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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14일 화요일

친일파 응징 실패한 한국의 반면교사②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2-14일자 기사 '친일파 응징 실패한 한국의 반면교사②'를 퍼왔습니다.
[김종철의 언론과 권력(7)] 프랑스의 나치 청산(2)

드골의 임시정부는 나치 점령군과 비시 정권의 지시와 규정에 순종한 언론사에 대해 일체의 발행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신문의 소유주나 회장 또는 사장이 나치에 협력한 혐의로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 받으면 그 언론사는 바로 문을 닫아야 했다. 그리고 나치 독일의 점령기간에 신문을 발행한 언론사는 그 제호를 어떤 경우에도 계속 쓸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나치 점령군과 비시 정권의 지시와 규정에 순종한 신문사의 소유주나 회장 또는 사장’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천황을 찬양하고 대동아전쟁을 성전이라고 미화한 조선의 신문 소유주나 회장 또는 사장’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자.
김성수는 조선총독부가 1940년 8월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하기까지 그런 논조를 끊임없이 펼쳐온 신문의 사주였다. 그는 폐간 이후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천황 폐하께 충성하기 위해 성전에 나가라’고 권유하는 글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쓰는가 하면 국민총력조선연맹, 흥아보국단 등 전쟁협력단체에 임원으로 참여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순회강연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김성수가 1943년 11월 6일자 매일신보에 실은 글(‘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대의에 죽을 때 황민 됨의 책무는 크다’)의 일부는 아래와 같다.
“현하 우리가 당면한 의무라고 하면 제군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여명을 맞이하여 인류 역사에 위대한 사업을 건설하려는 대동아 성전에 대해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인 것이다. (···) 만일 제군이 금차 대동아성전에 참여하지 못하고 대동아 신질서 건설이 우리의 참가 없이 완수된 날을 예상하여 보라. (···)
동양에서는 고래(古來)로부터 의무를 다하는 데 필연적으로 권리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황민화를 고창하여 온 이래 제군이 자주 자신의 황민으로서의 권리를 일반사회에 대하여 요구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하면 일본은 3천년이라는 오랫동안 금일의 제국의 광영을 빛내는 데 온갖 의무를 수행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는 겨우 그동안 30년밖에 안 된다. 30년과 3천년의 차를 가지고 권리에 있어서 평등을 요구할 수 있을까. (···)
제군의 희생은 결코 가치 없는 희생이 안 될 것을 나는 확언한다. 제군이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반도의 장래는 오직 제군의 거취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일보사 사주 방응모는 동아일보의 김성수와 상업적 경쟁에 몰두하면서 ‘천황 폐하에게 충성’을 바치는 데는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그는 조선일보가 폐간되기 전인 1938년부터 동아일보사 사장 백관수와 함께 ‘시국강연’을 다니고, 1929년 5월에는 ‘조선춘추회’가 주최한 ‘배영(排英) 궐기대회’에서 ‘황군 만세’를 선창했다. 그는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잡지 을 독립시켜 사장을 맡고 김활란, 주요한, 박흥식 등 ‘명사’를 등장시켜 친일 논조를 펼쳤다.
친일을 넘어 부일이라고 할 만한 방응모의 행적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1943년 11월 14일 ‘출진학도 격려대회’를 연 뒤 거액을 들여 일본군 사령관에게 고사포를 기증했다. 그런 뒤 방응모는 비행기를 제조하는 전쟁협력회사인 조선항공공업회사의 중역이 되었다. 그는 1944년 8월 ‘황민화 정신과 일본 정신 체득’을 위해 국어(일본어)를 상용하자고 주장하는 글을 조광에 실으면서 극단적 부일로 치달았다.
해방된 조선에 ‘일제협력자 숙청재판소’가 설치되었다면 김성수와 방응모를 비롯해서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부역한 언론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연감 2003년 판은 나치협력자 숙청에 관련된 프랑스인이 150만~200만 명이라고 기록했다. 비시 정권 지도층을 심리한 최고재판소는 108건을 재판해서 18명에게 사형을 선고(그 가운데 사형 집행은 총리 라발 등 3명)하고 25명에게는 종신강제노동형과 징역형을 선고했다. 각 지방재판소는 모두 14만여 건을 재판해서 4만1천여 명을 무혐의로 석방하고 4만1천여 건을 시민법정에 넘겼다. 재판 결과 6,763명에게 사형(그 가운데 779명 집행), 2,777명에게 종신강제노동형이 선고되었다. 사형이 집행된 사람들 가운데는 신문 사장 쉬아레즈, 신문 편집국장 브라지야크, 신문 사장 장 뤼세르, 방송 사장 장 파키가 들어 있었다.(, 339~340쪽)
의 지은이 주섭일(언론인)은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프랑스는 드골과 반나치저항운동세력이 단결함으로써 나치협력 민족반역세력을 완전히 숙청할 수 있었다. 이것이 새 프랑스 건설을 성공시킨 동인이 되었다. 다시 말해 우파인 드골의 임시정부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중심인 반나치저항세력이 단결해 나치협력세력을 완전히 숙청함으로써 해방 후 드골의 우파와 좌파세력을 통합하는 민족해방세력을 중심으로 새 프랑스 건설의 주체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
드골의 나치협력자 대숙청은 단순히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도덕적 차원의 해석보다는 ‘반역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후세에 중대한 교훈을 남겨준 사실에서도 큰 의미를 찾는다. ‘과거를 망각하는 민족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드골의 나치협력자 숙청은 잘 반영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어떤가? 김성수가 부일과 친일의 도구이자 축재의 수단으로 사용하던 동아일보는 그의 아들과 손자를 거쳐 증손자에게 ‘세습’되어 있다. 김성수의 후손들은 하나같이 그의 민족반역행위를 부인해 왔다. 조선일보 역시 그의 아들들을 거쳐 손자에게 대를 이어 물려졌다. 조선일보사를 경영하던 방응모의 아들은 독재정권 시절에 ‘밤의 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사장인 그의 손자가 ‘여성 연기자와의 성추문’에 시달리던 때 조선일보는 ‘총력’을 기울여 그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선조가 공인으로서 역사적 과오를 저질렀을 경우, 후손들은 그의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에게 사죄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가 남긴 사회적 자산을 물려받아야 한다. 그러나 동아와 조선의 족벌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바로 오늘도 정반대 길을 가고 있다. 이 해묵은 악덕을 누가 어떻게 척결할 것인가?

