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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9일 목요일

이명박 정부, 가장 '맑고 투명'했다!


이글은 프레시안 2012-02-09일자 기사 '이명박 정부, 가장 '맑고 투명'했다!'를 퍼왔습니다.
[이명박 5년, 빛과 그림자] 문화 정치의 실패

학술단체협의회와 은 이명박 정부의 지난 4년간의 각 분야별 정책을평가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지난 10월 29일 학술단체협의회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내용을 토대로 각 분야의 전문가의 글이 실리고, 나중에는 책으로도 묶일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스튜어트 홀의 명저 에 대응하여 <mb>라는 책이 나올 시점이다. 왜냐하면 올해는 총선과 대선을 통한 급격한 권력 재편이 예고되는 가운데, 이명박 정부에서 시행된 문화 영역에서의 성과 진단이 요청되기 때문이다.</mb>

세세한 발자취의 추적이 실증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이명박 정부를 문화적 관점에서 진단한다면 그 어느 정권보다도 '맑고 투명'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는 곧 정치 과정에서 요청되는 현란한 수사학의 부재가 보여주는 '은유의 빈곤'과 신자유주의적 생활양식의 내면화를 가능케 할 (그람시적 의미에서) 참호와 요새, (알튀세적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작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문화 정치의 실패'로 요약된다.

위와 같은 평가는 에서 주목하고 있는 다음의 사항들, 즉 제도 정치의 장악이 아닌, 도덕적·지적 리더십의 확보, 이데올로기의 훈육적 효능, 새로운 수준의 문명 내지 국가상 제시를 통한 대중적 동의 여부에 기초한다. 이런 사항들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문화적 진단 혹은 문화 정책에 대한 평가에 있어 핵심적 분석 틀을 제공한다. 즉, 이명박 정부는 국정 운영에 있어 도덕적이고 지적 리더십을 확보했는가, 사회통합을 가능케 할 이데올로기의 작동이 원활이 이루어졌는가, 질적 도약을 통해 도달해야 할 국가적 비전이 어떻게 제시되었는가의 문제를 통해 진단할 수 있다.

첫째, 이명박 정부가 도덕적·지적 리더십을 확보하며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잡았는가의 문제부터 살펴보자. 2008년에 발생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는 이명박 정부에게 향후 국정 운영의 방식을 결정짓는 중대 사건이었다. 즉, 국민과의 쌍방향 소통이 아닌 국민에 대한 일방적 소통으로 국가를 운영하게 만들었다.

'치안 통치'는 이러한 국정 운영을 반영하는 구체적 사례이다. 치안 통치란 국가 권력이 시민 사회의 제 요구를 민주적 절차를 통해 조정·관리하지 않고 공권력을 앞세워 제압하는 독선적 지배 형태이다. 국가 권력은 '국가와 사회 안전에 대한 위협'을 빌미로 불안을 상시화했고, 그에 대한 처방으로 시민적 권리의 요구나 사회적 소수 집단을 위협 요인으로 침소봉대(針小棒大)한 후, 문제 해결을 위해 공권력 투입의 필요성과 엄정 대처를 공론화해 갔다.

그런 의미에서 치안 통치는 법치주의를 중단하고 공권력을 통한 폭력을 구사하겠다는 대국민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가령, 국가는 용산 참사와 같은 저항을 '예외 상태'로 만든 후, 신속한 즉결 심판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선전하며 즉각적 진압에 나섰다. 왜냐하면 예외 상태는 법의 효력을 정지시킴과 아울러 폭력적 해결책을 최우선으로 선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대중의 자율적 실천도 사회 안전을 위협하는 범죄로 둔갑되었다. 가령,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를 거치며 이명박 정부는 무려 1300여 명을 입건하여 구속 기소자 71명을 포함한 1180여명을 기소했다. 이는 곧 동의와 타협을 이끌어낼 도덕적·지적 리더십의 확보가 이명박 정부에게 있어 처음부터 부재한 혹은 불가능했음을 보여준다.



ⓒ프레시안(손문상)
둘째, 이명박 정부는 사회 통합을 가능케 할 이데올로기의 창출 및 원활한 작동을 위해 어떤 문화 정책을 펼쳤는가의 문제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공고화는 사회 갈등을 제도화하는 가운데 국가 권력의 가치 체계를 대중에게 내면화시킨다는 점에서 문화 정책의 핵심이 된다.

