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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6일 월요일

정명훈 비판, 진중권-김상수 논쟁에 부쳐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2-06일자 기사 ' 정명훈 비판, 진중권-김상수 논쟁에 부쳐'를 퍼왔습니다.
진중권씨, 당신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저서 을 읽은 덕분에 르네 마그리트 그림을 보는 눈이 틔인 점, 감사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최근 ‘진보 진영’의 언행에 대해 쓴소리를 연발하는 걸 보며 ‘왜 이러시나?’ 의아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생각해 왔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의 ‘등에’ 노릇을 한 것처럼, 당신의 비판적 발언들 또한 ‘진보 진영’ 사람들의 도덕적, 문화적 각성을 위해 필요한 일이려니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MBC가 이명박 정권에 침탈당할 때 MBC 사옥 정문에서 극우인사들에게 맞으며 저항하던 당신의 모습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때, 당신만큼 강력하게 저항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불의와 독재에 맞서는 당신의 진심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당대의 논객 진중권에게 감히 반론을 제기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었습니다. 저는 프로그램 만들 줄 밖에 모르는 한 명의 방송 PD니까요. 그런데, 최근 ‘진중권의 아이콘 - 자유, 자유”라는 글에서 크게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대목들을 발견했습니다. 정명훈과 그의 음악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글이려니 생각하지만 도저히 침묵할 수 없어서 몇 마디 드리고자 합니다. 말꼬리를 잡고 싶지 않지만, 얘기를 꺼내려니 말꼬리를 잡을 수밖에 없는 것,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그 글 중 한 대목이 매우 거슬렸음을 고백합니다. “이명박이 히틀러처럼 전쟁을 일으켰나, 유대인을 학살했나, 아니면 헌정을 파괴했나?” 

이명박과 히틀러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명박을 위한 연주를 나치 부역에 비유하는 것을 반박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일단 정명훈은 논외로 하고, 이명박은 헌정을 파괴했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그는 민주주의의 기본인 표현의 자유를 파괴했습니다. 미네르바를 잊진 않으셨겠죠? 유모차부대에 대한 탄압이 옛날 일인가요? 임기가 보장된 공영방송의 사장을 내쫓고 자기 아바타를 심어서 언론에 재갈을 물린 게 ‘헌정을 수호한 일’인가요? <pd>에 대한 비상식적인 탄압은 검찰이 한 짓이니 이명박과 무관한가요? 삼척동자도 대답할 수 있는 이 질문에 지식인 진중권은 뭐라고 답하실지 궁금합니다.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툭 던졌다고 하기엔 너무 심각한 발언 아니었나요? 그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부정한 주가조작 사범이라는 점은 누구나 다 아는 얘기이므로 굳이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중국이라면 사형에 처하는 중대한 범죄입니다. 그가 전과 14범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덮으려 해도 ‘팩트’이고, ‘팩트’에 대해서는 토론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pd>

이명박은 히틀러처럼 전쟁을 일으키진 않았습니다. 그는 유태인을 학살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다행입니다. 이명박은 제주 4·3과 한국전쟁 때의 이승만처럼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지 않았고, 광주학살의 전두환처럼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총칼로 짓밟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벼랑 끝의 가난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아 버린 용산 참사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노동자가 죽어 나가는 한국타이어 사업장에서, 촛불집회 의료봉사단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의 모습에서, 1년 가까이 지속된 김진숙의 고공 크레인 농성을 방치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냉혹한 학살자의 냄새를 맡았다면 제가 과민한 걸까요? 이명박을 ‘학살’에 결부시킨 것은 순전히 내 ‘과대망상’이라고 해 둡시다. ‘과대망상’으로는 토론이 안 될 터이니 이 또한 그만 하죠.  

다시 정명훈 얘기로 돌아가지요. 이번 논란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저야말로 정명훈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94년 바스티유 음악감독 논란이 시작될 때부터 관심을 갖고 그를 여러 번 취재했습니다. 97년, 정명훈에 대한 최초의 다큐멘터리를 방송했고, 이어서 99년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도전’이란 다큐를 만들었습니다. 김상수 식으로 표현하면, ‘정명훈을 영웅으로 만드는 데 앞장 선’ 주류언론의 ‘죄인’입니다. 

유럽 무대에서 정명훈의 음악적 성취는 주목할 만 했고, 당시 40대 초반의 젊은 지휘자에게 거는 국내 음악팬들의 기대도 컸습니다. 다큐 촬영 당시 정명훈은 살 플레이엘에서 파리 오케스트라를 지휘, 말러 교향곡 5번을 연주했습니다. 당시 르 몽드는 “라파엘 쿠벨릭과 베르나르드 하이팅크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같은 곡을 연주했지만, 그 누구도 정명훈만큼 청중을 압도하지는 못했다”고 썼습니다. 저 또한 공감했습니다. 정명훈의 말러는 탁월했습니다. 파리에서 만난 바스티유 단원들의 정명훈에 대한 사랑 또한 의심할 바가 없었습니다. 단원들은 그의 바톤 아래서 매우 고된 연습을 했지만 급속히 음악 수준이 향상되는 보람을 느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프랑스의 대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이 정명훈을 가리켜 ‘천재’라고 극찬한 것이 그냥 빈말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축하연주를 지휘한 정명훈 지휘자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휘자의 실력에 성적을 매기고 석차를 따지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당시 세계 음악계를 이끌던 게오르그 숄티, 클라우디오 아바도, 주빈 메타, 세이지 오자와 등 대지휘자의 뒤를 잇는 차세대 거장으로 그를 자리매김 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를 지나치게 미화했다고 비판해도 할 말이 없는 프로그램이었지요. 개인적으로 정명훈의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드보르작, 말러는 그때나 지금이나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덧붙이자면, 그의 모차르트는 좀 아닙니다. 모차르트 이전의 고음악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얘기는 다큐에 담지 않았습니다. 재능있는 지휘자를 조명한 음악 다큐였을 뿐이니까요. 

에서는 그들의 새로운 시도를 긍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엄격한 오디션에 따른 일정한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전체적으로는 음악의 질을 높이려는 의욕적인 시도로 간주했고, 객원 단원, 상임 작곡가, 공연기획 자문을 두고 <spo>를 발행하는 등 자생력 있는 오케스트라의 토대를 놓으려는 노력을 긍정적으로 조명했습니다. 최근 연출가 김상수가 제기한 재정적 문제들은 잘 몰랐고, 취재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시향의 ‘베토벤 전곡 사이클’을 중심에 놓고 구성한 ‘음악 다큐멘터리’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보면 방송 저널리스트로서 다소 안일하게 만든 다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입니다. 제 소개 겸해 다큐 얘기를 꺼낸 게 좀 길어졌네요. </spo>