2012년 2월 13일 월요일

친일파 응징 실패한 한국의 반면교사


이글은 프레스바이플 2012-02-12일자 기사 '친일파 응징 실패한 한국의 반면교사'를 퍼왔습니다.
[김종철의 언론과 권력(6)] 프랑스의 나치 청산 (1)

1940년 8월 10일에 폐간되었던 조선일보는 해방 뒤인 1945년 11월 23일, 동아일보는 12월 1일에 복간되었다. 복간된 뒤 한 동안 조선일보는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의 민족주의 노선에 동조하는 논조를 펼쳤다. 동아일보는 사주인 김성수가 주도하는 한민당의 대변지나 다름없는 기사와 논설을 실으면서, 국내 정치적 기반이 약해 보수세력인 한민당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이승만을 지지했다.


역사를 바로 세우려면 일제강점기에 부일(附日)이나 친일 행위를 한 자들을 처벌하거나 응징하는 법적 절차가 당연히 있어야 했다. 그래서 1948년 5·10 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가 구성된 뒤 소장파 의원 김광준의 주도로 친일파 처벌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규정이 헌법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해 8월 5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원 김웅진이 ‘반민법안’을 기초할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자는 긴급동의안을 제출했다. 재적의원 155명 가운데 105명 찬성, 16명 반대로 동의안이 가결되어 ‘특별법기초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기초위원회는 미군정기 과도입법의원이 제정한 특별조례법을 바탕 삼아 전문위원들이 만든 초안을 중심으로 일본의 ‘공직자 추방령’, 중국 장개석 정부의 ‘전범처리법’, 북조선인민위원회의 관련 법안들을 참조해서 8월 6일 ‘반민족행위 처벌법(약칭 반민법)’ 초안을 상정했다.


부일이나 친일 전력이 있는 의원이 많은 한민당과 이승만 추종세력을 중심으로 반민법 제정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이 치열하게 벌어졌으나 국회는 9월 7일 찬성 103명, 반대 6명으로 반민법안을 의결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참여하거나 협력한 자들을 응징하고 오욕으로 얼룩진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마련된 것이었다.


1948년 11월 26일 반민법 제8조를 근거로 도별로 한 명씩 조사위원을 선출한 뒤 10월 23일 10명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위원장에는 김상덕(경북), 부위원장에는 김상돈(서울)이 선출되었다. 반민특위는 조사를 맡을 특별조사위원회, 기소와 송치 업무를 담당할 특별검찰, 재판을 진행할 특별재판소를 국회 안에 설치했다. 당시 경찰과 검찰, 법원의 주요 직책 대부분을 친일파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5일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 8일 화신재벌 총수 박흥식에 이어, 일제 헌병 앞잡이로 25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밀고한 혐의로 대한일보사 사장 이종형,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최린 등을 체포했다.