문화 정책은 이명박 정부에 와서 정치적 논란과 선정적 가십 사이를 오가며 세간에 큰 이슈를 자주 만들어냈다. 가령, 독립영화전용관, 영상미디어센터, 예술영화전용관의 기존 사업자에 대한 교체,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의 예술인회관 사업에 대한 지원 재개, 한국작가회의에 대한 지원금을 시위 불참 확인서와연계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결정,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인 위원장 사태, 국립극단 해체와 전 단원의 정리 해고는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대중적 이목을 끌었다.

무엇보다도 위의 사건들은 문화 정책을 문예론적, 경제주의적, 도구적 입장에서 수립·집행하는 가운데 나타났다. 문화 정책에 대한 문예론적 접근은 문화 엘리트주의와 연결되는데, 이로부터 새로운 감수성과 스타일의 부상에 눈 감거나 기성화된 예술만을 강조하는 배타적 장르주의 혹은 전문가주의가 횡횡했다. 2008년 예술의전당 관계자가 클래식전용 공연장이라는 이유로 인순이의 공연을 불허한 사건은 이러한 정황을 보여준다.

한편, 문화의 세기에 문화를 경제주의적 관점으로 보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지나친 산업·상업적 접근은 문화 자체의 고유한 가치까지 자본의 논리로 포섭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이명박 정부의 과도한 경제주의적 태도는 국정 운영 전략에서 문화 정책을 산업과 개발 정책의 하부 영역에 설정한 점에서 발견된다. 마지막으로 문화 정책의 도구적 활용은 4대강 살리기 사업, 도시 개발 사업의 부가 가치 창출 요인으로 문화 정책의 역할을 적극 부각·동원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문화 행정의 비민주적 장악 역시 문화 정책을 도구화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초기 대대적인 매카시 선풍을 일으키며 법적 임기가 보장된 기관장들을 해임하고 보수 인사로 교체했는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김정헌 위원장 사건은 대표적 사례이다.

마지막으로 이명박 정부는 어떤 국가 발전의 상을 제시하며 대중을 이끌었는가의 문제이다. 정권 교체를 이룬 이명박 정부는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기 위해서는 '기업 프렌들리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관 및 기관장 임명 과정에서 나타난 '고소영 사건'과 잇따른 상위 1퍼센트만을 위한 정책(법인세 인하와 종합부동산세 완화 등 '강부자 감세' 정책, 교육 시장화, 보건의료 시장화)은 이명박 정부의 도덕성 및 국정 기조(신자유주의 정책)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이로부터 국민적 저항은 거세질 수밖에 없었고, 국정 지표의 슬로건을 '녹색 성장', '공정 사회', '친서민 공생 발전'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수사는 국민들에게 전혀 먹혀들지 못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노선을 따르는 이상 이명박 정부가신경 쓰는 혹은 정책의 최대 수혜자는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위와 같은 정황은 두 국민으로 분화되는 사회 양극화에 기인한다. 이때 무한경쟁에서 낙오되어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배제로 주변화 되는 다수의 사람(대중)들은 삶의 안정성을 심각하게 위협받았다. 가령, 구조 조정에서 이루어진 실직과 명퇴는 예외적이 아닌 정상적 상태로 되어 갔다. 이로부터 국가의 주요 책무였던 복지 제도는 해체되고 시장 논리가 전면화되었으며, 대중의 삶은 사회적 보호의 문제가 아닌 법과 질서의 문제로 분류되었다. 즉, 시장에 참여할 수 없는 무능력은 범죄로 취급됨과 동시에 이들의 문제는 사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다. 이 속에서 국가는 대중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희망의 정치가 아닌, 엄정한 공권력을 앞세운 억압의 정치에 기초하며 국가의 상을 만들어갔다.

요컨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문화적 독해 및 문화 정책에 대한 평가는 상징 조작과 여론 동원이라는 문화 정치의 기본조차 수행하지 못한 무능력으로 요약된다. 역대 정권 중 가장 폭압적이라 평가되는 전두환 정권조차 '3S' 정책을 교묘하게 활용하며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역설적으로 이명박 정부는 문화의 세기라 지칭되는 문화의 급격한 부상 속에서 문화적 상상력의 빈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공권력을 앞세운 일방적 통치방식은 지배 권력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매우 '맑고 투명한' 정권이었다. 또한 그 누구도 은유와 상징 속에 은폐된 지배 권력의 욕망을 징후적으로 독해할 필요가 없었다.



