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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8일 목요일

빼앗긴 자들이여, 광장을 점거하자


이글은 레디앙 2012-03-07일자 기사 '빼앗긴 자들이여, 광장을 점거하자'를 퍼왔습니다.
[기고] 3월 10일, '희망의 광장'을 위해…99%를 위한 새 시대

송전탑에도 숱하게 올라봤다도심의 CC카메라탑은 셀 수도 없다한강 난간에 올라가도 봤고매달려 있다 강물로 뛰어내려보기도 했다크레인에도 올라봤고포크레인 위에도 올라봤다건물 옥상에도 올라봤고지붕 위에도 올라봤다
손수 지어 오른 망루도 셀 수 없다망루에서 불타 죽고도1년 동안 장례도 못 지내고 냉동고에 갇혀보기도 했다 목 매단 이뛰어내린 이화염에 휩싸인 이곤봉에 방패에 맞아 죽은 이말할 수 없다
도대체 이 땅의 빈민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도대체 이 땅의 농민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도대체 이 땅의 1700만 노동자 가족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도대체이 땅의 평범한 이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공장 문도 닫히고은행 문도 닫히고법원 문도 닫히고국회 문도 닫히고언론사 문도 닫히고주인집 문도 닫히고민주주의도 닫히니모두의 미래가 닫히고모두의 꿈이 닫혔다
도대체우리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빼앗긴 자들이여다시 민주주의의 거리를 열어라쫒겨난 자들이여저 너른 광장을 점거하라생을 반납하지 말고저들을 제압하라좌절은 1%의 몫보라. 99%를 위한 새로운 세기가 저기 다가오고 있다
                                                 * * *
[덧말]
아직 내려놓지 못한 각자 크레인 위의 삶


