있다. 하지만 기업이 오래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주주자본주의에선 이게 쉽지 않다.

좋은 예가 있다. 미국 자동차 산업을 대표했던 GM이다. 1955년 미국 자동차 생산량이 700만대였는데, 그 중 350만대를 GM이 생산했다. 지금 자동차 강국으로 꼽히는 일본에선 모두 합쳐서 연 7만대를 만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일본의 도요타가 1등이 되고 GM은 계속 쪼그라들다 파산할 것이라고 했다면 아마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게다. 하지만 자체 기술 개발에 소홀하고, 필요한 기술은 사들이는 방식으로 유지하던 GM은 결국 몰락했다. 이런 GM이 기업지배구조라는 면에선 최고 모범생이었다. 대주주가 없고 사외이사는 많다. 주주이익도 듬뿍 챙겨줬다. 반면, 포드는 지배구조가 정말 나쁜 회사다. 창업주 가족이 이사회에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지난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GM은 망하고 포드는 살아남았다. 지금 잘나가는 삼성전자라고 해서 GM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주주 이익만 생각하면, 연구개발 투자할 이유 없다"

핵심은 대다수 주주들은 기업의 미래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평균적으로 주식을 보유하는 기간은 계속 짧아지고 있다. 미래를 위한 투자보다 눈앞의 비용 절감을 환영한다. 그러다보니 기업은 연구개발 투자에 소홀해지고, 당장 수익이 안 나는 사업은 포기하게 된다. 또 끊임없이 정규직을 줄이려 들고, 협력업체를 쥐어짠다. 당연한 일이다. 그래야 주주들이 좋아하니까. 비정규직 확대, 협력업체의 몰락 등 최근 주목받는 쟁점들도 주주자본주의라는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

국내에선 KT가 좋은 사례다. KT는 기업 지배구조의 모범 사례로 종종 꼽힌다. 다른 재벌 기업처럼 전횡을 부리는 대주주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경영 투명성도 높다. 하지만 국민경제에 실제로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들여다보면, 칭찬하기 어렵다. 민영화 이후, 정규직이 대대적으로 잘려나갔다. 그들이 불필요한 인력이었던 걸까. 그렇지는 않다. 잘려나간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비정규직으로 다시 고용됐다는 점을 보면 말이다. 반면, 주주들에 대한 배당률은 매우 높다. 이사들 보수 역시 크게 뛰었다. 결국 다수 노동자는 울고, 주주와 경영진만 웃었다는 말이다. 또 주주 배당률이 높아지면서 연구개발 투자 역시 위축됐다. 이걸 왜 모범사례로 봐야하나.

내가 인터뷰할 때마다 드는 사례인데, 외환위기 이후 이공계가 주저앉고 의대 인기가 폭등한 것은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예전에는 대기업에서 핵심 업무를 담당한 이들은 미래를 크게 불안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주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경영방식이 자리 잡은 지금은 달라졌다. 당장 수익을 내지 못하면, 누구든 고용이 불안해졌다. 회사 생활이 과거보다 훨씬 팍팍해졌다. 회사원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직업으로 젊은이들이 몰리는 게 당연하다.

▲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복지는 '공동구매'다"

프레시안 : 최근 복지 담론이 떠오른 것도 그래서다.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임계치에 달했다.

