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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9일 월요일

"양 날개가 균형이 잡혀야 날 수 있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3-19일자 기사 '"양 날개가 균형이 잡혀야 날 수 있다"'를 퍼왔습니다.
[이정전 칼럼] "중산층은 국민경제의 허리"

금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3% 대를 턱걸이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국도 금년 경제성장률을 하향조정하였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가 터진지 4년이 지났지만, 선진국 경제는 아직도 깊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망은 더욱 더 어둡다. 이런 가운데 각국 경제는 내수의 활성화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제 수출로 경제를 살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선진국의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 경제도 침체상태인가? 소득과 부의 분배의 극심한 불평등이 그 원인이라고 라이시(R. B. Reich)교수는 분명히 못 박고 있다. 불평등은 그 자체가 정의의 차원에서도 문제지만, 또한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점에서도 심각한 문제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자랑거리는 높은 생산력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 풍요는바로 이 높은 생산력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경제학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생산력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그러나 충분한 구매력의 뒷받침이 없는 생산력은 소용이 없다. 기업이 생산한 것을 아무도 사주지 않는다면 그 기업이 망하듯이 한 나라에서 생산된 것들이 제대로 팔리지 않으면 그 나라 경제는 절단난다. 마치 새가 한쪽 날개로만 날 수 없듯이 생산력 하나만으로는 자본주의 경제가 날 수는 없다. 경제 전체로서 생산력(공급)과 구매력(수요)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그 경제는 날아오를 수 있다. 공급과 수요는 자본주의 경제의 양 날개다. 아직도 보수성향의 경제학자들은 생산만 많이 해놓으면 구매력은 자동적으로 뒤따라온다고 믿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과거 수많은 불황이나 경기침체가 보여주듯이 자본주의 경제의 높은 생산력을 수요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경제의 양 날개가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가 아주 많다는 것이다. 한 쪽 날개의 힘이 빠진 새는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서문에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수요는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다." 바로 이 모순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에서 불황과 경기침체가 무시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말이 나올까? 흔히 자본주의는 대량생산 체제라고 말하지만, 또한 대중소비 사회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일반대중의 소비가 자본주의 경제의 수요에서 절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대체로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나 중산층 사람들은 소득의 대부분을 소비에 지출한다. 따라서 이들의 소득이 늘어나면 이에 거의 비례해서 이들의 소비도 늘어난다. 하지만, 부자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럴 수도 없다. 예를 들어서 세계 굴지의 투자은행이었던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기 직전 당시 CEO였던 리처드 필드는 5억 달러의 연봉을 받았다고 하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 돈을 몽땅 소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부유층은 소득의 극히 일부만을 소비한다. 결국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일반대중이 충분한 구매력을 갖추고 시장에 나온 상품을 사주어야 자본주의 경제가 날 수 있다. 일반대중의 소비가 양 날개의 균형을 잡아주는 버팀목이다.

일반대중의 대부분은 근로자다. 국민소득이 소수의 부유층의 손에 집중된 결과 근로자들의 몫이 감소해서 충분한 구매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시장에 나온 상품들이 잘 팔리지 않을 것이요, 결과적으로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태가 오래 계속되면 경기침체가 오고 불황이 오게 되며 높은 실업률이 장기화된다. 경기가 나빠져도 부자들은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근로자들은 큰 타격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시로 터지는 불황이나 경기침체가 근로자계층에게는 참으로 불공평한 시장의 변덕으로 느껴진다.

일반대중의 소비 중에서 특히 중산층의 소비가 큰 몫을 차지한다. 소득불평등이 심해진다는 것은 중산층이 몰락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난 수년 간 우리나라에서도 빈부격차가 벌어지면서 중산층이 점차 엷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중산층은 국민경제의 허리에 해당한다. 마치 허리가 약하면 사람이 힘을 못 쓰듯이 중산층이 엷어지면 국민경제가 힘을 쓰지 못한다. 요컨대, 극심한 빈부격차 그리고 이로 인한 중산층의 몰락이 미국의 경제위기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이며, 우리나라의 경기침체를 초래한 원인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보수진영 인사들이나언론은 분배보다는 성장이 우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장이 분배에 발목 잡혀있는데 성장만 얘기하면 무슨 소용인가.

선거철이 닦아 오면서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이 "경제민주화"를 외치고 있다. 경제민주화의 주된 내용은 경제정의이며, 경제정의의 핵심은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다. 이런 점에서 경제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내수를 늘리고 그럼으로써 우리 경제를 다시 날 수 있게 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 세계 굴지의 투자은행이었던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기 직전 당시 CEO였던 리처드 필드는 5억 달러의 연봉을 받았다고 하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 돈을 몽땅 소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로이터=뉴시스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 

2012년 1월 27일 금요일

"불의가 판치는 사회, '정의'만으론 부족하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1-27일자 기사 '"불의가 판치는 사회, '정의'만으론 부족하다"'를 퍼왔습니다.
[이정전 칼럼] 진정 정의로운 사회

총선과 대선이 있는 금년에도 작년에 이어서 '정의'가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될 것 같다. 정치가부터 정의사회의 구현을 외치고 있고 이에 부응하여 사회 각계각층에서 정의에 대한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다보니 마치 정의로운 사회가 낙원이나 되는 듯이 많은 사람들이 정의에 대한 분홍빛 환상에 젖어 있다. 물론, 불의가 판치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정의로운 사회가 과연 이상적인 사회인가? 마르크스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스위스에 가보자.