/김성일 경희대학교

2012년 1월 15일 일요일

‘신앙 좋은’ 사람은 왜 거품 물고 독기 뿜을까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현기자 블로그 휴심정 2012-01-13일자 기사 '‘신앙 좋은’ 사람은 왜 거품 물고 독기 뿜을까'를 퍼왔습니다.

종교는 집단적인 현상으로 필연적으로 배타성 띠어
  영성 억압 받고 고갈된 종교는 거대한 시체 덩어리


 지난 2004년 서울광장 구국기도회 장면 사진 <한겨레> 자료

평생 종교 공부를 해 온 사람인데 요즈음 나는 내가 왜 하필 그 많은 학문 가운데서 종교라는 것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살아왔는지 자문해볼 때가 많다. 또 개인적으로도 평생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해 온 사람인데 무엇을 위해 그 많은 시간과 정력을 거기에 소비해왔는지 묻게 된다.
종교라는 것이 매우 복잡다단한 현상이기 때문에 종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리고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공부해야 할지 늘 고심하게 된다. 한편 관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자기가 정말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과연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순수’한 종교 현상은 없지만 종교를 종교이게끔 하는 게 영성
  종교는 인류 역사를 통해 사회, 문화, 도덕, 정치, 경제, 철학 사상, 예술, 건축, 공예 등 삶의 다양한 분야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왔기에 종교를 공부하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관심을 가질 수 있으며 종교가 부차적 관심이 되는 경우도 많다. 사실 ‘순수한’ 종교 현상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언제나 삶의 다양한 활동들과 연계되고 섞이면서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의 가장 순수한 면, 종교를 종교이게끔 하며 종교만의 고유한 면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영성일 것이다.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바는 인간은 영성을 지닌 영적 존재로서 어떤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 초월적 실재가 인간과 세계를 초월한다고 믿든 아니면 인간의 마음이나 세계에 내재한다고 믿든, 종교는 오감을 통해 외부 세계에 관여하는 감성과 사고 활동을 하는 이성과는 다른 영성이라는 또 하나의 성품이 인간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영성을 자각하고 실현하게 하는 것이 종교의 근본 목적이라고 가르친다. 이에 비하면 종교와 관련된 여타 현상과 관심들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 종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면, 한 종교가 얼마나 많이 영적 인간을 만들어 내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우리나라 종교계를 보면 회의를 넘어 절망감마저 들 때가 많다. 우리나라 신자들은 대체로 종교생활은 무척 열심인데 정작 영성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인상을 준다. 오히려 신앙이 아주 ‘좋고’ 신앙생활에 열성인 사람일수록 영성과는 거리가 멀고 아집, 독선, 편견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를 흔히 본다. ‘신앙’이 좋다는 사람이나 종교생활에 열심인 사람 하면 왠지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나만의 특이한 경우일까?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입에 거품을 물고 얼굴에는 독기마저 품은 듯 열심히 자기 이야기만 하려는 신자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많이 배웠으면서도 무엇이 두려워 불편한 마음으로 종교에 매달려 살까

여하튼 영성은 고사하고 일반적 상식과 도덕성에도 못 미치는 신자들로 넘쳐나는 것이 우리나라 종교계의 현실이다. 뉴스 매체를 통해 접하는 한국 종교계의 모습은 어떠한가? 온갖 탐욕과 비리가 판을 치며 이권다툼, 교권다툼이 끊이지 않고 심지어 세속의 법정에까지 끌고 가는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있다. 우리나라 종교계의 현실을 알면 알수록 과연 정상적인 생각과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 속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종교단체에 몸을 담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지금이 종교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던 중세시대도 아니고 웬만한 사람은 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우리나라도 이제 선진국 문턱에 진입했다는데, 무엇이 두려워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불편한 마음으로 종교에 매달려 사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냥 보기 싫다고 떠나버리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임을 알면서도 답답해서 하는 소리다. 여하튼 우리나라 종교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와 영성이 유리되어 따로 논다는 것이다. 가장 영적이어야 할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영성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새해 벽두부터 우리 종교계를 이렇게 싸잡아 매도할 생각은 없고 또 이렇게 비관적으로만 볼 일도 아니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순수한 영성을 지닌 다수의 성직자들과 양식 있는 신도들이 묵묵히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기에 우리 종교계, 우리 사회가 그나마 이 정도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또 어디든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기 마련이며 종교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고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의 존재 이유 자체가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면, 우리는 종교 지도자들과 신앙인들에게 적어도 평균 이상의 도덕적 수준과 영적 수준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더군다나 종교에 투입되는 엄청난 시간과 물적 자원을 고려해 볼 때 한국종교계는 아무래도 후한 점수를 얻기는 어려울 것 같다.