연출가 김상수의 문제제기는 다소 거칠게 보일 소지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이명박 취임식 때 베토벤 9번을 발췌 연주하고 지휘봉을 이명박에게 바친 것, 이른바 ‘건국 60년 기념음악회’에서 드보르작의 ‘신세계에서’를 지휘한 것은 내가 봐도 결코 유쾌한 풍경이 아니었지만, 이를 곧바로 카라얀의 나치 부역에 비유한 것은 비약입니다. 나치에 반대한 파블로 카잘스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훌륭한 음악가고 나치에 부역한 카라얀이나 푸르트뱅글러는 저열한 음악가였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김상수의 문제 제기 자체는 유효하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김상수는 자신이 연출한 연극의 음악을 직접 만든 사람이지만, 스스로 이야기하듯 서양 음악사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그의 문제제기 자체를 희화화 하는 것은 적절한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엄밀히 보면, 그는 ‘음악론’을 펼친 게 아니라 음악이 정치에 사용(詐用)되는 것을 경계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논지는 “정명훈에게 지급되는 돈은 국민의 세금이고, 이는 투명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습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합리적인 방식으로 산정해서 누구나 납득할 수 있게 집행해야 할 돈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핵심 논지가 실종되고 감정적인 비난이 난무하게 된 것은 유감입니다. “한국 매스컴이 정명훈의 음악 수준을 과대포장했다, 알고 보면 정명훈은 한국을 우습게 아는 인간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없다, 따라서 그의 음악 또한 형편없다, 그런데도 정명훈은 한국이 낳은 스타라는 이유로 비판의 성역에 있다...” 김상수의 이러한 주장은 엄밀히 검증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논거를 무수히 제시할 수 있을 것이고, ‘팩트’와 ‘의견’이 거미줄처럼 꼬여서 미궁에 빠질 이슈들입니다. 굳이 검증하려 한다면 매우 정밀한 조사와 분석이 필요하고, 일정한 대목에서는 음악에 대한 전문적 식견이 요구될 것입니다. 김상수는 이 많은 주장들을 거칠게 쏟아냈기 때문에 엉뚱하게 역풍을 만났고, 논점이 흐려질 빌미를 스스로 제공한 것입니다. 김상수의 ‘잘못’이 있다면 딱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진중권씨 얘기로 넘어갑니다. 김상수의 오류를 빌미로 그를 바보 취급하고 그의 문제제기를 묵살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그의 핵심 논지를 슬쩍 외면한 채 비본질적인 얘기로 그를 희화화하는 것은 예의 있는 태도도 아니고 용기 있는 행동도 아닙니다. 진중권씨의 글에는 이른바 ‘진보 진영’의 문화적 조악성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 있습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은 딱 그 지점까지입니다. 다음 구절은 선을 넘고 있습니다. 

“심지어 스탈린도, 히틀러도 클래식 음악을 이렇게 대접하지는 않았다. 현대음악은 탄압했을지 몰라도, 그들도 클래식만은 키워서 체제선전과 대중교양에 써먹으려 했다.”   

스탈린!! 그가 얼마나 저열하게 클래식 음악을 난도질하고 예술가들을 목 졸랐는지 진정 모르시는 건가요? 스탈린은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에서 거슬리는 대목이 나오자 “횡설수설하는 음표더미”라고 매도하면서 그를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었죠. 쇼스타코비치는 간신히 죽음을 면했는데, 그 이유는 쇼스타코비치를 추적하던 비밀경찰 요원이 하루 먼저 숙청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염세적인 정서로 가득한 교향곡 4번을 초연할 수 없었습니다. 5번 D단조에 대해서는 엉뚱하게도 “낙관적 비극의 전형을 그렸다, 더 밝은 미래의 비전을 들려주었다”고 격찬을 늘어놓더니 9번이 맘에 안 들자 아예 창작을 금지했고, 스탈린 본인을 우상화하는 저열한 영화음악을 만들도록 강요했습니다. 자, 이게 스탈린이 클래식 음악을 ‘대접’한 방식이었습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대통령 취임식과 ‘건국 60년 기념 음악회’에서 정명훈의 클래식 음악을 활용하려 한 이명박 정권이 클래식 음악에 대해 무지한 ‘좌파’보다 낫다는 결론이군요. 이게 진중권씨가 말하고자 한 바였습니까? 그런 ‘대접’이라면 안 받는 게 낫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제가 볼 때는 ‘좌파’든 ‘우파’든 추악한 본질을 클래식으로 포장하려는 위선자들보다는, “폴포츠 수준"의 단순무식한 사람들이 차라리 나아 보입니다. 

히틀러가 바그너와 베토벤을 앞세워 독일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한 것도 퍽 교양 있는 일이었다는 결론이군요. ‘서양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는’ 김상수조차 “베토벤 음악은 반유태주의 따위와는 상관없다”고 이미 지적했습니다. 베토벤이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에서 노래한 ‘형제애’를 ‘게르만 민족 공동체’로 해석한 게 베토벤을 잘 ‘대접’한 건 아니라는 점, 진중권씨도 동의할 거라고 믿습니다. 바그너는 본인이 반유태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으니 히틀러의 나치와 그런대로 잘 어울린다고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그너 음악은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에도 이미 존재했고, 히틀러가 지구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변함없이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히틀러 따위의 ‘대접’과 상관없이,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위대한 음악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유태인 음악가들이 히틀러 체제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지요. 그들 중 대지휘자 브루노 발터도 있었습니다. 그는 히틀러 독재에는 반대했지만, 체제와 이념의 차이를 너머 바그너 음악의 위대성을 인정했습니다. 종전 후 그가 녹음한 바그너 관현악곡집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연주로 꼽힙니다. 히틀러가 바그너를 ‘대접’한 방식과 브루노 발터가 바그너를 ‘대접’한 방식의 차이, 이해하실 수 있는지요?

발터의 넉넉한 태도는 카라얀과 비교하면 더욱 돋보입니다. 카라얀은 나치가 파리에 주둔할 때 침략의 최전선에서 바그너의 를 지휘했습니다. 그는 나치 군복을 입고 지휘한 일도 있습니다. 그렇게 바그너를 ‘사랑한’(?) 카라얀은 종전 후엔 바그너를 지휘한 일이 없습니다. 나치 부역의 기억을 되살릴 게 뻔하니 지휘할 수 없었던 거겠죠. 그는 오랜 세월 유럽 음악계의 ‘제왕’으로 군림했지만 이면을 보면 다소 옹색한 인생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카라얀 얘기가 나왔으니 다시 우리의 정명훈으로 돌아가 볼까요? 정명훈 다큐를 촬영할 때 다소 의아하다고 느낀 점이 있었어요. 그는 “저는 음악밖에 몰라요”를 되풀이했습니다. 음악가가 ‘음악밖에 모를’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묻지도 않는데 “음악 이외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자꾸 고백하는 걸까, 좀 답답하다고 느꼈죠.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건 별로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런데 몇 년 전, 카라얀의 나치 행적을 다룬 다큐멘터리 를 보니 똑같은 장면이 나오는 거였어요. 카라얀과 함께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전곡을 녹음한 피아니스트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 인터뷰였습니다. 그는 “카라얀은 정치는 몰랐다. 그는 오직 음악밖에 몰랐다.”고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치가 뭔지도 몰랐지만 음악가로 출세하기 위해 열심히 살다 보니 힘있는 자들 편에 서게 됐고, 그러다 보니 자기 뜻과 상관없이 부역을 하게 됐다” 정도로 요약되는 거죠. 같은 다큐에 출연한 역사가 올리버 로트콜프도 “카라얀은 자신이 나치 선전에 이용당한다는 정치 사회적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다”고 진단하더군요.