장하준 : 복지가 바로 경제 민주화의 핵심이다. 사회적 약자에게만 복지를 제공하는, 미국식 잔여적 복지에는 미래가 없다. 잔여적 복지는 비용을 부담하는 측과 혜택을 입는 측이 서로 다른 방식이다. 부자들에게서 거둔 돈으로 가난한 이들이 굶어죽지는 않게끔 하자는 것이다. 부자들 입장에선 자신들과 전혀 무관한 일에 돈을 써야 하는 셈인데, 당연히 돈을 덜 쓰게끔 하는 방향으로 압력을 넣게 된다. 이런 압력이 쌓일수록 복지 규모는 줄어들게 된다. 결국 보편적 복지가 답이다. 모든 사람이 복지 혜택을 누리고, 동시에 모든 사람이 비용을 대야 한다. 이처럼 수혜자와 돈 내는 사람이 일치해야만 지속 가능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비용 문제를 들고 나온다. 하지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복지 예산은 내버리는 돈이 아니다. 일종의 공동구매 개념으로 봐야 한다. 수요가 많은 상품을 구매할 때 공동구매를 하면 싸게 살 수 있다. 예컨대 무상의료가 이뤄지는 나라에선 약값이 싸다. 정부가 공동구매를 하기 때문이다. 이걸 시민 각자가 따로 산다면, 결국 낭비다. 의료, 교육, 보육, 노후 대비 등 누구에게나 필요한 서비스를 공동구매하는 것. 그게 복지다. 그리고 그걸 위해 돈을 갹출하자는 게 복지 강화 주장이다.

복지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사회안전망이 튼튼하면, 산업간 인력이동도 쉽다. 부실산업에서 퇴출된 인력이 생계 걱정 없이 새로운 산업이 요구하는 기술과 지식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복지가 잘 돼 있는 나라들이 경제 위기 속에서도 안정적인 성장을 한다.

복지 강화가 필요한 이유는 또 있다. 바로 한·미 FTA, 한·EU FTA 때문이다. 선진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으면, 취약한 분야에선 탈락자가 속출하게 된다. 이들이 재기할 수 있게끔 하는 사회 안전망이 필수적이다.

"60년대에 FTA 맺었다면, 삼성은 지금도 설탕회사"


▲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FTA에 대해 줄곧 비판적이었다. 한·미 FTA가 발효됐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이라도 폐기해야 할까.

장하준 : 당장 폐기하는 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국제 정치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야 할 것 같다. 다만, 한·미 FTA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한·EU FTA 역시 문제다.

선진국과 자유무역협정을 한다는 건 제조업 육성을 지금 수준에서 동결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한국이 1960년대에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고 가정해보자.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지금처럼 세계시장을 주름잡을 수 있을까. 아마 삼성은 지금까지도 설탕 사업을 주력으로 삼고 있을 게다. 국가가 전략적으로 산업을 지원하는, 적극적인 산업정책이 있었기에 한국의 제조업이 성장할 수 있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산업 강국은 모두 정부의 산업정책이 낳은 결과물이다. 시장경제 논리의 본산인 미국이라고 다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세계 최고 수준인 제약 산업은 미국 보건성이 지원한 연구자금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정보통신 산업, 항공 산업 등도 마찬가지다. 미국 국방성이 지원한 연구자금이 밑거름이다. 또 국가가 전략적으로 지원한 과학기술 연구 역시 빠뜨릴 수 없다. 이런 점은 간과한 채, 정부의 산업정책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건 잘못이다.

"한국은 제조업 선진국 아니다…부품 소재·정밀기계 키우는 산업정책 필요"

프레시안 : 과거 한국도 강력한 산업정책을 활용했다. 박정희 정권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이 바뀌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엔 한국이 과학기술과 산업의 후진국이었다. 따라서 엘리트 관료들이 선진국으로부터 '매뉴얼'을 가져와서 재벌에게 이식하는 방식이 통했다. 국내 재벌들 역시 선진국 기업을 따라가는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다. 휴대폰, 자동차, 조선 등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한국 대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입장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선 과거의 산업정책, 즉 선진국 '매뉴얼'을 따라하는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재벌 입장에선 새로 모험을 걸만한 투자처 역시 막막하다. 재벌이 빵집을 차리는 식으로 손쉬운 돈벌이에 골몰하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고 본다. 과연 박정희 정권 시절에 통하던 산업정책이 지금도 효과가 있을까.