▲행사 포스터.
‘희망의 버스’ 건으로 구속되어 3개월여를 차디찬 마루바닥의 0.9평 독방에서 지내다 얼마 전 보석으로 나왔다. 이것도 운명인지, 출소 인사를 해야 할 절친한 이들이 모두 영하 10도의 혹한에 ‘희망뚜벅이’들이 되어 서울에서 평택 쌍용자동차까지 걷기 행진을 하고 있었다. 가서 인사를 하는데도 모두 바빠 말 건네기도 계면쩍었다.
주변 걱정도 많아 바로 발 수술을 받으려 했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소선 어머니 묘소 참배는 하고 들어오고 싶었다. 작년 10월 어머니의 소천 때 ‘이소선 어머니의 희망버스’를 제안하고, 모시며 했던 약속이었다.
85호 크레인 위 사람들이 무사히 내려오고, 나와 정진우 씨도 수배가 풀리면 다함께 어머니 묘소로 찾아뵙고 좋아하시던 소주 한 잔, 담배 한 개비 올리겠다는 약속이었다. 다시 내가 병원으로 들어가게 되면 언제 지킬 수 있을지 모르는 터라, 급하게 일정을 맞춰 어머니 묘소를 다녀왔다.
모란공원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그제서야 우리는 편하게 몇 마디씩 그간 소회를 얘기하며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검찰은 우리를 공동공모정범이라 해서 무슨 일을 사전에 협의하고 공모한 이들이라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날 85호 크레인 위에 올라 가 있던 김진숙과 정홍영과 박성호 씨의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서러운 눈물을 보아야 했다. 나도 벅차올라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2차 희망버스가 계획된 후 연일 85호 크레인에 대한 사측과 용역깡패들의 침탈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던가. 박성호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차마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던 이야기. 만약에라도 진짜 강제 침탈이 벌어지면 여기에서 생을 버릴 수도 있다는 각오들을 했다는 얘기였다. 2009년 쌍용자동차 건물 지붕으로 쫓겨 올라갔다 내려온 이들이 아직도 에서 심리상담 치료를 받고 있듯, 당시의 아픔들이 아직도 모두 이 안전한 평지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음을 서럽게, 아프게 느껴야만 했다.
무엇을 이기고, 무엇이 끝났나?
그렇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크레인 위에서 내려오지 못했고, 아직도 하고 싶은 말들이 많다. 김진숙과 그의 동료들은 집행유예 등의 형벌을 받아야 했고, 나와 정진우 씨는 이 사회에 작은 희망의 씨앗 하나 심는 일에 함께 했다는 까닭으로, 아픈 이웃을 사랑하고 도우려 했다는 죄로 구속이 되어야 했다. 또 수많은 이들이 약식 기소되어 수백만원 씩의 벌금 폭탄과 아직도 끝나지 않은 기소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한진중공업 사측과 어용노조 집행부는 곧바로 지친 조합원들을 협박 회유해 복수노조를 만들었다. 1년 이내 복직이라는 약속을 어떻게라도 파기해보고 싶은 불손한 시도들이 현장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이기고, 무엇이 끝났다는 말인가.
재능교육 특수고용 비정규직들은 1500일을 결국 넘어야 했고, 얼마전 콜트-콜텍의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은 5년만의 대법 판결에서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라 함은 반드시 기업의 도산을 회피하기 위한 경우에 한정되지 아니하고, 장래에 올 수도 있는 위기에 미리 대처하기 위하여 인원 삭감이 객관적으로 보아 합리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도 포함된다’는 지난 판례의 적용을 받기도 했다.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로만도 그간 수백만명의 정리해고가 가능했는데, 이젠 ‘장래에 올 수도 있는 위기’까지 노동자들이 감당해야 한다. 그 사이 유성기업과 구미 KEC에서는 더 많은 이들이 잘려 나갔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는 이 시대 모든 평범한 이들의 공통 운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이 3월 10일 토요일 시청광장에 다시 모여 이번에는 ‘희망의 광장’을 열어보자고 했다 한다. 우리의 연대로 한진중공업에서 정리해고를 막아냈던 소중한 승리의 경험을 살려, 이제는 한 공장의 울타리 안에서가 아니라, 이 사회라는 울타리 전체에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라는 우리 시대 최악의 악성종양을 도려내는 간절한 ‘희망’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사탕발림 공약이나마 다행
투쟁하는 노동자들도 개별 사업장 단위를 넘어 사회적으로 연대해 보자는 것이다. 마침 희망의 버스 이후 2012년 총선과 대선이라는 정치적 공간을 맞아 모든 정치권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법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고 또 다시 사탕발림의 빈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그것을 이루려면 작년 희망버스 때보다 더 많은 이들이 모여 광장에서 민중의 법을 먼저 만들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총대선이 어떤 당의, 어떤 인물들의 당선과 집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요구와 의제를 분명히 하고, 한국 사회의 질적 변환을 꾀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들이다. 그래서 다시는 우리 모두가 여야를 불문하고 구시대적인 정치인들의 권력 놀음의 거수기나 주변이 되지 말고, 우리 모두가 이 막중한 정치의 시기에 분명한 주인 행세를 해보자는 것이다.