진중권씨는 누구보다도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의미를 잘 아시겠지요. 더 많은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 더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체제가 유지되고 그 안의 혈액 순환이 원활하게 이뤄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우리나라에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정신이 모자란 것이 큰 문제라는 점, 공감하시겠지요. 같은 맥락에서, 대중적 인기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저는 정명훈이 카라얀처럼 부도덕한 권력에게 부역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기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른다면 어떤 결과를 부를지 그 또한 예측할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정명훈이 스스로 되돌아보고 자신의 심각한 무지를 반성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정명훈이 뛰어난 예술가라는 이유로 모든 비판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 정명훈을 위하는 일인지 되돌아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병이 있는데 “괜찮다”고 외친다 해서 그 병이 없어질까요? 초기에 치료하는 게 좋습니다. 전화위복이 되기 바랍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얘기가 있습니다. 트위터에 올리신 글 중에 도가 지나친 게 있어서 지적해 드립니다. 김상수의 글을 실어주고 그를 인터뷰까지 했다는 이유로 을 ‘저질 매체’라고 단정하셨고, “이 분들의 보도 수법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이셨네요. 아마 “‘정명훈=이명박’으로 깔아놓고 조지면 새로 당선된 서울시장이 뭔가 조치를 하겠지”, 이런 류의 계산 아래 기사를 썼다고 의심하시는 것 같네요. 이 실제로 그랬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자연스럽지 못한 추측을 바탕으로 불특정 다수를 향해 을 비난하시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점, 지적해 드립니다. 같은 식으로 말한다면, “서울시향이나 정명훈과 직접 관계도 없는 진중권이 이토록 김상수와 을 비방하는 것은 아마 자기 누나들이 서울시향 녹을 먹기 때문일 것”이라는 속물스런 의심 또한 정당화될 것입니다. 

진중권씨는 20만명의 팔로어를 가진 트위터리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20만명 개개인이 잘 판단하실 일이겠지만, 의 이미지는 이미 작지 않은 타격을 입었으리라 생각합니다. 20만명에서 적게 잡아 절반이면 10만명인데, 그 사람들이 진중권씨의 말에 공감해서 “은 저질매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권력자의 폭력과 비슷한 행태입니다. 은 영세신문입니다. 조선일보처럼 세련되게 편집도 못 하고, 좋지 않은 문장도 자주 눈에 띕니다. 하지만 조중동이 압도적인 여론 지배력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파행적 언론 지형에서 나름 진실보도를 위해 노력하는 기특한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 비슷한 걸 힘겹게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신문을 단 한 마디로 매도하는 것은 너무 생각 없는 행동 아닌가요? 

제가 볼 때 한국 주류 언론은 지나치게 국가주의적입니다. 황우석 사태 때 주류 언론이 보여준 파시스트 행태를 기억하시겠지요. 지금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스타에 대해서는 거의 광신도처럼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박지성이 후보 선수로 출장해도 뉴스입니다. 김연아와 결별한 외국인 코치는 죽일 놈이 됩니다. 정명훈도 한국 언론에서 비슷한 대접을 받습니다. 이런 국민적 스타를 비판하면 매국노가 됩니다. 이건 매우 촌스럽고 후진적인 행태입니다. 제가 늘 보아 온 진중권씨라면 주류 언론의 이러한 행태를 좀 더 강하게 비판하고, 에겐 애정 어린 채찍을 드셔야 합당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서 다소 의아합니다. 

이 글이 지면에 올라가면 ‘가재는 게편’이라고 오해하실 수 있겠네요. 은 언론노조 기관지로 시작해서 자립한 신문이라 저희 언론노동자들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오랜 동지 관계 때문인지 저같은 무명의 필자가 쓴 글도 간혹 실어 줍니다. 저희 언론노동자들에겐 그래서 문턱이 낮은, 친근한 신문입니다. 부디 ‘과 이채훈의 관계’ 같은 사소한 대목은 괘념치 마시고, 제 글의 진심을 읽어 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진중권씨는 “필요하면 정명훈 관련해서는 나중에 정리해서 글을 올리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글에는 정명훈의 음악에 대한 평가도 들어갈 걸로 예상합니다. 그 대목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없지 않습니다. 음악을 아주 모르지 않는 사람들의 생산적인 토론, 나쁘지 않겠지요.  끝으로, “예술가들은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한다, 어설픈 이념으로 그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진중권씨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점을 밝힙니다. 시대와 호흡하고 그 시대에서 자양분을 얻어서 아름다움의 진수를 돌려줘야할 예술가들에게 최대한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점, 누구보다도 열렬히 지지합니다. 하지만 그 예술가 개인의 자유가 만인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이용되고,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파시즘에 이용될 자유까지 포함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명훈을 ‘이념’의 잣대로 괴롭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있지도 않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과거 기득권자들이 흔히 써 오던 참주선동과 메카시즘을 연상시킵니다. 복잡한 논의가 필요치 않다고 봅니다. “정명훈에게 지급되는 돈은 국민의 세금이고, 이는 투명해야 한다”는 상식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상식에 바탕을 두면 더 이상의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식은 정명훈에 대한 음악적 평가와는 별개입니다. 토스카니니든, 푸르트뱅글러든, 브루노 발터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정명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유는 민주사회의 일원이 당연히 지켜야 할 규범 내에서의 자유일 뿐입니다.  

2011년 12월 13일 화요일

박원순 시장의 정명훈 판단, 낡고 쇠퇴함을 부수는 파격을


이글은 어제이어서 프레시안 2011-12-13일자 기사 '박원순 시장의 정명훈 판단, 낡고 쇠퇴함을 부수는 파격을'을 퍼왔습니다.
[김상수 칼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발전을 위한 제언 2

지금은 지휘자가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는 시대가 아니다.    
민주주의 대중사회로 전환된 20세기 후반부터 유럽이나 미국의오케스트라 지휘자들의 위상 또한 시대변화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었다. 세계 최정상  이라 일컬어지는 베를린 필하모니는 지휘자를 선정할 때, 전 단원의 투표에  의해 결정한다. 또한 독일의 교향악단들은 일반적으로 신입 단원을 뽑을 때도 전 단원의 수락을 받아야 비로소 입단의 자격이 주어진다. 지휘자든, 신입 단원이든, 일정 기간 동안 전 단원에 의해 같이 음악을 할 음악동지인가를 확인하는 절차는 매우 중요하다. 지휘자와 단원들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로 모아진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는 것이 오케스트라 음악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야심을 가지고 있던 베를린 필하모니의 카라얀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통해 음악 행정까지 두루 자신의 야심을 실현시켰다. 그는 영상 미디어의 힘에 일찍 착안, 그가 지휘하는 모습을 전용 스튜디오에서 10여대 이상의 카메라를 동원하여 촬영하게 하였고, 편집에 까지 세세하게 관여했다. 하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그의 카리스마는 세대의 변화에 따른 민주적 흐름이나 오케스트라 운영의 절차에서 단원들과 충돌을 빚었으며 단원들과 갈등을 겪으면서 오랜 독단은 거부와 반감을 쌓게 됐다. 이후 1989년부터 베를린 필은 카라얀 시대의 종지부를 고하고, 지휘대의 민주주의 시대를 연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를 내세운다. 아바도가 건강 악화로 베를린 필을 떠난 이후 2002년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과 사이먼 래틀(Sir Simon Denis Rattle)의 베를린 필하모니 상임 지휘자 선정은 전 세계 클래식음악 팬들에게 영상으로 두 사람의 지휘를 중계하면서, 지휘자와 단원들과의 호흡을 직접 볼 수 있도록 연습 실황이 방영되고, 전 단원들의 투표에 의해 사이먼 래틀이 선정되었다. 2010년에 단원들의 투표를 통해 임기가 2012년에서 2018년까지 연장, 현재까지 세계 최정상의 베를린 필을 이끌어가고 있는 래틀은 1980년 버밍엄의 열악한 처지였던 버밍엄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으로 젊은 나이에 부임했다. 그는 그 곳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버밍엄시립교향악단을 영국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로 발전시켰다. 특히 현대음악과 말러의 교향곡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눈길을 끈 그는 영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영국의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7년 CBE 훈장을, 1994년에는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다.