장하준 : 한국이 제조업 선진국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몇몇 분야만 뛰어날 뿐이다. 한국의 제조업 생산성은 미국의 절반 수준이다. 기술 수준 역시 뒤쳐진 분야가 많다. 예컨대 정밀기계, 부품소재, 제약 등은 선진국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 이런 분야에선 적극적인 산업정책이 필요하다. 또 충분히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분야다.

하지만 FTA 체결로 인해, 우리가 키워야 할 첨단 제조업 분야는 영원히 발전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 또 한·미 FTA 체결 이후, 미국식 제도가 이식되면서 주주자본주의가 강화된다면 설령 막대한 자금을 가진 재벌이라고 해도 장기 투자를 하기 어려워진다. 당장은 손해지만 길게 보면 이익이 될 분야에 연구개발 투자를 한다면, 당장 주주들이 반발하고 나설 게다.

"삼성생명 국유화하고 삼성전자 경영권 보장해주는 빅딜, 지지한다"

프레시안 : 앞서 경제 민주화의 핵심이 보편적 복지라고 말했다. 또 재벌과의 대타협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했다. 복지 강화 주장은 개혁진영으로부터 지지를 받지만, 재벌 총수에게 경영권을 보장해주자는 주장은 반대다.

그런데 복지 강화와 재벌 개혁이 만나는 지점도 있다. 예컨대 보험회사 문제다. 보험산업은 부실한 사회안전망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편적 복지가 확대되면 일반인을 상대로 한 보험업은 아무래도 위축된다. 예컨대 건강보험 보장성이 대폭 강화되면, 민간 의료보험 상품을 구매할 이유가 사라진다. 실제로 비용 대비 혜택으로 보면, 국민건강보험이 민간 의료보험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당연히 재벌 계열 보험사들은 복지 확대 주장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복지 확대 주장은 이 대목에서 재벌과 정면충돌한다. 그렇다면, 주요 보험회사를 국유화하는 게 옳지 않을까. 예컨대 삼성그룹이라면, 이건희 회장 일가에게 삼성전자 경영권은 보장해주되 삼성생명은 국유화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특히 국내 생명보험사는 보험 계약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장하준 : 유럽 복지국가에서 대기업과의 사회적 대타협이 거저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대기업 국유화'를 포기하고 총수에게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복지국가 건설에 동참하라고 압박한 결과다. 국유화 자체도 꼭 나쁘게만 볼 게 아니다. 투기자본에게 기업을 넘기는 방식의 재벌개혁보다는 차라리 재벌 기업 국유화가 낫다고 본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다수 국민을 대표해서 재벌을 통제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삼성생명 국유화와 삼성전자 경영권을 맞바꾸는 빅딜, 나도 지지한다. 이런 식의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총수 일가를 몰아내는데 그치는 개혁은,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뉴스를 보는 잠깐 동안만 즐겁게 해줄 뿐이다. 그 뒤엔 더 고통스러운 시간이 기다린다. 이젠 발상을 바꿀 때다. 시장 논리, 주주자본주의 논리를 강화해서 재벌을 개혁한다는 주장은 틀렸다.



/성현석 기자(=정리)

2012년 1월 17일 화요일

장하준 “‘잃어버린 10년’, 전세계가 겪을 수도”


이글은 시사인 2012-01-17일자 기사 '장하준 “‘잃어버린 10년’, 전세계가 겪을 수도”'를 퍼왔습니다.
장하준 교수는 2012년 세계경제는 회복되기 힘들고 앞으로도 조금 나아졌다가 계속 퇴보하는 장기 불황이 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유럽에서는 재정위기가 진행 중이고, 미국 경제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중국이 세계경제의 견인차 노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처럼 세계경제는 오리무중 국면이다. 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장하준 교수를 만나 ‘솔직한 전망’을 부탁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었다.