로마 가톨릭교황 베네딕트 16세가 성탄 미사를 드리는 모습 사진 <한겨레> 자료

창시자는 유연한데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억압…종교는 성공이 곧 실패
  요즈음 우리 사회와 종교계에 ‘영성’이란 말이 제법 자주 사용되고 있다. 지금 나 자신도 그렇게 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영성이라는 다소 모호한 단어가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서 쓰이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영어의 ‘spirituality’에 해당하는 말이라 여겨지며, 초월적 실재 혹은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서 초월적 시각에서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영적 본성 내지 성품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여하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소하게 들리던 이 단어가 이제는 퍽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특별히 연구해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저 감으로 느끼기에는 사람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종교’라는 말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나 자신의 경우는 그렇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종교라는 말보다 영성이라는 말을 선호하는 것은 현대인에게, 특히 오늘 우리 한국사회에서 ‘종교’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만이 아니라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영성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그러할까?
  종교는 우선 집단적인 현상인 반면 영성은 개인적이다. ‘나 홀로 종교’란 있을 수 없다. 종교는 집단적이기 때문에 조직과 제도를 필요로 하며, 조직과 제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지도자와 전문가를 필요로 한다. 종교도 집단이고 체제인 한 타 집단들로부터 자기를 차별화하고 자기만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과 제도를 갖추고 신자들을 관리해야 하면 사상과 교리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종교는 필연적으로 테두리를 긋고 배타성을 띨 수밖에 없다.

 새로운 종교운동을 시작한 카리스마적 창시자들은 기성종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개혁적이며 사상이나 행동에서 자유롭고 유연하지만, 다음 세대로 넘어가고 추종자들이 늘면 각종 규율이 생기고 제도와 체제를 강화하게 된다. 어쩌면 종교는 성공이 곧 실패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초창기 운동이 지녔던 자유로움과 창조성은 사라지고 신도들을 관리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위를 규제하게 되면서 억압적 기제로 작용한다. 이것이 대체로 종교들이 걷는 정해진 운명과도 같은 코스이다. 종교들마다 초창기의 정신과 비전을 선양하면서 개혁을 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죽음 고독 허무 불안 소외와의 대면이 되레 본래적인 삶 이끌어
  이와 대조적으로 영성이라는 것은 주로 우리의 마음에 관한 것이고 자기 체험적이고 자기 반성적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개인적일(personal) 수밖에 없다. 종교가 집단화되고 제도화되면 될수록 종교를 떠받히고 있던 개인의 영성은 진정성과 순수성을 상실하고 관습적이 되며 세태와 타협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의 주류 종교가 되면 될 수록 더욱 그렇다. “종교란 한 개인이 자신의 고독과 상대하는 것이다.” 라는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은 종교의 사회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 그 반대로 종교란 집단적 흥분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며 한 집단의 사회적 정체성과 결속력을 강화하고 신성화해주는 기재라고 종교사회학자 뒤르켕은 주장한다 - 깊이 새겨볼만 하다.


 사실, 뼛속 깊이 사무치는 고독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절망의 터널을 홀로 통과해 본 일이 없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갑자기 사별하는 아픔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 인생의 덧없음을 깊이 느껴 본 일이 없거나 초월자 하느님 앞에서 벌거벗은 단독자로 서 본 경험이 없는 사람, 갑자기 자기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고 세상만사가 모두 무의미하게 보이는 경험을 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 과연 영적이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죽음, 고독, 허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 무의미성, 소외감 등은 우리 모두가 피하고 싶은 감정들이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루 종일 바쁘게 ‘사회생활’을 하며 세상사에 몰두하지만, 인간이 인간인 한 언제까지나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과의 대면은 오히려 우리를 비본래적인 삶에서 본래적인 삶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한다고 실존주의자들은 말한다. 외면할 수 없는 양심의 소리, 영성을 일깨우는 영혼의 음성 혹은 신의 부름과도 같이 우리를 찾아온다. 
  인간관계에는 두 가지 상반된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과 섞이다 보면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홀로 있다 보면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든다. 영성은 홀로 있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은 일상적 자아, 사회적 자아에 매몰되었던 영적 자아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이다. 영성의 각성과 함양에는 이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홀로 있을 줄 아는 자만이 남과도 함께 있을 수 있다. 영성을 추구하는 수도자들이 때때로 자발적 고독을 선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그는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수하며 자유롭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이다. 결국 우리는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는 것이다.”(법정, ).