지휘료만 연간 평균 18억 내외 정도 지출한다면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 연합뉴스.

정명훈의 상임지휘료와 다른 지휘자의 객원지휘료를 포함하여 연간 약 18억내외 정도가 지휘료로 서울시향이 지출한다. 지휘료 지출만으로도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 지휘료 지출과 거의 맞먹는다. 이런 지출의 규모라면 지금과 같은 정명훈 1인에게 지휘료를 몰아주는 식이 아니라, 젊고 패기 있는 한국인 지휘자를 상임으로 두고, 수 명의 국내외 객원 지휘자를 선정해 교향악단이 과거처럼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게 단원 경쟁 체제보다 지휘자 경쟁 체제로 가는 방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또는 세계적인 실력의 지휘자 3,4명을 명예지휘자로 위촉해서 연간 2-3회씩 연주지휘를 시키는 방식이 훨씬 더 다양한 연주지휘를 시민들은 경험하고, 오케스트라 단원역시 세계 수준의 기량을 지닌 지휘자들과 연주를 함께 할 수 있고, 당연히 유료관객은 훨씬 많을 테고, 청중은 지속적으로 서울시향 연주를 찾아올 것이다.

지금과 같은 식의 단원들에게 숨 막히는 오디션으로 압력을 넣지 말고, 상임지휘자든 예술감독이든 직책에 걸맞게 최소 5개월간은 국내에 체류하며, 치밀하고 입체적인 연습방법과 연주일정을 알뜰하게 챙기고, 빛 좋은 개살구 식의 ‘찾아가는 음악회’ 등의 일정은 재조정되고, 서울시향의 정기연주회도 정명훈만이 지휘하는 것이 아닌, 진짜로 세계적인 지휘자들에게 정기연주회를 더 만들어 맡긴다면, 교향악단의 질은 성장하게 된다. 

서울시향, 연주의 질을 향상시키는 실질적인 방법 
서울시는 서울시향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서 더 살펴야 한다. 연주자의 안정적인 연주에의 몰두, 연주자 양성, 지휘자 양성, 영재 육성 등은 서울시향의 또 다른 과제이기도 하고, 서울시의 서울시향에 대한 지원과 주문이면서 시향과 서울시의 의무이기도 하다. 돈을 퍼부어 넘어설 수 있다면 이미 세계의 재벌인 아랍의 왕자들이 오일머니로 세계 최정상의 오케스트라 악단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돈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오케스트라의 역사, 민주적인 운영방식, 단원의 자긍심과 앙상블, 시민들의 관심을 유발하는 기획 등 총체적인 오케스트라 운영방식의 대대적인 혁신이 서울시향에 있어야 할 때다. 지휘자와 예술감독을 한 사람이 겸임하게 하고 1인으로 하여금 무거운 책임을 떠맡기는 지금의 방식은 ‘토목공사식 문화성과주의’의 폐해이다.

정명훈의 재계약은 12월 중에 박원순 시장이 결정
시장이 바뀌었다. 밀실행정은 투명한 행정을 지향해야 한다. 서울시와 정명훈의 계약에서 불합리한 점이 한 둘이 아니다. 비효율적인 시향의 운영을 개선하기위해서라도 재계약은 보다 신중해야 한다. 1인을 우상화하고 특권을 부여하는 식과 예술가의 예술성을 인정하는 태도와는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계약에서 서울시에 정명훈 일방의 우월적 계약은 고쳐져야 한다. 그리고 공평성을 잃은 부분과 비효율적 계약은 서울시민을 모독하는 처사다. 불공정한 예산 집행을 눈감아 주면 안 된다. 보다 보편적이고 기회에서 공정하며 누구에게도 타당해야 하고 미래지향적이고 국가와 시민과 서울시향 단체를 높이고 살리는 방향으로 계약은 진행되어야 한다. 서울시 문화예술 행정의 새로운 비전을 위해서는 그 비전에 걸 맞는 낡고 쇠퇴한 방식을 부수는 파격적인 정책판단과 집행에 주저하지 말아야 할 때가 지금 이 때 박 시장 역할이다.  

전용 콘서트홀은 반드시 필요하다. 시민들이 찾아가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전용 오케스트라의 콘서트홀은 오케스트라 조건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외국의 사례를 일일이 빌리지 않고도 전용 콘서트홀의 마련은 오케스트라의 질과 시민대중의 음악문화 수용의 측면에서 적극 고려되어야 한다. 부지는 용산시민공원이 적절하지 않을까? 콘서트홀을 중심으로 녹음스튜디오 아카이브(archive)등이 함께 시스템으로 연결되어있는 시설로 말이다.     

서울시향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재설계 할 때 고려 할 수 있는 요인들
서울시향은 재정의 80% 정도를 공공재원(서울시 출연금)에 의존하고 있다. 비율로만 본다면 국내단체평균 10% 정도의 재정자립도와 비교할 때, 그나마 국내 국공립 예술단체 중에는 재정자립도가 낮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전적으로 공공재원에만 의존하는 것은 이제 시대적인 추세가 아니다. 자금 재원조달의 다양화 문제는 서울시와 관계자들이 같이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세울 때다. 전통적으로 공공에의 의존도가 높은 유럽의 오케스트라들도 이 부분을 해소하고자 안간힘을 쏟고 있다. 특히 서울시처럼 현재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오케스트라의 경영자 그리고 지휘자에게는 자주재원보전비율(재정자립도)에 대한 성과와 목표가 주어져야 한다. 예술의 성장은 반드시 계량화하여 측정하긴 어렵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의 경우 재원의 규모는 일정 오케스트라 발전에 비례한다. 경영자로서 그리고 상임지휘자 또는 예술감독으로써 공공재원 투여에 대한 성과 목표와 그 검증은 반드시 필요하다. 지휘자와 경영자가 서로 견제하고 공동의 목표를 갖도록 유도하는 방식은 적극적으로 안출되어야 한다. 