2008년 가을 금융위기가 터지자 각 나라가 협력해서 위기 국면을 봉합했다. 다시 심각한 상황이 오고 있는 이유는?
전 세계가 공조해서 재정과 통화를 팽창시켰다. 위기를 일단 진정시키고 숨 쉴 구멍을 만들려는 단기 정책이었다. 환자의 경우라면 영양제를 준 것인데, 영양제로 환자가 치료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 금융 개혁도 하고 필요한 투자도 해서 궁극적으로는 경제를 회복시켜야 했다. 그러나 경기가 조금 회복되자 각국은 재정적자를 줄인답시고 정부의 역할을 다시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송인호 제공

특히 유럽은 점입가경인 것 같다. 해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만약 독일이 갑자기 ‘그리스도 유럽연합(EU)의 한식구인데 끝까지 도와주자’고 마음을 바꾼다면 좋겠으나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지금 EU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은, 그리스 등 재정위기로 어려운 나라를 조금 더 도와주되 이에 대해 엄청나게 조건(구제금융 조건)을 붙이겠다는 거다. 그 조건의 내용은 ‘도움받는 나라’가 재정긴축 등으로 자국 경제를 더욱 축소하는 방향으로 맞춰져 있다. 결국 ‘위기 국가’들의 경우 구제금융을 받아서 당장 급한 불을 끈다 해도 자국 경제를 축소 지향적으로 운영해야 하고, 이렇게 되면 경제의 틀을 바꿔 성장을 재개하기도 어렵게 된다. 그리스, 아일랜드 등이 모두 비슷한 처지다.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다보면 그 나라 내부에서 EU와 유로존을 탈퇴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고, 이는 결국 EU 자체가 흔들리는 국면으로 갈 것이다. 즉, 구제금융을 통해 단기적으로는 위기 상황을 봉합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몇 나라가 떨어져 나갈 가능성도 있고, 그렇다면 지금 같은 형태로 EU나 유로화가 유지되기는 힘들 것이다.
예컨대 그리스가 구제금융을 무사히 받는다 해도 ‘위기’에서 빠져나오기는 힘들다는 것인가?
그리스가 국가부채를 줄여서 안정적 상황으로 들어가야 EU 전체의 금융시장 혼란도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구제금융 조건(재정지출 감축)을 준수하면 할수록 경제가 더욱 침체되어 빚 갚을 능력이 오히려 작아진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될 텐데 그리스가 어떻게 돈을 벌어 부채를 줄일 수 있겠는가. 물론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할 수 있다면 수출을 늘려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아이슬란드는 유로존에 속해 있지 않으므로 이 방법을 통해 다소나마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나 스페인은 유로화를 사용하고 있으니 평가절하도 못한다. 평가절하도 못하는 상황에서 강도 높은 재정긴축을 해야 하니, 빠져나올 길이 없는 것이다.