이제 수술을 마치고 거동이 아직 불편해 나는 나가지 못하지만, 이 광장에 좀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날 전국에서 모이는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이 다시 김진숙처럼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군요."라는 감격의 인사를 할 수 있도록 진짜 많은 이들이 함께 해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무슨 보살행을 바라는 것도, 무슨 동정이나 연민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얼마 전 나온 콜트-콜텍과 현대차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대법 판결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의 싸움은 하나하나가 우리 사회의 평범하고 가난한 90%의 운명을 구하고자 하는 사회적 투쟁들이다. 이 싸움을 이제 더 이상 소수의 노동자들이 외롭게, 신경쇠약에 걸려가며, 가정이 파탄나며, 관계들이 모두 어긋나며 과도하게 짊어지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
가슴 아픈 일들이지만, 보석으로 출소 이후, 몇몇 기자들과 사람들로부터 쌍차 희망텐트와 재능교육 특수고용직 1500일 투쟁, 인천 부평공장의 콜트-콜텍 농성 등을 얘기하며 "그곳엔 크레인이 없지 않느냐?", "그곳엔 96일을 굶던 김소연이, 김진숙이 없지 않느냐?" 거기다 어떤 때는 눈앞이 아득하게도, "송경동이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내 가슴이 미어진 이유
그럴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아니 그곳에 있는 한 명 한 명이 모두 김진숙이며, 김소연인 것이 보이지 않냐고, 느껴지지 않냐고 울고 싶었다. 그런 전형적 상황이, 그런 야만적인 상황이, 그런 가슴 아픈 사연들이 다시 와야만 또 한번 잠깐 움직일만큼 사람들이 나약하게 보이느냐고, 바보스럽게 보이느냐고, 영악하게 보이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다시 또 한 명의 김소연이, 유명자가 굶으러 들어가고, 또 한 명의 김진숙이 죽음의 계단 한 칸씩을 오르고, 또 누군가 매달리려 내려가고, 또 누군가 내가 희생해서라도라는 위험한 생각의 귀퉁이로 몰린다는 것을 잊었냐고 묻고 싶었다. 다시는 그 누구도 혼자 죽음을 결심하지 않아도 되게 이 평지에서, 이 거리에서, 이 광장에서 먼저 연대하면 좋지 않으냐고 묻고 싶었다.
물론 꿈꿔지는 모든 것은 실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상상되어진다. 하지만, 그 꿈이 모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제반의 조건들이 맞아야 하는 한계가 있음을 안다. 삶은, 사회는 그런 것이라고 뻗쳐오르던 기대를 접는 때가 더 많기도 하다.
또 어떤 한 사람이 계획되어있지 않았던 한 손만을 내밀 때도 얼마나 많은 고민과 결의가 필요한지도 어렴풋이 알기에 함부로 사람들에게 원칙주의적으로, 교조적으로 어떤 행동을 요구할 수도 없다. 그건 오히려 선의로 치장된 폭력이 되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꿈꿔본다. 그런 광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이들이 많을 거라고. 모두가 그런 열린 광장의 시대를 다시 꿈꾸고 있을 것이라고, 법도 국회도 은행도 공장도 주택도 사랑도 우정도 그 어떤 것도 모두 닫혀 있는 이 시대의 척박한 공기 속에서 곧 질식할 것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광장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법과 윤리를 새롭게 주체적으로 제정하고 싶은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한 이유
사실, 희망버스의 법정에서 나는 거의 대부분의 혐의를 부인했다. 내가 다 한 것으로 하고 더 이상 피해자들을 만들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큰 오만일 수 있었다. 희망의 버스는 실제 누가 주고 누가 부이고, 누군가 지시를 내리는 소수의 갑이 있고, 이에 무작정 따르는 을이 있었던 수동적인 운동이 아니었다. 참여한 모든 이들이 그 현장의 주인이었으며, 기획자였고, 주동자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나도 희망의 버스 운동이 모두 설명되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영광임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희망버스 승객 한 사람에 불과했음을 확인하고, 전근대적인 검찰의 기소 내용을 모두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
정당한 나의 주장대로 희망의 버스 승객들은 나와 보니 그간에도 많은 변화와 변이를 거듭하고 있다. 쌍용의 ‘희망텐트촌’으로, 연대와 ‘희망의 뚜벅이’들로, 강원도와 김해로 향하는 ‘생명의 버스’로, 강정으로 향하는 ‘희망의 비행기’로 수없이 진화해가는 희망의 씨앗들이, 산소들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런 새로운 ‘기획자’들이, ‘주동자’들이 이 광장에 함께 해주기를 꿈꿔 본다. 그들의 연대로 다시 새롭게 출발하는 ‘희망의 광장’이 풍성해지기를, ‘웃으며 끝까지 즐겁게, 투쟁’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빨리 나아 나도 그 문화의 광장에, 기쁨의 광장에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2011년 6월 11일, 1차 희망의 버스 당시 비가 내리는 85호 크레인 아래에서 어울려 밤새 노래하고 춤추던 그 날처럼 눈물겨우면서도, 아름다운 광장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재작년 기륭 투쟁 과정에서 이 병원에 들어와 웅크리고 누워 겨울을 보내고 있을 때 김진숙 씨가 85호 크레인 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곤 가슴이 무너졌었다. 그래도 올해는 다행이다. 그가 잘 내려와 이번 희망의 광장 때는 팔순을 맞은 백기완 선생과 토크쇼도 연다고 한다. 허클베리핀·와이낫·무키무키만만수·윈디시티 등 밴드들이 함께하는 희망 콘서트의 제목은 '꽃들에게 희망을'이다.
다시 새 봄이 오고 있고, 이 봄은 이제 더 이상 눈물만 흘리고 있는 봄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쭈뼛쭈뼛 새순들 마냥 솟는다. 이런 생동하는 기분이, 기운들이 너무 좋다.
* 추신 : 부산구치소 시절 지켜주고 찾아봐 주셨던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여러분들의 간절함이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열심히, 잘 사는 일로 갚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더불어 희망의 버스 당시 정말 많은 분들이 각양각색으로, 적재적소에서 수많은 일들과, 아름다운 마음들을 내어주신 것으로 압니다. 그분들의 수고가 잊혀지지 않고 기억될 수 있도록 찬찬히 제가 아는 일들을 이 역사 속에 기록해 나가겠습니다. 