국제적으로 오케스트라 연주자는 종신고용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방식에는 양면성이 있다. 안정적인 예술활동을 보장하기도 하지만 종종 오케스트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고용의 형태를 준단원-단원-정년제 단원처럼 3단계로 운영하면서 새로운 신예연주자들이 항상 등용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나이가 들거나 연주상해(musician's injury)로 연주활동을 지속할 수 없는 단원들을 교육프로그램 강사나 음악코치 등으로 재훈련시켜 퇴로를 열어주는 제도가 필요하다. 평생을 음악연주를 한 사람의 소중한 경험을 서울시나 시향이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시스템마련이 시급하다. 서울시향은 공공재원 의존도가 높은 만큼 가장 중요한 고객인 시민들을 위해 봉사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공공성 있는 프로그램으로 음악교육, 찾아가는 음악회, 그리고 시 산하예술단체와의 협동창작에 명예단원의 역할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프로그램으로 만든다든지, 얼마든지 가능하다.

국악(國樂)을 소홀하게 취급하는 건 자가당착이다. 
어떤 나라든 자국의 전통음악이 있다. 서울시에는 1965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악관현악단으로 창단된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이 있다. 전통음악의 창조적 계승을 위해 매해 새로운 창작음악으로 관객과 만나려는 노력을 시도하고 있는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은 창단 이후 그간 정기연주회 300여회, 특별 연주회 2,000여회를 가졌다. 새로운 실험을 통해 한국음악의 대중화에도 기여를 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국악관현악단은 전통의 고유성을 바탕으로 현대 및 미래의 한국음악을 창조해야하는 역할이 있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1년 예산이 서양클래식음악을 주로 연주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 투입예산의 1/9이다. 2010년 사업비 인건비 포함 총예산이 22억원이다. 너무나 빈약한 재정이다. 서울시가 정명훈 1인에게 지급하는 돈의 수준이다. 숫자로만 바도 그동안 얼마나 국악을 서울시가 홀대해왔는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서울시 예술행정의 본말이 크게 뒤집어진 사례다.

시민의 삶에 기여하는 서울시향의 비전은 구체적이어야 
물론 나는 서울시 산하 6개 예술전문단체의 예산은 증액되어야 하고, 서울시향의 예산지출과도 균형을 맞추어야 하며 서울시향 예산도 더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울시향이 시민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시민들을 위한 유용한 프로그램 계발과 단원들의 다양한 훈련프로그램, 오케스트라의 연주중계시스템 마련 등, 오케스트라 체제의 현대화와 시민의 오케스트라 수용방식의 개발 등에는 더 많은 예산소요가 뒤따른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오케스트라 운영의 경영합리성에 있다. 지휘자 또는 상임지휘자의 대우 조정과 서울시향의 경영성과를 평가하는 매뉴얼의 개발, 예산지출의 투명성과 합리성을 통해서 서울시와 서울시향이 합의하는 경영성과 지표를 도출, 엄정하게 그간의 성과를 평가하고 그것에 기초해 새로운 경영전략을 세워야 한다. 지금 서울시향에 필요한 것은 7년간의 성과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에서 보다 서울시향의 가치를 더 창출해낼 것인지를 깊이 있게 고민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의 삶에 기여하는 서울시향의 비전은 구체적이어야 하며, 어떻게 하면 시민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서울시향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특정인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개발형 경영식이나 막연한 전시선전용 방식이 아니라, 시민들 삶에 천작해 들어가는 오케스트라 운영방식의 안출과 전체 단원의 동의를 이끌어내어 오케스트라의 창의성을 높이는 것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그래서 서울시향이 서울이란 도시의 새로운 자원으로 제대로의 역할을 하는 방향으로 재조정되어야 한다. 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모험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비전을 제시하고 구성원의 동의를 이끌어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기 위한 발걸음은 내디뎌야 한다. 결국 여기에는 이제까지의 서울시의 문화예술정책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며 이에 따른 문화예술행정의 서울시 조직 개편이 먼저 요청된다.

시민의 노동으로의 세금인 공금에 대한 공경이 있어야   
사람은 노동을 하고 대가를 받고 삶을 영위한다. 돈의 많고 적음은 노동의 종류, 시간, 질, 조건, 상황에 따라 조절당하거나 노동을 주문하는 측과 타협도 한다. 때때로 노동의 강도나 양에 비하여 너무 적은 돈을 받는 경우도 많고, 노동의 수고는 하찮은데 지나치게 많은 돈을 불로소득처럼 챙기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노동에 대한 존경이 깨진 사회는 이미 무너진 사회다. 착취도 안 되지만, 노동에 있어서 지나친 과비용도 사회적 낭비고 상실이다. 하물며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 곳이 사기업이나 어느 특정 개인이 아닌, 시민의 세금인 공금으로 지출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돈의 주인인 시민이 돈의 쓰임새를 잘 알 수도 없고, 또 시민이 노동해서 모아진 돈이 납득하기 어렵게 특정인의 예술적 특권을 위해 계속 비밀스럽게 지출되고 있다면 그건 바로 사회적 죄가 된다. 

후기 - 하나의 주제로 칼럼의 길이로는 꽤 긴 글을 썼다. 서울시향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쓸 수 없는 글이다. 음악을 지휘하고 연주하고 듣는다는 건, 결국 생의 의미를 음악을 통해 찾아 나서는 여정이다. 자신을 알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더 알고, 세상의 세계 속에서 인간의 뜻을 물으러 길 떠나는 차비(差備)에 음악이 있다. 보헤미아(Bohemia) 태생의 오스트리아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근대세계의 분열상을 음악으로 재현했다. 그의 곡절 많은 삶만큼이나 그의 음악 또한 온몸으로 분열의 시대를 껴안은 자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적인 음역(音域)의 영토를 만들어냈다. 지난 12월 9일 나는 서울시향 정명훈 지휘의 말러 연주회를 보았다.  

2011년 12월 12일 월요일

서울시는 서울시향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1-12-12일자 기사 '서울시는 서울시향의 정체성을 고민해야'를 퍼왔습니다.이글은 다음에 후편도 계시할 예정입니다.
[김상수 칼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발전을 위한 제언 1

지난 7년간의 이명박 오세훈의 서울시 문화예술정책은 이제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때다. 내용보다는 ‘개발형 사업’과 ‘전시성 사업’에 주력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을 위해 홍보효과의 극대화에 몰두했던 전임 두 시장의 시정(市政)은 위선(僞善)을 넘어 차라리 위악적이었다. 나는 이번 서울시향의 ‘정명훈 문제’를 거론하면서 ‘전시성 사업’과 ‘개발형 사업’의 실체인 ‘토목공사식 성과주의’에 매몰된 시정의 폐단이 서울시 문화예술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된 현실의 그르침을 지적했다. 이는 정명훈 한 사람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이명박식 발상’이 바로 ‘토목공사식 성과주의’이고 한 사람에게 많은 기대와 예산을 들여 지난 7년의 시간에서 드러난 결과는 과연 그 성과가 얼마나 서울시민들에게 가치가 있었던가를 질문했다. 