ⓒ시사IN 조우혜 장하준 교수는 한·미 FTA 발효가 조금씩 한국 경제를 잠식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유럽 위기가 풀리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결국 EU라는 시스템 자체 때문이라는 소리도 있다.
유로권 전체의 재정적자는 GDP 대비 6% 정도인데 미국보다 훨씬 양호한 편이다. 그러나 치명적 문제는, 유로존 국가들이 단일 통화를 사용하는 강도 높은 경제통합을 이루긴 했으나 사실은 ‘하나의 나라’라는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예를 들어 강릉시가 재정위기에 빠졌을 때 서울 사람들이 ‘저건 강릉의 문제니 도와주면 안 된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네덜란드·핀란드에서는 ‘왜 그리스에 돈을 대주냐’며 항의한다. 그래서 위기가 해결되지 않는 거다. 시민들은 같은 나라라는 의식도 없는데, 이 나라 저 나라 섞어 너무 빨리 통합한 것이 화근이다.
더욱이 올해에는 유럽에 선거가 많다. 각국 정당이 시민들 눈치를 보게 되면서 금융위기 극복이 더 어렵게 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전체 EU에 대해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유럽 유권자들은 선거 때마다 매우 조건반사적인 반응을 보여왔다고 생각한다. 선거를 하면 집권당은 좌파든 우파든 무조건 쫓겨나는 경향이 있었다. 올해부터는 유럽 시민들이 현재의 난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이를 선거에 반영하기 바란다. 그러나 예측이 쉽지 않은 이유가, 나라마다 정치적 구도가 다른데, 일부 국가에서는 EU를 탈퇴하고 이민도 받지 말자는 극우파 정당이 세를 얻을 정도로 정세가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핀란드,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 이런 정당이 득세하고 있다. 4월 프랑스 선거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유럽 정세에 큰 영향을 줄 것 같다.
유럽 국가들이 어려운 것은 ‘과잉 복지’로 인한 재정위기 때문이란 이야기가 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재정적자 문제가 금융위기 이전에 심각했던 나라는 그리스밖에 없다. 그리스는골드먼삭스 같은 대형 투자은행과 공모해서 재정적자 규모를 감추는 짓까지 했다. 이에 비해 아일랜드는 금융위기 이전 10년 동안 오히려 GDP 3% 규모의 재정흑자를 내던, 매우 우량한 국가였다. 금융허브 육성한다고 날뛰다 완전히 망한 거다.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도 2~3% 선에서 재정흑자나 적자를 내는 등 비교적 양호했다. 재정 문제가 심각한 나라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더욱이 위기에 빠진 남유럽 국가들은 EU 지역에서는 오히려 복지제도가 약한 나라들이다.
그런데 현재는 재정적자 규모가 무시무시할 정도이던데.
역시 복지와는 상관없다. 유럽 나라들은 은행들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다가 엄청난 재정을 탕진했다. 이에 더해 금융위기로 나라 경제가 마비되자 세수가 크게 떨어졌다. 이처럼 재정위기 원인 제공자인 금융자본들이 한동안 ‘잘못했다’며 납작 엎드려 있다가 일제히 “정부 때문이야, 복지 때문이야”라며 ‘엎어치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어떤가. 최근 ‘소비자 신뢰지수’가 소폭 오르고 실업급여 신청 건수가 내려가는 등 간만에 일부 경제지표가 호전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글쎄다. 최근 실업률이 줄었다는 이야기는 있으나 그것은 아마 구직 포기자가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구직 포기자까지 감안한다면 미국 실업률은 15~17%에 이른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다. 미국 경제에는 아직 확실한 회복 기미가 없다. 2008년 위기의 원인이었던 미국 주택시장 또한 거의 회복되지 않고 있다. 주택 가격이 오르기는커녕 떨어지고 있는 지역이 대부분이다. 이에 더해 지난여름, 정부부채 상한 확대를 두고 미국 정치권에서 난리를 치다가 결국 정부지출을 대폭 줄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나. 그래서 올해부터 정부지출을 본격적으로 깎기 시작하면 이 때문에 경기가 더욱 냉각될 것이다. 영국도 정부지출을 대폭 깎았는데 지난 1년의 성장률이 거의 0%에 가깝다. 미국에도 비슷한 경기냉각 효과가 있을 것이다. 미국의 경우, 금융위기 책임자들이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가장 피해를 보는 재정긴축을 실시하려 한다. ‘미국 경제는 부자한테는 사회주의, 가난한 사람한테는 자본주의’란 말이 있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안 좋은 이야기만 하시는 것 같다.
그렇긴 하다. 하지만 좋은 소식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나. 

