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9일 월요일

수비크에서 영도까지, 한진은 하나다? [2011.08.29 제875호]


이글은 한겨레21에서 퍼왔습니다.
[기획1] 필리핀 수비크에서 보고 들은 한진중공업 노동자, 철거민의 고통… “한국의 발전은 노동자 탄압한 성과냐”고 동행한 네팔·베트남 친구들이 묻다

» 필리핀 한진중공업 수비크조선소의 노동조건을 고발하는 자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고와 저임금에 시달리는 이들의 이야기는 그칠 줄 몰랐다. 문아영 제공
지난 4월부터 필리핀 마닐라에 머물고 있다. 유엔평화대학교 평화교육대학원 과정의 한 학기가 이곳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2차 희망버스가 부산을 향할 즈음 함께 공부하는 다국적 친구들에게 수비크 방문을 제안했고, 지난 7월16일 새벽 5시 마닐라의 카티푸난 거리에서 필리핀의 주요 대중교통 수단인 지프니(2차 세계대전 뒤 남은 미군용 지프를 개조한 형태의 승합차) 한 대를 타고 수비크를 향해 출발했다. 베트남·네팔·타이·일본·동티모르·미국·필리핀 등 유엔평화대학교 석사과정 재학생 10명이 모인 것이다.
임금 떼이고 벌금 매기고
필리핀 민주청소년단체에 속한 두 사람이 여정에 동행했다. 2009년부터 수비크조선소 노동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필리핀 사회단체 ‘마카바얀’의 총무인 프레시 다국과 한진 쪽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비인가 노조지만 필리핀 고용노동부에는 협상 대상자로 인정받은 수비크 한진조선소 노동자협회의 총무 조이 곤잘레스도 합류했다. 승객들이 서로 마주 볼 수밖에 없는 지프니의 특성 덕분에 여정 내내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프레시는 한진 사태와 관련된 한국 언론의 보도에 불만을 토로했다. 나아가 자본과 권력이 결합된 이슈에 대한 대다수 언론의 소극적인 보도 태도를 비판하며 이것은 비단 한국 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필리핀의 주요 언론 보도 어디에서도 한진 수비크조선소의 노동권 문제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프레시는 문화방송의 의 현지 취재를 안내했던 사람이다. 한진의 정리해고 사태와 관련한 의 인터뷰에 한국의 박성미 감독과 함께 필리핀 쪽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던 그녀는 이 취재 내용을 희석시켰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며 유감을 표했다. 수비크조선소 노동자의 고충과 강제 이주당한 주민들 부분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고, 한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만이 중점 보도됐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수비크에 도착했다. 조이는 우리를 수비크만의 한 지점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해안과 산자락이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물길을 헤치며 그물을 걷는 조그만 고깃배 옆에서 작살을 든 청년들이 고기를 잡고 있었고, 아이들은 다이빙을 하며 여유 있게 그 주변을 헤엄쳐 다녔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크기의 가솔린 탱크선이 정박해 있는 저 너머에 한진 수비크조선소가 보였다. 바다를 둘러싼 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그 삶을 둘러싼 사회가 이 한 장면에 녹아 있었다. 미군기지를 거쳐 이제는 외국 기업의 근거지가 된 수비크 바다와 삶의 터전은 여러 세대를 거친 강제 퇴거의 현장이기도 했다. 거대 외국 기업의 하청으로 얻은 일자리에는 고된 노동과 생소한 군사문화, 그리고 억울함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전에 한진 수비크조선소 쪽에 인터뷰 요청 공문을 보냈으나 바쁜 일정 관계로 인터뷰에 응할 수 없다는 담당자의 응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노동자와 현지 주민들의 인터뷰만 진행했다. 먼저 노동자들로부터 전해들은 수비크조선소의 노동계약 시스템은 이러했다(한진으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없었으므로 노동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해들은 바를 그대로 옮긴다). 노동자들은 한진과 고용계약을 맺고 직업훈련 과정을 밟게 된다. 훈련이 끝나는 시점에서 대부분의 노동자는 또 다른 계약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받는데, 그 계약서에는 한진의 직접 고용 여부와 계약 기간이 명시돼 있다. 노동자를 모으면서는 직업훈련이 ‘무료’라고 홍보했음에도 훈련과정 이후 서명해야 하는 계약서에는 매 15일마다 노동자의 급여에서 3%가 차감돼, 한 달에 6%의 임금이 훈련비 명목으로 저당 잡힌다고 적혀 있다. 노동자들은 5년의 계약 기간을 다 채운 경우 이 금액에 해당하는 약 15만페소를 돌려받게 되지만,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거나 해고당하는 경우에는 15만페소 중 저당 잡힌 급여를 제외한 나머지 차액을 빚으로 떠안게 된다.
한 40대 노동자는 한진과 직접 고용 관계로 5년의 계약 기간 중 4년6개월의 업무 기간을 채웠지만, 계약 만료를 6개월 남겨둔 시점에서 하부 용역업체와의 계약을 강요하는 사 쪽에 반대하다 해고됐다. 따라서 그의 급여에서 다달이 차감됐던 15만페소에 달하는 금액은 계약 불이행 명목으로 영영 받을 수 없게 돼버렸다. 오히려 채우지 못한 6개월치에 해당하는 나머지 금액인 약 1만5천페소를 벌금 명목으로 납부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많은 해고 노동자가 이런 상황에 직면해 있다. 