서울시향의 7년 성과에 대한 의문
 서울시향은 앞글에서 언급했듯이 지난 7년간 정명훈을 통해서 단원들의 경쟁체제를 도입, KBS 심포니를 뛰어넘는 연주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주장도 있고, 서울시향을 찾는 관객이 늘었다는 측면에서 정명훈의 역할을 큰 성과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 지난 주 중앙일보의 기사에서 “정 감독이 영입되기 전인 2004년 서울시향의 정기공연 1회당 유료 관객수는 466명. 지난해엔 1274명이다. 올해는 1800명을 내다보고 있다.” 고 썼는데, 아니? 정명훈이 예술감독이자 상임지휘자로 부임한 이후 무려 7년간 회당 유료관객이 겨우 이 수치인데, 어떻게 재단법인화하면서 정명훈 영입의 성과라고 들이댈 수 있을까? 갖가지 정명훈의 요구사항을 충실하게 서울시가 들어줬는데도 불구하고 회당 유료입장 숫자가 1200명대? 거기에 “올해는 1800명을 내다보는” 수준이란? 

나는 반드시 돈을 따져서 예술의 효용성을 강변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더구나 서울시립의 예술단체란 기본적으로 서울시민들에게 문화예술의 수용을 확대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회당 유료관객의 증가라는 의미에서도 성장은 부족했고 서울시민의 시향 오케스트라음악의 수용의 측면에서도 보다 성장하지 못했다. 이런 필자의 문제 지적에 서울시향의 정명훈 영입 이전과 이후의 여러 성과를 비교하라는 주문이 있다. 그러나 정명훈 영입이후 법인화를 꾀하면서 파격적인 재정지원을 한 서울시의 예산지출 과정을 본다면 오늘의 성과를 크게 내세우면서 강변할 내용은 아니다. 


서울시 6개 예술단체 총 예산 103억, 교향악단 1개 단체 131억 

서울시 산하 전문예술단체인 -극단, 국악관현악단, 무용단, 뮤지컬단, 합창단, 오페라단- 6개 단체의 올해 총예산이 103억 안팎이었다. 이 예산에 비추어 서울시 1개 산하단체로 법인화한 서울시향 예산은 6개 단체를 다 합한 예산보다 훨씬 많은 131억 원의 지원을 예산으로 서울시로부터 지급받았다. 정명훈 영입이전에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연 예산에서 정명훈 영입이후 연간 평균 4.3배 넘는 예산을 지난 7년 투입한 것에 비해, 오늘의 서울시향의 관객수익의 증가란 일부 기득권신문의 주장처럼 그렇게 큰 수치가 아니다. 예산으로 7년 간 사용했던 그 많은 돈을 지출하고도 회당 유료관객이 7년 동안 그 수준이란? 또 내용적으로도 서울시향 전체 운영을 정명훈에게 내맡기다시피 한 특권적 지위를 부여했음에도 이 같은 수준의 유료입장이라면? 이건 정상적인 운영체제라 할 수 없으며 경영평가로는 어떤 시뮬레이션을 동원해도 정상경영이라 할 수 없다.


지난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축하연주를 지휘한 정명훈 지휘자와 악수하고 있다.

예술의 경영은 반드시 혹자를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예산의 투입비례 경영의 효율성을 질문하는 태도는 사기업뿐 아니라 공공부분의 예산집행에서도 요청된다. 정명훈 영입이전과 비교해 영입이후 예산 증액의 파격적인 투입에도 회당 유료관객은 3배에 미치지 못한다. 예산증액투입 산출모형에서 파급효과분석, 연관분석, 장기예측 등에서의 유용성으로 보자면 서울시향 운영은 보다 경제적이고 보다 효울적이어야했다. 이건 초보경제학자의 의견을 들어도 금방 판별되는 수치다. 따라서 좀 더 적극적으로 예산투입의 효율성을 높일 수는 없었는지, 여러 가지 경영측면에서 따져봐야 하는 시점이다. 

상임지휘자와 예술감독이란 자리는 
상임(常任)이란, 주어진 임무를 도맡아 책임지고 처리한다는 의미다. 어떤 일을 할 때 주어진 일을 하기위해 거의 매일같이 출근하는 경우를 상근(常勤), 이따금 출근하면서 일을 하는 경우를 비상근(非常勤)이라고 통상적으로 역할을 나눈다. 예술과 음악을 하는 일의 특성이 매일같이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 출근하여 상근을 하는 일과 같을 수는 없다. 꼭 일정한 시간에 출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임할 수 있는 게 예술이란 업(業)에 종사하는 사람들 일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예술업의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정명훈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의 근무 일수를 가리켜 상임이나 예술감독이라고 얘기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예술감독은 오케스트라의 예술적 측면 전부를 책임지는 자리다. 오케스트라의 전체비전과 경영의 균형을 위한 기획과 레퍼토리 선정부터 단원을 연습시키고 기량을 점검하고 또 지휘자를 선정하고 단원들의 수준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릴 책임이 주어진다. 계약서에 명시한 오케스트라의 “공연연주 및 연습계획 수립”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연습과 연마를 통해 서울시향 오케스트라의 성격과 특색을 창의적으로 이끄는 책임을 진 예술감독과 또 상임지휘자로 “연간 10회 이상의 (재)서울시립교향악단의 자체 기획공연 및 연습지휘” 까지 정명훈이 겸임한다는 것은, 그만큼 정명훈이 서울시 오케스트라에 헌신하는 조건임이 계약으로 서울시향 측과 정명훈이 약속한 거다. 그러나 예술감독과 상임지휘자 책임을 맡은 그가 서울시향에 들이는 시간은 1년 중 평균 두 달 내외이고 경우에 따라서 들쑥날쑥이다. 그것도 음악회 연주일정에 맞춰서 서울로 들어와 음악회 연주 지휘만 몰아치다가 다시 나라밖으로 나가는 식이다. 

해외의 경우 교향악단 중에서는 상임지휘자(chief conductor)와 예술감독(music director) 또는 음악감독(Intendant)은 별도의 직으로 사람을 구분해서 따로 두고 있는 경우가 있다. 상임지휘자는 계약에 의해 연간 맡겨진 연주만 지휘하고 통상 연봉 일괄계약으로 10회 또는 15회 이상의 정기공연 및 특별공연 지휘를 맡긴다. 연주를 앞둔 연습기간도 계약에서 명시하기 마련이다. 그 이외 연주 기획이나 협연자, 객원지휘자 섭외 등은 상임지휘자 역할이 아닌, 예술감독이나 음악감독이 임무를 맡는다. 단원의 해고나 기존 단원을 새로 뽑는 오디션은 상임지휘자는 관여하지 않을뿐더러 참견할 수도 없다. 물론 큰 교향악단의 소위 스타급 지휘자들은 연주와 관련된 많은 것을 맡기도 한다. 종합예술감독(General music Director)이란 지위인데, 이는 상임지휘자(Chief Conductor) 보다 상위 개념의 계약이다. 좀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연주곡목이나 협연자 등을 찾는 공연기획업무 전반을 지휘하는 경우다. 그러나 이 경우는 오히려 자신의 역할에 한정적으로 집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대개이기 때문에 책임과 의무와 시간의 투입에 따르는 넓은 활동과 모든 일의 결재권을 가지려하지는 않는 게 일반적이고 국제적인 범례다. 서울시향의 정명훈이 예술감독과 상임지휘자를 같이 맡는 경우란 책임이 너무 한 사람에게 과도하게 주어진 것이다. 