세계 경제성장의 견인차라는 중국이 있지 않은가? 
글쎄다. 중국이 그나마 성장한다 해도 세계경제에 크게 좋은 효과를 주기는 힘들다. 중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에 불과하다. 각각 25%의 비중을 차지하는 미국과 유럽에 비하면 너무 작다. 중국의 수출 의존도가 너무 높은 것도 문제다. 중국은 세계 금융위기 직후 엄청난 규모의 정부지출을 했고 그 덕분에 지난 2~3년은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 경제가 침체된다면 중국의 수출 또한 급락하고 이에 따른 충격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 일본 역시 수출 의존도가 높은 나라인데, 그 규모가 최대였던 1980년대 말에도 15% 정도였다. 그런데 중국은 25~30% 수준이고 그래서 수출이 어려우면 충격도 훨씬 클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중국이 정부지출로 투자한 사업에서도 각종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정부지출로 도로와 공항, 철도를 건설했고 여기서 수익이 나야 하는데, 결과가 별로 좋지 않다. 다른 불안 요인도 많다. 해외에서는 잘 모르지만 연간 수만 건에 이르는 폭동과 파업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빈부격차가 계속 확대되어왔기 때문이다. 중국의 급격한 성장이 앞으로도 지속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느 나라가 기관차 역할로 세계경제를 끌어갈 수 있겠는가. 큰 문제다.

중국도 올해 정권교체가 있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내수를 키우겠다고 해왔다. 이는 미국이 요구해온 위안화 절상과도 맞물려 많은 기대를 모아왔다. 정권교체가 내수 확대와 위안화 절상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은 없을까?
중국 정치는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래서 새 인물이 들어온다고 중국 체제가 바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수 확대는 단기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내수 키운다는 것이 말이 쉽지, 정부가 더 소비하라고 한다고 인민이 실제로 더 소비할 수 있겠는가? 
예컨대 중국인들이 적게 소비하고 저축을 많이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복지제도가 잘 갖춰지지 않아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 복지 시스템을 하루아침에 대폭 확대할 수 있겠나. 더욱이 상하이처럼 매우 발달한 도시가 있지만, 농촌 지역에서는 돈을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다. 쇼핑센터도 없고 신용카드도 크게 확산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도 한때 저축률이 엄청나게 높은 나라였지만 지금처럼 ‘저축률 낮은 국가’가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내수 키우기가 말은 쉬운데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은 아니다.

2012년 세계경제는 한마디로 막막하다는 결론인가?
올해뿐 아니라 그 후에도 어디서 어떻게 회복될지 불확실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세계 각국은 재정·통화 팽창으로 번 시간에 구조조정을 본격화하면서 새로운 성장모델을 만들어야 했다. 이른바 녹색성장도 그런 모델 중 하나였다. 그러나 결국 시간만 낭비한 것으로 끝났다. 돈을 풀긴 했으나 그 돈은 생산적 부문에 투자되기보다 투기성 자금으로 변신해서 여기저기로 쏘다니며 세계경제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돈이 생산적 부문에 쓰이게 하려면 금융개혁이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금융개혁 역시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세계 금융위기를 일으킨 독성 자산, 주택시장 붕괴 따위 근본적 문제는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다. 이런 와중에 미국과 유럽이 긴축정책 한답시고 칼 빼들고 나서서 안 그래도 어려운 경제를 더욱 망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올해뿐 아니라 이후 몇 년간 전망이 어둡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일본이 겪었던 ‘잃어버린 10년’을 전 세계가 겪게 될지도 모른다. 다른 시나리오가 보이지 않는다.

장기 불황이 아니라 공황이 닥칠 가능성은 없는가?
글쎄. 예측하기 힘들다. 물론 아직 불안 요인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미국의 상업용 부동산 부문의 경우, 대출상환 기간이 2013~2014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부문에서 대형 부도가 터지거나 중국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해서 세계경제 전체에 엄청난 쇼크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나는 ‘큰 것’은 이미 대다수가 터졌다고 본다.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세계경제가 조금 성장하는 것 같다가 퇴보했다가 하는 일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장기 불황이다.
예컨대 그리스가 유로존 탈퇴와 디폴트를 선언하고, 이 나라에 많은 돈을 빌려준 프랑스와 독일 은행들이 패닉 상태에 들어가며, 다른 한편으로 이런 위기가 안 그래도 취약한 이탈리아나 스페인을 자극해 유럽과 세계경제의 갑작스러운 공황으로 폭발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 디폴트만으로는 감당 못할 쇼크가 아닐 거다. 그리스 GDP는 EU의 2% 정도로 작은 편이니까. 물론 그리스 위기가 이탈리아, 프랑스 등으로 전염되면 그런 공황 상태로 귀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런 상황이 온다면 (현재는 대규모 지원 못한다고 버티고 있는) 유럽중앙은행이 대규모 자금을 동원해 개입한다거나 하는 조처들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로존이 갑자기 붕괴하는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으리라 예측한다.