2012년 03월 07일 (수) 12:07:27 송경동 / 시인

2012년 1월 31일 화요일

"부역언론인 처벌해야…반성은 이번이 마지막"


이글은 미디어오늘 2012-01-20일자 기사 '"부역언론인 처벌해야…반성은 이번이 마지막"'을 퍼왔습니다.
[인터뷰] 김진혁 EBS PD, '광우병' 방송뒤 3년 만에 '다큐프라임' 제작현장 복귀


"총선이 끝나면 정권에 부역한 언론인들을 평가해야 한다.”

언론노조, 민언련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3년 간 휴업’이라는 형벌을 견딘 김진혁 EBS PD다. 그는 2008년 광우병에 대한 5분짜리 영상 ‘17년 후’를 연출했다가 자신이 원치 않던 책상에 앉게 됐다. 기륭전자 파업을 다룬 ‘3년’을 끝으로 그는 제작부서를 떠났다. 그런지 3년. 김진혁 PD는 제작부서인 교양다큐부 다큐프라임팀 연출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시대의 언론인들에게 날 선 비판을 꺼내들었다. “부역 언론인, 당신을 평가하겠다”.

그가 다시 복귀할 날을 기다리는 만큼 그의 존재는 사라졌다. 일반인들이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트위터에서뿐이었다. 그동안 연출을 아예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김 PD는 민주노총, 언론노조가 부탁한 영상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을 “아르바이트 PD였다”고 평했다. 그리고 돈과 거리를 따지지 않고 자신을 부르는 곳에 가 강연을 했다. 그 와중에 책 ‘지식의 권유’도 펴냈다. 그는 “스스로 지식채널이 되기로 했다”고 말했다.



▲ 김진혁 EBS PD

음으로 양으로 지식채널e 제작진을 도왔다. 트위터나 강연에서 들은 반응과 평가를 고스란히 전달했고, 새로운 트렌드나 주제를 제안하기도 했다. 직접 연출하지 못한 아쉬움도 컸지만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을 했다”고 자평했다. 주제도 내용도 약해진 것 아니냐는 세간의 평가가 신경 쓰였지만 프로그램이 유지되고 있고 주제도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지식채널e PD의 습관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식채널을 할 때 고민이 있으면 정리될 때까지 잠들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인터뷰 당일에도 새벽 5시가 넘어 잠이 들었다. 시작할 다큐를 그는 ‘다큐영화’라고 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 취재하기에도 부족할 시간인데 그가 요즘 하는 고민은 ‘연출’에서 시작해 ‘정치’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그 끝은 항상 ‘저널리즘’이다.