» 한진중공업 수비크조선소 건설로 강제 이주당한 주민들이 사는 마을의 소년. 이들은 이주당한 곳에서 다시 내쫓길 위기에 놓였다. 문아영 제공
강제 이주당한 곳에서도 떠나라
우리는 수비크조선소에서 10km쯤 떨어진 카왁 마을로 이동했다. 부족한 세간살이가 쉬이 들여다보이는 원두막 같은 집들이 해변 수풀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이 마을은, 2007년 한진 수비크조선소 건설로 강제 이주당한 주민들이 재정착한 곳이다. 당시 이주 대상에 포함됐던 400여 가구 중 보상에 동의한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이주했지만, 철거 당일까지 반대한 주민들은 무장군인들에 의해 마을 밖으로 쫓겨났다. 그들은 수비크조선소의 확장에 따라 두 차례 더 이동한 끝에 이 마을에 정착했다. 주민들은 공포의 기억을 증명하려는 듯 당시의 사진들을 가져와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가장 먼저 보상에 동의한 주민들은 대부분 당시 마을에 정착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보상금을 받아 마을을 떠나는 것도 그들에게는 괜찮은 거래였을 것이라고 주민들은 입을 모았다. 상당수 주민들은 정당한 보상금을 받아내려는 긴 싸움에 지쳐 하나둘 마을을 떠났다. 마을 주민들이 수비크만 관리 당국에 요구하는 보상금은 30만페소로 한국 돈으로 약 760만원에 해당한다. 그러나 관리 당국이 주민들에게 제시하는 보상금은 1만~2만1천페소(약 25만~53만원)에 불과하다.
현재 마을에는 보상에 합의하지 않은 121가구의 주민들이 모여 함께 살고 있다. 남은 주민들은 대부분 강제 이주 전에 살던 마을에서 30년 넘게 어업이나 농업에 종사했다. 그런데 이곳에 정착한 지 3년이 안 된 이들에게 한 달 안에 다른 곳으로 이주하라는 통보가 다시 내려졌다. 이 땅이 본래 한 리조트의 사유지라는 것이다. 애초에 이 재정착촌을 제공한 것은 수비크만 관리 당국이었다. 정부가 이곳이 사유지임을 숨겼다는 사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또다시 쫓겨나야만 하는 현실에 주민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없어 마을 한구석에 학년마다 한 학급씩 있는 초등학교를 세웠다. 한 주민은 자신도 예전에는 아이들을 충분히 교육하고도 남을 만큼의 수입을 벌어들이는 성공한 어부였지만, 강제이주 뒤에는 하루에 한 푼도 벌기 힘들다고 한탄했다. 현재 수비크조선소가 위치한 지점, 즉 주민들이 본래 거주했던 마을의 앞바다는 수심이 깊고 조류가 교차하는 까닭에 어종이 다양하고 개체 수도 풍부했지만, 조선소 건설 이후 보안요원들이 접근을 제한한다고 한다. 이제는 마을 앞 얕은 수심의 연안에서 조업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조업량은 생계 유지에 역부족이었고, 숯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한 칸의 나무집과 불에 그을리고 있는 커다란 나무토막이 전부였다.
말을 아끼는 수비크조선소 노동자들
이날 저녁 6시께 우리는 시내로 돌아와 수비크조선소의 통근버스가 도착하는 버스터미널 근처 시장으로 갔다.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시장은 포장마차 상인과 교복을 입은 학생, 한진에 자재를 납품하는 업자, 버스 운전기사, 그리고 한진에서 돌아오는 통근버스에서 내리는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로 붐볐다. 먼저 포장마차 상인들은 한진 조선소 덕분에 보장되는 수입이 적지 않다고 했다. 몇몇 포장마차에는 한진을 지지하는 메시지가 붙어 있었다. 한편 한진 수비크조선소 사무직 노동자들은 현재 일어나는 생산직 노동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입을 닫았다. 