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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4일 수요일

[사설]법관의 품위와 국민 신뢰


이글은 경향신문 2012-01-03일자 사설 '[사설]법관의 품위와 국민 신뢰'를 퍼왔습니다.
법관의 품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법관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과 신뢰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우리가 이런 해묵은 질문을 새삼스레 던지는 까닭은 양승태 대법원장이 엊그제 시무식에서 바로 이러한 주제로 자신의 견해를 밝혔기 때문이다. 양 대법원장은 “국민은 법관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지혜롭고 공정하며 품위와 자질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며 “이런 국민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법관과 재판에 대한 신뢰가 싹틀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언급은 나무랄 데 없을 정도로 교과서적인 모범답안이며, 일선 법관들이 재판의 지침으로도 삼을 만하다. 문제는 그가 법관의 품위를 너무 협소하게 해석하고 있으며, 법관에 대한 국민 신뢰 형성을 위해서는 법관 개개인에게 그 무엇을 요구하기 이전에 자신을 포함한 법원 수뇌부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양 대법원장이 ‘품위 없는 법관’을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얼마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날치기를 비판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을 ‘뼛속까지 친미’ 등으로 표현한 인천지법 최은배 판사와 ‘가카새끼 짬뽕’ 등의 대통령 패러디물을 페이스북에 올린 창원지법 이정렬 판사 등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치편향적이거나 대통령을 조롱하는 글에 대해 대법원장이 우려를 표시한 것”이라는 대법원 관계자의 언급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우리도 법관이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할 경우 품위를 잃을 수 있으며, 법관에 대한 사회적 존경과 신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관의 품위는 법정 밖에서의 말 몇마디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고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가, 그러한 고민을 양심과 소신에 따라 얼마만큼 재판에 녹여내고 있는가 등이 법관의 총체적인 품위와 국민 신뢰를 결정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런 측면에서 최 판사와 이 판사는 최근에 문제가 된 ‘흠결’을 몇배 상쇄하고도 남을 전향적인 판결로 우리 사회에 기여했다고 본다. 

양 대법원장을 비롯한 법원 수뇌부는 신영철 대법관 파동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서울중앙지법원장 시절 신 대법관은 촛불집회 재판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일선 판사들로부터 사실상 탄핵을 당했으며,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그는 ‘뼛속까지 친미’ 등의 ‘품위 없는’ 표현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지만 과연 어느 누가 그를 품위 있는 법관으로 여기고, 존경과 신뢰를 보내겠는가.

2011년 12월 20일 화요일

[사설]조의 표명, 남북관계 개선 계기 될 수 있다


이글은 경향신문 2011-12-19일자 사설 '[사설]조의 표명, 남북관계 개선 계기 될 수 있다'를 퍼왔습니다.
김일성 주석 사망 3일 뒤인 1994년 7월11일 당시 민주당 이부영 의원은 임시국회에서 정부에 조문 의사가 있는지 질의했다. “정부가 대화의 필요성을 갖고 있다면” “이미 결정된 남북정상회담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면” 등의 전제가 달린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 의원의 발언은 남한 사회에 내재돼 있던 냉전의 광기를 터뜨리는 기폭제가 됐다. 수구언론은 ‘수백만명을 죽인 전범에게 무슨 조문이냐’며 연일 융단폭격을 가했고, 이 의원 등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망동분자’로 몰아붙였다. 이 때문에 온 나라가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했다. 

17년 전의 일을 새삼 거론하는 까닭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과 관련해 제2의 조문파동이 발생하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른 데다 북한도 장례가 끝나는 28일까지 외국의 조문사절을 받지 않겠다고 밝힌 만큼 이러한 평지풍파가 일어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김 위원장의 사망에 정중하고도 격식을 갖춘 정부 차원의 조의 표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형식이 조전(弔電)이 됐건, 정부 당국자의 구두 성명이 됐건 구체적인 방법과 수준은 논의하면 될 일이다. 요컨대 남한 정부가 북한 최고지도자의 사망에 예의를 갖춘 조의를 표명함으로써 남쪽에 대한 북쪽의 뿌리깊은 불신과 의구심을 일정하게 씻어줄 수 있는 것이다. 평범한 사인(私人)들 사이에도 해묵은 반목과 질시, 갈등과 증오가 진심어린 조상(弔喪)을 계기로 어느 정도 극복되고 치유되는 경우가 있다. 국가와 국가의 사이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참혹한 동족상잔을 겪었으며, 최근까지도 무력충돌을 경험한 남북한 사이에는 이러한 필요성이 더욱 높다고 하겠다. 

극단적인 수구냉전세력이 아니더라도 ‘연평도에 포탄을 퍼부어 사람을 죽였는데 무슨 조의표명이냐’는 목소리가 일반인들 가운데서도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자연인이라면 자신의 도덕률과 감정에 따라 행동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국가공동체 전체의 이익에 부합한다면 적에게도 예의를 갖출 수 있어야 한다. 국공내전의 당사자였던 중국과 대만도 각각 상대의 최고지도자인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사망했을 때 조의를 표명하지 않았던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4년간의 남북관계는 민간 차원까지 얼어붙을 정도로 악화돼 있다. 정부는 북측 최고지도자의 죽음에 조의를 표명함으로써 최소한의 신의를 쌓고, 이를 경색된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