자기성찰을 위한, 생각마저 멈추는 자발적 침묵이 영성 함양의 필수
  영성과 고독이 함께 간다면 영성과 침묵도 떼어놓을 수 없는 짝을 이룬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화는 사귐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면서 대화를 거부하거나 대화에 참여하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그래서도 안 된다. 공연한 오해를 사기가 쉽다. 이와는 달리 고독과 침묵은 같이 가며, 자발적 고독은 사실 자발적 침묵을 위함이다. 물론 침묵이 반드시 말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혼자 있어도 끊임없이 말을 한다. 홀로 있어도 생각은 멈추지 않기 때문이며, 생각은 홀로 하는 말이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침묵은 생각마저 멈추는 무념의 경지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자기 자신과 홀로의 대화는 타인과의 대화와는 전혀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다.

 타인과의 대화는 좋든 나쁘든 남의 눈치를 보기 마련이며 자기 체면에 신경을 쓰게 되므로 정직한 대화가 되기 어렵다. 때로는 원치 않는 말이나 불필요한 말도 해야 하며, 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해서 오해와 다툼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많이 안다는 것을 과시하려 잘 모르는 것까지도 아는 체 하기도 하며, 자기가 옳다는 것은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일단 내뱉은 말이 문제가 있음에도 열심히 옹호하려 든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는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 정직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자신을 속이려 해도 속이기 어렵고, 내면의 소리를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기 어렵다. 자발적 고독은 자발적 침묵을 위함이며 자발적 침묵은 자발적 자기성찰을 위함이다. 자신에 대한 정직한 성찰 없는 영성이란 있을 수 없다.
  묵언의 수행이 영성의 함양에 필수적인 이유는 단지 자기성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영성이 추구하는 초월적 실재, 궁극적 실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언어를 뛰어넘는 불가언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삶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특히 사회/문화적 세계는 언어로 구성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어는 사물을 식별하고 분별하는 작용을 통해서 의 세계를 으로 가르고 쪼갠다. 영성이 추구하는 무한한 실재는 유한한 사물이 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이름과 형상, 속성과 특징들을 여이고 텅 빈 고적한 세계이다. 바로 그러기 때문에 이 실재는 대립과 차별의 세계를 넘어 모든 유한한 것들을 품을 수 있고 사물들 사이의 장벽을 허물며 만물을 화해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예수원에서 묵상중인 기독교인 사진 조현

 자기를 놓아버리고 자기로부터 도망간 사람이 자기도 얻고 세상도 얻어

 그래서 영성은 일차적으로 다수성보다는 단일성, 차별성보다는 무차별성을 선호하며, 일체의 상(像, 相)과 관념들을 초월하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선호한다. 일상의 세계를 무시하는 듯한 이 부정은 그러나 모든 것을 다시 품기 위한 부정이지 단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차별의 세계에 갇혀 대립하고 갈등하는 괴로움을 극복하는 부정이며 초월적 시각에서 세계와 인생을 다시 발견하고 품게 하는 부정이다. 영성이 선호하는 고독, 침묵, 부정은 모두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영성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결코 세계 도피가 아니다. 영성이 도피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 곧 자기 자신 뿐이다. 영성이 혐오하는 것은 세계 자체나 인생 자체가 아니라 이기적 욕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의 추한 모습뿐이다. 영성의 대가들은 우리가 좁다란 이기적 자아에 매여 있는 한 진정한 행복을 모르며, 어디서 무엇을 하든 매사에 걸려 넘어진다고 말한다. 삭발입산을 해도 소용없고 교회나 수도원을 찾아도 소용없다. 그러나 자기를 놓아버린 자, 진정으로 자기로부터 도망간 사람은 자기도 얻고 세상도 얻는다고 증언한다. 임제선사가 말하는 대로 “처하는 곳마다 주인 노릇 하고 서 있는 곳마다 참된”(隨處作主 立處皆眞) 경지가 열린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이지만 영성은 나만이 알고 하느님만이 아는 세계이다. 물론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도 남에게 보이려는 가식과 위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영성의 세계에서 자기기만이 차지할 공간은 크지 않다. 종교는 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사상의 통일이 필요하기에 교리에 대한 동의를 요구하지만, 영성에는 강요란 있을 수 없고 오직 자기 자신과의 정직한 대면과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집단적 동질성을 요구하는 종교는 때때로 철저한 영성가들의 정직한 말과 행동을 위험시하지만, 영성적 관점에서 보면 종교는 순수성을 상실한 타협 아니면 타락으로 보인다. 개인적 영성을 바탕으로 하여 출발한 종교는 집단화되는 순간부터 순수성을 상실하기 시작하여 영성을 키우기는커녕 장애가 되기 쉽다. 종교는 일정한 경계와 울타리를 치고 통일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개인의 차이와 자유에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고 자발성과 진정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성찰을 본질로 하는 영성에는 항시 정직성과 진정성이 살아 있으며, 이러한 영성이 살아 있는 한 종교도 생명력을 지니며 자체를 정화하고 개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반면에 영성이 억압받고 고갈된 종교는 아무리 덩치가 커도 거대한 시체 덩어리나 다름없다.