대부분의 생산직 노동자도 한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다가가 인터뷰를 요청하면 많은 노동자가 반응하지 않은 채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거나 아예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는 중립이고 싶다”고 말하는 노동자도 있었다. 인터뷰에 응한 노동자 중 한 사람은 혹시 한진과 문제가 생기더라도 노동자 단체를 통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 방안을 찾을 것이며, 노동 단체가 문제를 크게 만드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다고 했다. 어떤 노동자는 자신은 노동조합에 동참할 의사가 없으나, 한진이 노동자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했다. 버스가 한 대 두 대 터미널로 들어서고, 노동자들이 앞다퉈 포장마차에서 급한 허기를 채운 뒤 집으로 향해 가는 일상적인 풍경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마닐라로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 않은 7월19일, 한 수비크조선소 노동자가 야간 작업 중 추락해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2007년 수비크조선소가 문을 연 이래 한진노동자협회에 보고된 사망사고만 40건이 넘었다. 한진조선소는 이제 조선소가 아니라 무덤이라고 노동자들은 말한다.
네팔에서 온 친구는 노동권에 대한 기본적 지식조차 없는 기업이 어떻게 대기업이 될 수 있었는지 의아해하며 한국의 노동환경이 아직도 이런 지경인지, 한국의 발전이라는 것이 결국 노동자를 탄압해 얻어낸 성과인지를 물어왔다. 아시아의 경제발전 모델이라는 한국의 위상이 위선에 불과한 것인가 물어오는 그녀에게, 선뜻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들려줄 수 없었다.
얼마 전 마카바얀 총무인 프레시는 8월4일에 예정돼 있던 2차 필리핀 노·사·정 간담회가 한진 쪽의 참석 거부로 취소됐다는 전자우편을 보내왔다. 직접 고용의 책임을 회피하며 수비크조선소 내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한진중공업의 태도를 다시 보여주는 일이었다. 외부의 비판적 목소리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한진의 태도는 더욱 비판받아 마땅하다. 한진중공업이 말하는 것처럼 문제가 없다면 어째서 대화에 응하지 않는가.
한국에서 만난 수비크조선소
지난 8월5일, 방학을 맞아 잠시 한국에 돌아와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앞을 찾았다. 한진중공업 건물 맞은편에는 웅장한 수비크조선소의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홍보 간판이 걸려 있었다. 파란 수비크만의 물결과 더불어 근사한 조선소의 사진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애써 포장하려는 듯 보였다. 무겁게 영글어가는 소금꽃나무를 짊어진 영도와 수비크의 노동자들, 그리고 ‘노동자’라 불리는 모든 이를 위해 김진숙은 푸른 크레인 위에서 7개월이 넘는 시간을 살아왔다. 기업의 생리가 이윤 추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사회적 책임을 부정하는 기업의 윤리는 부정(不正)하다. 노동자는 대체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마침내 ‘한진중공업’의 이름을 달고 바다로 나갈 배를 만들어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땀, 그들의 존엄성과 삶을 영위하게 하는 그 고귀한 노동을 인정하라.
문아영 유엔평화대학교 평화교육 석사과정