한국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 정부는 올해 초엔 한·미 FTA를 발효시킬 예정이다. 전망이 어떤가?
그 효과는 장기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발효하자마자 하루아침에 나라가 이상해지진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점점 문제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한·미 FTA는 이미 발효되어 있는 한·EU FTA와 맞물리면서 조금씩 한국 경제를 잠식해 들어갈 것이다. 특히 신성장 산업들은 점점 더 발전하기 힘들 것이다.
신성장 산업이라면?
나노·바이오·녹색 등 아직 한국에서 발전되지 않았지만 세계적으로도 새로운 산업을 신성장 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앞으로 키워야 할 기계·부품·화학·제약 등도 신성장 산업이라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독일·스위스·이탈리아가 선두인 정밀기계와 화학 부문에서 한국은 점점 더 발전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EU와 자유무역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다.

올해 총선과 대선의 최대 이슈는 복지일 것 같다. 야권은 물론 여권까지 최근 복지 공약들을 내놓고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사회 합의도 이뤄진 것 같다. 그런데 선생님에 따르면 2012년엔 불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복지국가 건설은 물 건너가는 것일까?
복지는 불황일수록 더 힘을 발휘하는 것 아닌가. 불황이 닥쳐도 시민들의 기본 소득이 보장되어야 어느 정도 소비가 가능하고 그나마 경제가 돌아가서 극단적인 사회불안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불황으로 실업한 사람들이 복지 서비스를 통해 재기할 수 있을 것이다. 피해 규모로 보면(추산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번 위기가 1930년대의 대공황보다 더 크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도 선진국 사회가 그때처럼 붕괴되지 않는 것은 1930년대와 달리 복지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복지 시스템 운영의 경우, 불황기에는 세수가 줄고 지출이 늘기 때문에 정부 재정에 큰 부담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시민들 처지에서는 불황이야말로 복지의 중요성을 진정으로 실감할 수 있는 시기다. 이런 측면에서 불황은 복지에 ‘양날의 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수가 걷히지 않으면 어떻게 복지 시스템을 가동시킬 수 있겠는가?
개인 생활에서도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예컨대 병원에 간다거나 자녀를 대학에 보낸다거나… 이런 경우엔 다른 소비를 줄이거나 빚이라도 내지 않는가. 국가 살림에서도 마찬가지다. ‘없어서 못한다’는 것은 ‘하기 싫다’는 말이다. 복지가 필요하고 시민들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다른 데서 줄이고 복지에 쓰면 된다. 그래도 모자라면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
최근 한나라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으로 거론된다는 이야기가 이런저런 신문에 났다. 가끔 박근혜 의원과의 정치적 관계를 시사하는 보도가 나오던데 이에 대한 공식 의견을 듣고 싶다.
나도 신문에 난 거 보고 알았다. 

놀랐나?
그동안 온갖 억측에 별 소릴 다 들어봤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물론 내가 그동안 정책적 사안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정당정치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한나라당에 그런 위원회가 생겨서 강연을 부탁하고 또 시간이 맞으면 기꺼이 강연하러 갈 것이다. 민주통합당이나 통합진보당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특정 정당, 특정 후보의 무슨 위원이나 당원, 후원자가 되는 것에는 관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