그럼? 서울시향은 유독 정명훈에게 겸직을 맡겨 전제적(專制的)인 전권(全權)을 허용한 이유는 뭐 때문일까? 서울시는 그가 대단히 유능한 지휘자이자 기획자이고 예술전반의 판단과 실행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일까? 바로 정명훈을 영입한 사람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오케스트라 운영원리에 대한 일반적인 무지(無知)에 기인한 것이고, 서울시 공무원들의 예술행정의 안목의 한계와 음악계 양식 있는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상의 없이 일방으로 밀어부친 인사(人事) 때문이다. 

전제군주적 무소불위의 예술권력 
정명훈은 앞에서도 언급했듯, 서울시와의 계약에서 “단원 선정, 단원의 위·해촉, 단원평가를 포함한 고과, 상벌에 관한 사항의 인사위원회 심의 요구, 오케스트라 부지휘자 임명, 객원지휘자 및 협연자 초청계획 수립, 연주곡목 선정, 서울시와 합의되지 않은 사항에 대한 거부 등, 어떤 나라 어디 예술단체나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나 지휘자도 누릴 수 없는 절대 권력을 지니고 서울시향 전체를 이끌어 왔다. 외국의 경우 이런 경우란 현재 없다. 불가능하다. 20년도 더 이전에 베를린 필하모니를 35년간(1955-1989) 지휘했던 ‘음악독재자’ 카라얀(Heribert Ritter von Karajan)이 이끌던 베를린 필하모니도 이정도의 전권을 그에게 허락하진 않았다. 

정명훈은 자신이 활동했던 프랑스에서도 마음대로 단원을 해고할 수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스티유 오폐라단(Bastille Opéra) 이나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Orchestre Philharmonique de Radio France)에서 일한바 있는 정명훈이 프랑스에서도 한국의 서울시향처럼 "오케스트라도 이제 세계적 차원에서 경쟁해야"(조선일보 인터뷰) 한다고 단원을 막 해고할 수 있었을까? 좋은 오케스트라 소리를 내겠다고 자신이 지휘를 할 때는 자기 마음대로 체재비 항공비 와 높은 출연료를 지급하면서 외국인을 데려다가 연주를 시킬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는 권한 자체가 프랑스에서는 주어지지 않았고, 프랑스 오케스트라 운영의 상식에 비추어 불가능하다. 

기량이 좋은 단원을 선발하는 건 오케스트라 운영의 기본이다. 좋은 음질은 오케스트라 조건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1인 전횡의 방식이 아니라, 베를린 필하모니의 운영방식 등, 보다 합리적인 운영방식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오케스트라의 앙상블, 지속적인 발전의 중요성에서 
앞글에서도 이미 지적했고, 이번 ‘정명훈 공론’의 기회에서 해당 기사에 댓글이나 개인적으로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 서울시향의 문제를 지적한 의견 중에는, 지금의 서울시향은 정명훈 지휘연주 때만 일시 서울로 정명훈과 같이 들어와 연주를 하는 악장, 수석 등, 주요 단원들 중에 많게는 15% 정도의 외국인 멤버가 현재의 서울시향 연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는 점을 많이들 지적했다. 서울시향에서 시향 홍보 일을 하고 있는 이의 블로그 글에 한 네티즌이 댓글을 달았다. 

그의 지적을 그대로 인용한다. “언젠가 정명훈이 서울시향을 떠난다면 정명훈 멤버도 많이 떠나게 되어, 더 이상 서울시향이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섞인 예측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실력 있는 수석, 부수석, 뛰어난 단원들의 영입도 중요하지만, 실력 면에서 아직 조금 덜 다듬어져 있어도 지휘자와 악단과 오랜 기간 함께 성장하면서 그 오케스트라의 고유한 사운드와 단체의 성격의 일부가 될 구성원의 비중을 높이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런 면에서 정명훈과 그의 멤버에 대한 의존성이 무척 큰 서울시향의 현 발전 방식은 앞으로도 정명훈에 대한 의존성이 줄어들 것 같지 않기에 그다지 긍적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실력있는 단원들을 보충하는 방식에 크게 의존하기보다는, 그 오케스트라가 가진 한정된 자원에서 놀라운 수준의 앙상블을 이끌어내고, 각 파트 수석의 표현력도 향상시켜 그 단체가 본질적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오케스트라 발전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소위 오케스트라 조련사 역할을 하는 타입이죠. (중략) 보다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서울시향의 발전을 위해서는 상임지휘자의 명성과 기량이 무척 뛰어난 수석과 단원들의 영입에 크게 의존하는 현재의 방식보다는 명성과는 상관없이 오케스트라의 조련에 뛰어난 타입의 상임지휘자와 현재의 기량은 살짝 부족하지만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와 오랫동안 함께 할 가능성이 높은 수석과 단원들을 중심으로 오케스트라가 발전하는 방식이 더 좋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정명훈 지휘자가 주도한 방식으로 서울시향이 발전해 온 것도 소중한 경험이고, 서울시향의 자산이라고 봅니다만, 앞으로도 이런 방식이 가장 좋을까 하는 데에는 전향적인 접근도 고려해 볼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네티즌의 의견을 그대로 재인용한다. 

“... DG의 음반 출시에 서울시향이 적지 않은 역량을 투입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있는 독일에서 DG등의 음반은 주로 영국 평론가들이나 열을 올리며 평을 쓰는 대상이지 대부분의 클래식 애호가들의 관심을 많이 벗어났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유럽의 여러 오케스트라들과 미국의 오케스트라들까지 실시간 인터넷 방송으로 공연 실황을 접할 수 있고, 다시듣기 서비스로 관심 있는 공연을 며칠 동안 여러번 들을 수도 있으니까요. 3sat나 arteTV, medici TV 등에서도 중계방송 해주는 좋은 공연이 많고, 적지 않은 공연은 무료로 다시보기도 가능합니다. 유료 다시보기 서비스까지 합하면 이러한 방식이 음반을 상당부분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뮌헨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경우 모든 정기 연주회를 live 라디오 중계방송하고 공연이 끝난 후 일주일 동안 무료로(웹싸이트 가입절차도 필요없습니다) live 중계방송과 같은 수준의 고음질로 스트리밍 다시듣기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아주 좋은 공연을 보게 되면 한국에 있는 클래식 애호가들에게도 다시듣기 사이트에서 그 공연을 들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있고요. RCO는 유튜브와 Radio4를 통해 다시보기나 다시듣기가 가능한 공연들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서울시향의 운영과 발전에 들어갈 세금을 낸 서울시민과 한국에 있는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좋은 공연을 간접적인 방식으로라도 접할 수 있게 하려면 음반보다는 공연 실황을 스트리밍 서비스나 Podcast 등의 방식으로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게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국외에 있는 서울시향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클래식 애호가들과 잠재적인 객원지휘자, 음악인들에게도 이러한 방식의 접근이 음반 못지않게 좋다고 봅니다.” 