[사설] 2억원이 어떻게 ‘선의에 입각한 돈’일 수 있는가


이글은 한겨레신문  2011-08-28자 사설을 퍼왔습니다.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어제 기자회견을 열어 지난해 6·2 지방선거 당시 교육감 후보를 사퇴한 박명기 교수에게 2억원을 주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후보 단일화 대가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가 교육감 출마 과정에서 많은 빚을 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안타까워 돈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곽 교육감의 이런 해명은 이해하기 어렵다. 곽 교육감은 앞으로 진행될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른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곽 교육감은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대가에 대한 어떤 약속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럴 개연성이 크다고 본다. 당시 단일화는 시민사회 원로들의 중재로 이뤄졌다. 설사 박 교수가 사퇴 대가를 요구했다고 해도 그런 약속이 명문화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모든 게 해명되는 건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 후 곽 교육감이 박 교수에게 2억원을 주었다는 것이다. 단일화 당시 대가 약속이 없었다고 해서 나중에 2억원을 준 것이 문제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선의로 2억원을 주었다는 것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곽 교육감은 개인이 아니라 서울시 교육감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공인이다. 2억원의 돈을 받은 박 교수도 그저 그런 개인이 아니다. 두 사람 관계는 지난해 교육감 후보 선출 당시 경쟁자였다가 한 사람은 교육감에 당선되고 한 사람은 사퇴한 특수한 사이다. 이런 사이에 개인적인 선의로 2억원을 주었다는 걸 누가 수긍하겠는가.
법학 교수였던 곽 교육감이 ‘인정 있는 법’을 내세우며 2억원 지원에 불법성이 없음을 강조하는 것도 구차해 보인다. 물론 실정법을 글자 그대로 현실에 적용할 경우 사회가 너무 메마르고 인간적인 측면이 도외시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사회적 약자에게나 적용될 논리다. 국민의 모범이 돼야 할 고위 공직자에게는 오히려 더욱 엄정하게 법 적용을 해야 한다.
오세훈 서울시장 사퇴 직후 본격화한 이번 수사는 그 착수 시점부터 정치적 의도를 의심받아 왔다. 하지만 곽 교육감이 ‘진실’을 밝힌 만큼 이에 대한 검찰 수사와 법적 판단만 남은 것 같다. 검찰은 정치적 의도를 철저히 배제하고 법과 원칙에 따른 수사를 해야 할 것이다. 곽 교육감도 사법당국의 판단에 따라야겠지만 사법적 판단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인지는 신중하게 고민하기 바란다.

중국, 세계자본주의의 운명을 거머쥐다 [Cover Story] 세계경제 새 길을 묻다- ① 중국은 소방수가 될 것인가


이글은 한겨레신문 Economy Insight의 기사를 퍼왔습니다.
안드레아 뵘 Andrea Böhm 정치부 기자
우베 장 호이저 Uwe Jean Heuser 경제부 편집장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오늘 아침 민병대와 시위자들 간에 다시 무력 충돌이 빚어졌다. 맨해튼의 은행과 상점은 일제히 문을 닫았다. 지난해 미국 정부가 사회보장 예산의 집행을 중단한 이후, 미국 시민들은 소비를 거부하는 차원에서 대도시의 쇼핑몰과 중앙 광장을 매주 점거하고 있다. 
중국 총리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워싱턴에서 대규모 시위가 예정돼 있다. 중국의 신용평가사들은 미국 국채 신용을 디폴트 수준으로 강등했다. 미국 정부가 이미 크게 삭감된 국방 예산을 추가로 3분의 1가량 더 삭감하지 않으면 미국의 추가 구제금융 지원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중국은 단호히 입장을 밝혔다.”
지난 8월19일 다우존스 지수(1.57% 하락)와 나스닥(1.62% 하락)이 동시에 하락하는 등 더블딥에 대한 우려가 높아진 미국의 미래를 그리면 이 정도는 되지 않을까?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게리 슈테인가르트는 지난해 발표한 소설 (Super Sad True Love Story)에서 미국의 미래 모습을 이와 비슷하게 그리고 있다. 그는 미국의 몰락을 묘사한 소설에서 은행 시스템 붕괴를 소재로 삼을 계획이었는데, 소설 집필 중에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는 사태가 실제로 벌어졌다.