1949년 5월 20일 검찰은 반민특위에서 일하던 소장파 국회의원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를 체포했다.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로 일했다는 것이었다.(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 23일 열린 임시국회는 구속된 의원들에 대한 석방결의안을 두고 찬반토론을 벌였는데 찬성 88 대 반대 95로 부결되었다. 의원들이 결의안에 관한 토론을 벌이고 있을 때 서울 시내에서는‘국회 안의 빨갱이들을 추방하라’는 관제데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6월 3일에는 3백여 명의 군중이 반민특위 사무실에 몰려가서 ‘반민특위 내 공산당을 숙청하라’고 외치다가 특별조사위원회 정문까지 치고 들어갔다. 반민특위가 그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 등을 반민법 제7조 해당자로 체포하자 내무차관 장경근, 치안국장 이호, 서울시경국장 김태선의 주도로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이끄는 경찰관들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서 특경대원 35명을 폭행한 뒤 연행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6월 9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반민특위 습격 사건은 자신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고 공언했다.


“반민특위는 1949년 8월 22일 국회에서 폐지안이 통과됨으로써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반민특위는 출발 당시 반민자 7천여 명을 파악해 놓고 있었지만 공소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조사건수는 682건에 그쳤다. 이 가운데 체포 305건, 미체포 173건, 자수 61건, 영장 취소 30건, 검찰 송치가 559건이었다. 이 중 특별검찰부가 기소한 것은 221건이고, 특별재판부가 재판을 종결한 것은 38건에 지나지 않았다. 불기소된 사람들은 대부분 무죄로 풀려났으며, 기소된 사람들 중에서도 실제 처벌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강준만,


반민특위가 친일파를 제대로 응징하거나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것을 방해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한국이 1970년대 말까지 부일 또는 친일세력의 지배를 받게 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특히 동아·조선·중앙 같은 족벌언론에서는 지금도 친일파의 후손들이 경영권과 인사권을 장악한 채 보수정권과 결탁해서 온갖 특혜를 누리고 있다.


1944년 8월 25일 연합군과 자유프랑스군이 파리를 해방할 때까지 4년 2개월 동안 프랑스에서는 나치와 맞서 용감하게 싸운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적지 않았지만 점령국에게 부역하거나 친독행위를 한 정치인과 지식인이 수두룩했다. 영국 런던에 망명정부인 ‘자유프랑스’를 창설한 뒤 4년 동안 국내의 반나치 레지스탕스를 지휘한 샤를 드골은 연합군과 함께 파리에 입성하기 오래 전부터 나치 청산 계획을 구체화했다.


“드골의 나치협력자 대숙청은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나치 독일이 패배하기 시작하면서 페탱의 비시 정권을 중심으로 하는 나치협력세력을 프랑스가 해방된 뒤 응징하고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드골이 직접 구상하고 집행한 나치협력자 대숙청은 1943년부터 전쟁 진전과 함께 서서히 막을 올렸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수 년 간 매우 가혹하게 집행되었다. 나치협력자 대숙청은 프랑스의 각계 각 분야에 걸쳐 총체적으로 광범위하고 복잡하게 진행됨으로써 겉보기에 어지러운 양상을 보였지만, ‘민족반역자는 반드시 법에 따라 처벌되어야 하고 사회에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드골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과 실천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드골의 훈령(프랑스 임시정부 대통령의 이름으로 발령된)이라는 임시적 법에 따라 집행되었다.” (주섭일, , 21~22쪽)


드골이 규정한 나치협력 민족반역 범죄자는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들, 나치의 꼭두각시 정부인 비시 정권의 고위공직자들과 그 추종자들, 그리고 나치 독일의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한 프랑스인들이었다. 8·15 이후 3년 동안 미군정의 지배를 받은 한국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해방의 날’인 1944년 8월 25일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앙리 페탱의 꼭두각시 정부 수도이던 비시에서 650명, 지방도시 크레르 몽페랑 인근 4개 현에서 2,980명이 체포되었다.


거물급 나치협력자들의 재판은 파리숙청재판소가 맡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비롯한 모든 분야의 인물들이 법의 심판을 받았는데, 가장 먼저 재판정에 끌려나온 피고인들은 언론인이었다.


“민족반역 언론인들은 사설과 칼럼으로 나치 독일과 비시 정권을 찬양하고, 연합군과 드골의 망명정부를 적으로 지목해 비난하고 욕하는 글을 썼기 때문에 나치협력행위의 증거들이 쉽게 수집될 수 있었다. (···)


이들 자신이 나치 독일이 전쟁에 이길 것으로 착각해 쓴 글들이 모두 부메랑이 되어 필자 자신들에게 규탄의 소리가 되어 되돌아오는 형국이었다. 변호사들조차도 이 언론인들을 ‘나치협력 선전원’이라고 부를 정도로 나치 독일 점령 기간에 미쳐 날뛰었던 ‘히틀러의 나팔수들’이었다. 드골은 ‘정의의 심판’을 위해 숙청의 칼을 빼든 것이다.” (위의 책, 372~3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