이 네티즌의 의견은 계속 인용할만한 하다고 보여 다시 인용한다. 
“나의 의견을 덧붙이자면, 서울시향의 장기적인 플랜이란 단원들의 처우에 있어 오디션 등에서 가려지더라도 불안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하며, 평가위원회를 외부인에게 맡기지 말고 매뉴얼을 만들어 전 단원의 내부 평가에 의하여 결정합니다. 지휘자 또한 전 세계에 중급 지휘자의 기준으로 공모하여 최종 심의를 통과한 몇 명을 직접 시향을 지휘하여 최종 선정은 민주적이며 공정하게 전 단원 투표에 의해 결정합니다. 이러면 교향악단의 자주성이 확보되며 정치색에 휘둘리지 않고, 국가는 지원만 하는 시스템으로 정착되겠지요. KBS교향악단도 동일선상에 놓으시면 됩니다. 상임이 결정되면 수 명의 국내외 객원 지휘자를 선정해 교향악단이 과거처럼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게 단원 경쟁 체제보다 지휘자 경쟁 체제로 갑니다. 유능한 단원 섭외의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전 세계는 이미 과포화상태의 연주자들이 넘쳐납니다. 훨씬 낮은 조건으로 좋은 연주자 들일 수 있습니다. 정명훈은 자신의 몸값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거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유럽의 지휘자 시세나 연주자 시세는 지금 바닥을 치고 있으며 더욱 내려갈 전망입니다. 그들은 유럽이나 미국 시장의 전망이 어둡기에 일본, 한국, 중국, 대만으로 눈을 돌리고 있지요. 그래서 요즘 외국의 유명 교향악단 대가들 러시인 겁니다. 정명훈은 유럽에서의 포석이 필요하기에 양편을 다 이용하고 있는 중이지요. 기획자나 예술감독 하는 사람들은 척 보면 다 압니다. 어떤 사람이 오는지 어디다 심는지 보면 왜 그러는지 대충 알게 되지요. 하여튼 지금의 시스템은 백성을 속이는 장기집권의 플랜입니다.” 

위의 글은 다소 필자와 의견을 달리하기도 하고, 단정적인 언사이긴 하지만, 서울시향의 현재를 보는 시각에서는 인용할 가치가 있다. 

시립오케스트라와 시민의 상관성 
베를린 필은 베를린시가 운영하는 시립교향악단은 아니다. “시의 후원을 받으면서 단원들이 공무원 신분이었으나, 2002년에 최종적으로 재단법인이 되면서 지금 단원들은 공무원 신분이 아니다. 그러나 베를린 필하모니는 베를린 시를 상징하는 오케스트라로 상주하는 도시 베를린의 시민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카라얀 임기 말기인 1983년에는 여성 클라리네티스트 자비네 마이어의 입단을 놓고 단원들과 심한 불화를 빚었으며, 공연 수익 분배 문제로 인한 갈등도 심화되었다. 카라얀은 타계 직전이었던 1989년에 직책을 사임했으며, 사후 악단 내부의 의견을 종합해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새 상임 지휘자로 맞이했다. 아바도는 각종 이색 기획 공연이나 현대 작품의 적극적인 공연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나, 위암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보수적인 운영진 사이의 불화로 2002년에 사임했다. 아바도의 후임으로는 영국 출신의 사이먼 래틀이 같은 해 예술감독으로 취임해 현재까지 재직 중이다.”(위키 백과)

사이먼 래틀(Simon Rattle)과 Rhythm is it!
영국인으로는 최초로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감독이 된 사이먼 래틀. 그는 버밍엄 심포니 음악감독으로 있을 때부터 청소년 음악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영국 전역에서 온 청소년들로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연주하기도 했다. <rhythm is="" it="">으로 이름붙여진 래틀의 야심찬 교육프로그램은 래틀이 안무가 로이스톤 말둠(Royston Maldoom)과 함께 기획하였으며 다양한 종족적, 연령적 배경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클래식 음악이나현대무용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250여 명의 베를린 시내 학교 이민자 가정의 청소년 학생들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음악에 맞추어 무용을 완성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되었고 필자도 감동적으로 봤다. </rhythm>

"Lead children into music without their knowing they're being led."(이끌려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청소년들을 음악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래틀의 음악교육관은 주입식으로 가르치려드는 우리의 청소년 음악교육과 비교된다. 필자가 본 타큐멘타리 영화 <rhythm is="" it="">은 단계적인 연습과정과 함께 래틀과 말둠이 청소년들에게 예술의 방법으로 대화하는 방식이 잘 드러나고 있으며, 처음에는 낯선 클래식 음악과 무용동작으로 갈팡질팡하던 청소년들이 스트라빈스키 음악의 원초적인 리듬에 맞추어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화면에 옮겼다. </rhythm>

다큐멘터리 ㅣ 독일 ㅣ 100분감독 토머스 그루베, 엔리크 산체즈 랜쉬출연 ㅣ 사이먼 래틀(Simon Rattle), 로이스톤 맬둠(Royston Maldoom)이 타큐멘타리 영화를 보면서 필자는, 사회 양극화가 극심한 우리의 처지에 비추어도 한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계층 간의 차별과 불이익, 사회적 불평등, 그로 인한 문제가정의 양산과 청소년의 방황과 고립, 이런 현실을 깨트리고 ‘인간의 연대’를 향한 음악의 도정(道程)을 통한 ‘하모니’가 바로 <rhythm is="" it=""> 이었고, 오케스트라와 오케스트라 상주 지역 시민들과의 오케스트라의 상관성, 그리고 시립오케스트라와 시민의 공존의 방법에서 우리 사회현실에서도 시사(示唆) 받는바가 컸다. </rhythm>

“음악은 사치가 아니라 공기, 물 같은 필수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첫 번째 대규모 교육 프로젝트를 담은 이 영화는,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250명의 이민자 계층의 청소년들을 데리고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는 미션에 도전했다. 클래식 음악은 접해 본 사실이 전혀 없었던 가난한 계층의 청소년들이 3개월의 연습기간을 거쳐 음악과 예술의 세계에 점점 다가가면서 “음악은 사치가 아니라 공기, 물 같은 필수품”이란 놀라운 체험을 공유하게 된다. 처음 학생들은 낯선 클래식 음악과 무용동작이 당황스럽게 다가오고, 과연 스트라빈스키 무용극을 완성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 과연 이 청소년들이 함께 무용을 완성할 수 있을까, 서로 싸우고 스스로 자신에게 실망하고, 그러면서 또 상처를 극복하고, 결국은 자기 자신과 대면하면서 무용, 그리고 베를린 필과의 협동 공연을 완성시켜가는 과정은, 사이먼 래틀 베를린 필의 예술감독과 안무가 로이스터 말둠의 헌신성에서 비롯된다. 

<rhythm is="" it="">은 예술의 힘이 사회적 양극화나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행동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더욱이 서울시립교향악단처럼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립교향악단의 역할에서는 사회적 문제에 오케스트라의 음악성으로 대책을 세우고 행동한다는 건, 시립교향악단의 비전일 수 있다. 물론 사회문제에 대한 해답을 오케스트라 음악이 전적으로 답할 수는 없을 뿐더러 그것에 서울시향 오케스트라 소임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서울의 시립교향악단으로의 존재방식에서는 능동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임엔 틀림없다. (계속) </rhyth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