스위스에 루체른이라는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가 있다. 이 도시의 중심가에는 유명한 음악가 바그너가 자주 들렸다고 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중국음식점이 있고 거기에서 멀지 않은 공원에는 관광객이라면 으레 들려보는 유명한 사자의 상이 있다. 이것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사자는 용맹의 상징이다. 그런데, 커다란 암벽에 새겨진 이 사자는 한껏 용맹을 뽐내기는커녕 심장에 창을 맞고 죽어 가는 사자다. 그래서 이 사자 상을 '빈사의 사자 상'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 스위스 루체른의 '빈사의 사자 상'

스위스라고 하면 정밀한 시계나 아름다운 경치만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스위스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용병(傭兵)이 그것이다. 세계적으로 용맹을 떨쳤던 스위스의 용병은 프랑스 대혁명 때에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루이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 왕비가 기거하던 궁전으로 시민혁명군이 진격해 들어오자 궁전을 수비하던 프랑스 군대는 혼비백산해서 자기나라 왕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고 뒤따라 외국 용병들도 모두 도망갔다. 유독 스위스 용병만이 끝까지 남아서 남의 나라의 왕과 왕비를 위해서 싸우다가 220여명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창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상징이 새겨진 방패를 끝까지 끌어안고 죽어 가는 루체른 공원 사자의 상에는 바로 그러한 스위스용병의 굳은 절개가 깊이 각인되어 있다. 언젠가 로마교황청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스위스 용병의 신의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로마 교황청의 최측근 경비는 스위스 용병에게 맡기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스위스 사람들은 이 관례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일화는 스위스 사람들이 얼마나 신의를 잘 지키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시계처럼 틀림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스위스 사회는 원칙이 잘 지켜지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상당히 정의로운 사회인 셈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스위스 사람들은 유럽에서 제일 인기 없고 욕을 많이 얻어먹는다. 스위스 사람들은 눈을 번득이고 서로를 감시하다가 약간이라도 수틀리는 짓을 목격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곧장 경찰에 고발해버린다. 스위스 사람들과는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기가 참 어렵다고 한다. 5만원어치 상품을 선물로 받자마자 그 상품의 가격을 알아보고 나서 곧장 시계처럼 정확하게 5만 원짜리 상품으로 되갚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아마도 정나미 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스위스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고 한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있고 질서가 잘 잡혀있지만, 숨 막히고 정나미 떨어지는 사회, 이것이 스위스 사회라고 그곳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스위스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오죽하면 스위스에 살다가 독일에만 가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느낌으로 한숨 돌리게 되고, 프랑스에 가면 더 사람 살만하다고 느끼게 되며, 이태리에 가면 절로 흥이 난다는 농담이 있을까.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제일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때에 짝과 같이 쓰는 책상의 가운데에 금을 그어 놓고 금을 넘어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칼로 잘라버리던 짓을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것이다. 이런 못된 짓을 하는 짝은 결코 사이가 좋을 수가 없다. 이런 초등학교 어린애들의 짓이 유치해보이지만, 여기에서 정의의 원초적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의의 여신상을 보면 정의의 개념을 딱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저울과 칼이다. 각자의 정당한 몫을 저울로 재고 어긋나는 것은 가차 없이 칼로 베어버린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와 같이 우선 네 것과 내 것을 분명히 가르고 그리고 각자 자신의 몫을 빈틈없이 챙기는 데서 출발한다. 과연 그런 사회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사회인가? 저울과 칼이 우리 삶의 전부는 아니다.

가정에서 어머니가 정의의 여신과 같이 자식들의 모든 행동을 일일이 저울질하고 조금이라도 원칙에 벗어나면 가차 없이 칼로 응징한다고 하자. 과연 이런 가정이 좋은 가정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가정만은 허물을 감싸고 잘못을 용서하며, 사랑으로 충만하여 푸근하고 웃음이 넘쳐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사랑과 웃음이 충만한 곳에는 저울과 칼이 필요 없다. 누구나 엄마에 대하여 길게 얘기하다 보면 저절로눈물을 흘리게 된다. 엄마 얘기하다가 우는 배우를 TV에서 자주 보았을 것이다. 저울과 칼만 들이대는 어머니는 그런 눈물을 자아낼 수 없다. '행복한 가정'이라는 말은 있어도 '정의로운 가정'이라는 말은 없다. 정의가 구현된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사회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정의는 행복을 위한 하나의 조건에 불과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만일 당신에게 친구가 있으면 당신은 정의가 필요 없다. 그러나 당신에게 정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친구가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 부정이 만연하다 보니 정의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는 것은 당연하며 따라서 정의사회의 구현은 시급한 우리 사회의 과제다. 하지만, 과연 어떤 사회가 정말 정의로운 사회인가? 판ㆍ검사가 할 일이 없어서 바둑으로 소일하는 사회, 법과대학이 인기가 없어서 늘 정원미달인 사회, 죄수가 없어서 감옥소에서 닭과 돼지를 기르는 사회, 이것이 진정 정의로운 사회다. 우리는 정의사회의 구현에 너무 집착해서 더 소중한 것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정의에 대한 분홍빛 환상부터 버리라고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