종교는 영성은 본래 반드시 같이 가야하며 그 사명은 영성을 일깨우는 것
  개인의 끝없는 정직성과 진정성을 요구하는 영성은 쉽게 교리나 도그마에 가둘 수가 없다. 영성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내적 경험이다. 교단이나 교권은 개인의 영성을 규제하고 획일화하기 원하지만 어떤 종교도 완전히 성공할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완전히 성공하는 순간 그 종교는 망한다. 종교와 영성의 완전한 일치는 본질상 불가능하며, 양자 사이의 창조적 긴장은 종교 자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종교는 체제 유지를 위해 정치권력과 유착하기도 하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도 하며 때로는 전쟁을 부추기지만,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영성은 권력이나 부와는 거리가 멀다. 종교는 교리를 정립하고 정통을 수호하려고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이단으로 몰아 탄압하지만, 영성은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성찰하며 물리적 힘에 의존하기보다는 자기 비움을 우선시하며, 우리와 저들을 가르기 전에 모두를 하나로 감싸 안는다. 종교 지도자들은 때때로 하느님의 뜻을 들먹이면서 집단적 이기주의를 부추기고 성전(聖戰)을 독려하지만, 영성가는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집단적 광기에 휩싸이지 않는다. 종교는 종종 전쟁의 원인이 되지만 진정한 성전(jihad)은 오지 자기 자신과의 싸움뿐이라고 이슬람의 수피 영성가들은 말한다. 종교는 빠지면 빠질수록 위험하지만 영성은 깊으면 깊을수록 자유롭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종교를 지나치게 폄하하고 영성을 무비판적으로 미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런 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처음부터 어떤 의도성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의도성은 종교를 비판하고 종교에 대한 혐오감을 증폭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종교를 옹호하려는 데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내가 종교와 영성을 지나치게 차별화한 것은 사실은 종교와 영성이 동일시됨으로써 행여 영성이라는 진주가 종교라는 진흙에 묻혀서 함께 외면당하지나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영성은 본래 반드시 같이 가야하며, 종교의 목적과 사명은 어디까지나 각 사람의 영성을 일깨우고 함양하는 데 있다. 인류 역사를 통해 영성은 실제로 특정한 종교 전통들 속에서 함양되어 왔다. 하지만 강력하고 순수한 영적 운동으로 시작한 종교들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전통의 무게가 더해지고 제도가 공고해지면 ‘정통’의 수호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양심을 짓누르고 영적 진정성을 훼손하는 기재로 작용하게 된다. 여기에는 영성 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한 종교를 절대화하지 않고 비종교의 경계까지 넘나드는 제3의 영성