저널리즘에 대한 고민은 EBS부터 시작됐다. 김진혁 PD는 그가 속한 공간을 “진보도 보수도 꺼리는 이상한 곳”이라고 소개했다. 사실 EBS에서 노동, 빈곤, 장애를 다루거나 ‘PD수첩’과 같은 시사프로그램을 찾긴 힘들다. 몇 년 전에 <pd>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EBS는 김진혁 PD의 작품을 ‘비교육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pd>

친일파와 그 후손들과 대비되는 삶을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이야기를 다루겠다고 제출한 기획안도 두 차례 퇴짜를 맞았다. 고민 끝에 수정한 기획안이 결국 통과됐다. 그는 “회사의 입맛을 고려했다”며 웃으며 얘기했다. 김진혁 PD는 직접적으로 친일파와 대비하지 않고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에 집중할 생각이다. 그는 ‘타협’이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를 잘 드러낼 수 있는 전략이라고 했다. 저널리즘은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담론이 아니라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삶을 보여줘야 한다는 말 또한 덧붙였다. '기계적 중립에 집착하는' EBS에서 그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지난 3년 동안 저널리즘을 어떻게 바라봤느냐는 질문에 김진혁 PD는 “노종면 선배를 생각하면 아직도 미안하다”는 고백을 되풀이했다. 그는 지식채널e를 시작한 2005년부터 ‘언론운동이 이대로 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KBS, MBC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출입처만 뱅뱅 돌며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언론 현실을 언론인 스스로 깨야한다고 했다. 

“더 이상 썩기 전에 스스로 도려내야 가장 덜 아프다.”

그는 “동아투위의 정신은 사라진지 오래”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권력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힘을 휘두르며 ‘사람’과 ‘노동’을 외면하는 보수언론은 물론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간 주인행세하다 갑자기 이명박 정부에 고개를 숙인 언론들을 ‘부역 언론’이라고 질타했다. 특히 KBS와 MBC를 두고 “전두환 정권 때 언론사통폐합으로 정권에 충성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망가질 거라 생각 못했다”고 말했다. 한숨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빠르면 총선이 끝나고 이들에 대한 평가, 아니 처벌이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그는 “반성을 하려면 지금이 마지막”이라며 언론인들의 각성을 요구했다.

김진혁 PD는 가장 가까운 예를 들었다. 한진중공업과 김진숙이다. 언론은 ‘희망버스’ 아니면 ‘불법’만 보도했다. 정작 김진숙이 크레인에 올라간 까닭, 8년 전 끝내 내려오지 못한 또 다른 김진숙, 김주익의 이야기, 김진숙의 김주익 추도사, 평범한 여성노동자 김진숙이 운동권이 된 이유를 얘기하지 않았다. 진보언론과 트위터에서만 회자될 뿐이었다. 김진숙을 소금꽃나무라 불렀지만 언론은 그 나무가 본디 씨앗이었던 사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김진혁 PD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김진숙이 왜 크레인에 설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는 “맥락을 복원해야 한다”고 했다. 이제 그가 다시 짊어진, 3년 전보다 무거워진 짐이기도 하다.

드라마 연출자가 꿈이었던 청년은 어느새 자신이 인정하든 안 하든 ‘비판적 저널리스트’가 됐다. 그는 지식채널e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저항'을 했고, 보편타당한 상식에 반하는 현실을 고발했다. 그가 온몸을 비틀어 쥐어 짜낸 5분은 현실의 편린들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