 순수한 영성 운동도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제도화 되고 권력화 된다. 동서양 수도원의 역사가 이를 보여주며 오늘날도 많은 수도 단체들이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래서 수도원도 개혁 운동이 필요하며, 스님들 가운데는 절을 떠나 토굴에서 수행하는 제2의 출가를 감행하기도 한다. 종교도 처음에는 순수한 영성운동으로 출발했다는 사실, 종교 안과 밖에서 출발한 각종 영성운동도 ‘성공’에 비례하여 종교의 길을 가게 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종교와 영성의 차이를 결코 과장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종교는 본성상 집단적이고 영성은 본성상 개인적이라는 명제는 여전히 타당하다.
  개인의 발견과 더불어 주체적 인간이 출현하는 근현대 세계로 들어오면서 종교는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라는 의식이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현대인들에 의해 외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는 외면당할지언정 인간의 영성이 사라지거나 무시되는 일은 없다. 영성이 감성이나 이성과 더불어 인간 본성의 일면인 한, 현대인이라고 해서 영성을 외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오히려 종교의 전통과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짐에 따라 다종교적 영성, 초종교적 영성, 또는 비종교적 영성을 키울 수 있는 공전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종교 간의 벽을 넘고 종교와 비종교의 구별마저 초월하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영성을 회복하고 실현할 수 있는 초유의 기회를 누리게 된 것이다.

현대인들은 제도 종교들이 더 이상 인간의 의식을 지배할 수 없는 시대에 살면서 한편으로는 영적 공허 속에 방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형태의 영적 실험을 하면서 이전 시대의 인간들이 누려보지 못했던 영적 자유와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종교를 넘어 영성으로, 한 종교에 갇혔던 시야를 벗어나 인류 전체의 영적 자산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현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나는 이것을 ‘제삼의 영적 세계’라고 부르고 싶다. 한 종교의 언어와 전통에 사로잡혀 절대화하지 않는 영성,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세속주의도 아닌 영성, 나아가서 종교와 비종교 - 성과 속, 진과 속 - 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비종교적 영성이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서구 사회들의 경우 이러한 초종교 영성은 동양 종교들에 대한 관심 혹은 환경/생태적 영성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서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대형 서점의 종교 서적 코너를 한 번 방문해 보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동양종교들에 대한 책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그만큼 수요가 있기에 출간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고등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의 의식 수준은 이제 더 이상 한 종교에 묶일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지 오래다.

단단히 포장된 사회적 자아가 갑자기 무장해제 되는 순간 영적 눈 뜨여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직 지독한 종교적 배타주의의 목소리가 아무리 크게 들린다 해도, 침묵하는 다수의 의식 속에는 종교란 결국 사랑을 실천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평범하지만 심오한 생각이 일반화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종교들은 길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일종의 직관적 종교다원주의론을 펴기도 한다.
  영적 인간관에 의하면 영성은 우리 마음 속 깊이 감추어져 있는 인간 본연의 심성이다. 인간이 인간인 한 대면해야 하고 대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성 그 자체에 속한다. 표피적 자아 아래 숨겨진 심층적 자아, 영적 자아, 참 자아(진아)와의 대면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겹겹으로 단단히 포장된 사회적 자아가 갑자기 무장해제 되는 순간 영적 눈이 뜨인다. 선불교에서는 이런 개안의 경험을 돈오(頓悟)라고 부른다. 선에만 돈오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유사한 영적 체험은 모든 종교에서 발견되며, 종교와 특별한 인연이 없는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욕심이 만든 허상에서 벗어나 세계와 인생의 실상을 보게 되며 자기 존재의 참다운 가치를 발견한다. 소유보다 존재에, 성취보다 살아 있음에 더 큰 행복을 느끼며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되어야 할 자기와 현실적 자기, 본래적 자기와 비본래적 자기, 본질과 실존의 괴리 속에서 괴로워한다. 부처와 예수, 공자나 노자 같은 성인은 이러한 괴리와 소외를 완전히 극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터운 표피적 자아를 뚫고 들어가 영혼의 심층에 깔려 있는 깊은 자아를 만나 거기로부터 사는 진정한 사람들이다. 이 심층적 자아는 이런 저런 우연적 특성을 지닌 표피적 자아, 끊임없이 경쟁하고 갈등하는 차별적 자아가 아니라 무차별적 자아, 순수한 자아, 보편적 자아, 초월적 자아로서 만인을 품을 수 있고 만물과 하나 되는 우주적 자아이며 하느님과 하나 되는 신적 자아이다.

수행이든 은총이든 영성의 핵심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벗어나는 것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기의 현실적 모습을 거부하도록 추동하는 자아로서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 혹은 씨앗, 하늘로부터 품수 받은 천성, 부처의 성품, 아트만, 내면의 빛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영성의 세계에서는 하느님과의 대면은 곧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며 자기를 아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길이다. 영성의 완전한 실현은 하늘과 인간의 완벽한 일치인 천인합일(天人合一) 또는 신과 인간의 완벽한 일치인 신화 혹은 신인합일(神人合一)이다. 이렇게 우주와 하나 되고 신과 하나 되며 부처와 하나 되는 영성이야말로 인간의 지고선이며 존엄성의 진정한 근거이다. 그리고 영성이 인간의 본성인 한, 영성의 자각과 실현은 곧 참다운 인간이 되는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일치의 경지는 죄악으로 덮여 있는 범부들로서는 도저히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신비적 일치의 영성보다는 초월적 타자로부터 오는 은총에서 인간의 희망을 보는 신앙적 영성도 있다. 이른바 ‘타력’ 신앙적 영성으로서, 자신의 노력과 수행으로 자기의 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성에서 자력과 타력의 구별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 영성의 세계에 ‘자력’의 오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행이든 은총이든 영성의 핵심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벗어나는 데 있다. 자기포기 없이 은총은 주어지지 않으며 은총의 도움 없이 자기초월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은총을 은총으로 깨닫는 것은 영성이며, 영성이 일깨워지는 계기는 은총으로 주어지고 영성의 완성 또한 자신의 힘보다는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참 인간’(ein wahrer Mensch)이라고 부르는 사람, 임제 선사가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어떤 모습의 사람일까? 욕심이 없으니 다툴 일이 없고, 소유하지 않으니 잃을 것이 없으며, 잃을 것이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다. 성과 속, 진과 속 어디에도 걸릴 것이 없으며 언제나 자유롭다. 성직자들처럼 유별난 복장을 하지 않으며 특별히 근엄한 행동을 하거나 이상한 말투로 말하지도 않는다. 상식을 무시하지 않으며 권위로 자신을 포장하지도 않는다. 겸손하지만 비굴하지 않으며 목에 힘주는 일이 없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 물처럼 부드럽고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되 슬픔과 기쁨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 많은 것을 알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 부지런히 일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 모든 것을 누리지만 하나도 소유하지는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영성을 사랑하는 자들이 흠모하는 참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2011년 12월 22일 목요일

"조중동 종편 거부로 민주사회 기반을 지키겠다"


이글은 미디어스 2011-12-22일자 기사 '"조중동 종편 거부로 민주사회 기반을 지키겠다"'를 퍼왔습니다.
교수‧법조인‧문화예술인 622명 종편 불참 선언

민변, 문화연대, 민예총, 민교협 등 15개 법조‧문화‧학술 시민사회단체들이 조중동 종편 ‘불참여’를 선언하며 교수·법조인·문화예술인·언론인 622명의 ‘불참여자’ 명단을 발표했다.

▲ 22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조중동 종편 '불참여'는 국민의 불복종 선언이다' 기자회견ⓒ미디어스

시민사회단체들은 22일 오전 프레스센터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조중동 종편 불참여는 국민의 불복종 운동”이라고 선언하며 “조중동 종편에 대한 집단적 거부로 민주주의 사회의 기반을 지키겠다”고 밝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류제성 사무처장은 “종편은 출범 자체가 위헌, 불법으로 존재 자체가 법적 모순덩어리”라며 “헌재가 대리투표, 일사부재의 원칙 등을 지적하며 투표가 정상적이고 합법적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없다며 절차상의 위헌을 지적하고 그 시정을 국회 자율에 맡겼는데, 국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출범 자체가 위헌적이고, 개국 이후에도 언론의 다양성과 다원성을 침해, 헌법과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고 있다”며 “민변은 인터뷰 및 일체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언론연대 대표인 전규찬 교수는 보다 적극적인 지식인 운동을 요구했다. 전 대표는 “종편 탄생에 언론학자, 지식인 모두가 책임이 있다”며 “불참여 선언 이전에 이에 대한 고발과 양심고백이 먼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선언은 그런 점에서 대단한 선언이 아니라 너무나 초라한 선언으로 최소한의 양심고백일 뿐인 못난이 선언”이라고 말했다. 전 대표는 “불참여 선언은 최소 수준으로 선언에 그쳐선 안 되고 미디어 생태계를 재복구하는 성실한 활동이 이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정치권을 향해서는 ‘미디어렙법의 조속한 입법’을 요구했다. 이와 함께 방통위를 향해 종편에 대한 부당한 ‘무더기’ 특혜를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