지난 8월9일 영국 맨체스터에서 진압경찰들이 소요 사태를 일으킨 청년들을 쫓고 있다. 경제위기로 인한 소요사태는 미국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잃어버린 10년’ 세계가 경험할 수 있는 상황 
2011년의 상황 역시 그의 소설 내용을 현실에서 그대로 답습하기라도 하듯 전개되고 있다. 소설 내용처럼 실제로 지난 7월 셋쨋주에 중국의 한 신용평가사가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 가능성을 경고했다. 또 국제적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 8월5일 미국의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한 단계 강등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경제 현실은 소설가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유럽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 부도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있는 나라들이 그리스와 포르투갈에서 스페인과 이탈리아로까지 확대되면서 유럽 전체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유로화의 종말’과 ‘미국의 국가 부도’는 최근 뉴스 지면을 도배하는 주요 이슈다. 이에 따라 국제통화기금(IMF)이 유럽 국가들에 긴축재정을 지시하고 미국을 향해서는 과도한 국가 채무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지시와 경고는 주로 아르헨티나, 타이 혹은 가나 등 비서방국가들을 주 대상으로 한 점에서 국제경제의 급변한 상황을 느끼게 한다.
유럽과 미국은 언론에서 그들의 몰락에 대한 보도가 무한 반복되면서, 역설적으로 지금의 재정위기에 오히려 무감각하게 됐다. ‘어차피 상황은 계속 악화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 깊이 박히면서 현 재정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각성 효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현재 유럽과 미국의 경제를 위협하는 큰 위험은 바로 ‘유럽과 미국 자신’이다. 이번 위기가 심각한 이유는 유럽과 미국의 위기이자 유럽과 미국의 정책, 그리고 그들 삶의 방식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즉, 이제 그들의 방식이 더 이상 세계경제의 모델이 될 수 없다는 신호음인 것이다.
유럽과 미국의 재정위기로 인해, 전문가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더디게 이뤄질 것으로 내다본 ‘중국으로의 지정학적 권력이동’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지정학적 권력이동은 미국과 중국 간의 양자관계는 물론이고, 유럽의 정치적 미래와 글로벌 위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중국은 최단기간에 미국의 최대 채권국으로서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되었고, 유럽은 정치적으로 스스로를 구시대적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다. 유럽과 미국이 과연 다시 헤게모니 세력으로 글로벌 무대에 컴백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한 차례 경기침체를 겪은 미국과 유럽이 2010년만 해도 회복세를 보이면서 금융위기는 지났다고 다들 믿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었다. 유럽과 미국은 파산 위기에 놓인 은행들은 구제했지만, 이 과정에서 국가재정은 파탄이 났다. 특히 분수에 맞지 않게 국가예산을 마구 써댄 그리스 등 유럽의 일부 국가들은 심각한 부도 위기에 처했다. 서구 선진국들은 1929년 대공황 이후 가장 위험한 딜레마에 처해 있다. 2000년대 들어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경제 거품이 위험한 수준으로 커졌다. 위험천만하게 커진 경제 거품은 2008년 그리스와 영국, 스페인과 아일랜드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미국과 유럽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재정 적자를 감축하지 못하면, 서구에서 시작해 아시아로 전파된 대공황이 언제든지 쓰나미처럼 전세계를 휩쓸 수 있다. 일본인들은 1990년대 초 거품 붕괴 뒤에 이어진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의 불황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렀지만, 이제부터는 전세계가 함께 겪는 잃어버린 10년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잃어버린 10년이 되지 않도록 세계가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합중국의 해외 및 국내 부채는 자유에 대한 대가였다”고 말했다. 이 말은 지금도 미국 재무부 웹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해밀턴이 그렇게 말한 지 200년도 더 지난 지금 미국은 14조달러라는 산더미 같은 부채 위에 앉아 있다. 아무리 부채가 자유와 권력의 대가라 해도, 이제 덩치가 너무 커져 오히려 자유와 권력을 위협하는 수준에까지 이른 것이다. 

쌓여 있는 미국 100달러 지폐 뭉치. 기축통화인 달러화를 발행하는 미국 경제의 침체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세계경제가 요동치고 있다.
중국에 저당 잡힌 미국의 자유와 권력
중국은 미국이 쌓아놓은 빚더미의 가장 큰 채권자로 이미 자리잡았다. “당신의 채권자와 어떻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대화할 수 있습니까?” 미국과 중국의 양자관계를 빗대어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한 이 말은 대외비로 분류됐지만, 위키리크스 덕택에 몇 달 전 세상에 공개됐다. 중국이 보유한 미국의 국채는 어느새 1조1500만달러를 돌파했다. 중국은 정치적으로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개입을 거부했지만, 경제적으로 볼 때 미국 국채 매입을 통해 두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꼴이 되었다.
중국이 최대 채권국이 되면서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크게 늘어났다. 외형적으로는 이런 모습이 아직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가령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중국의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난 7월16일 달라이 라마와 만났다. 물론 중국은 이에 항의했다. 하지만 이는 두 나라의 상징적 대결에 불과하다.
중국과 미국이 상징적 대결을 넘어 실제 대립 구도에 처하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채권국 중국이 이미 칼자루를 쥔 상태다. 대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현재 대만에 대해서는 미국이 사실상 독립성을 보호해주고 있지만 중국은 자기 영토라고 주장한다. 대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실제 대립하는 상황까지 치닫게 된다면, 중국 정부는 미국에 군사적 위협을 가할 필요조차 없다. 중국 정부가 미국 국채 매각을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기사 하나면 충분하다. 채무국인 미국은 당장 대만에서 손을 뗄 것이다. 중국이 미국 국채 매각 의사를 더 강하게 드러내면, 미국은 더한 행동도 하게 될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반체제 인사들을 위해 힘쓰지도 않고, 중국의 해적 제품에 대해 단호한 대응도 하지 않고, 북한의 핵확산을 막을 의욕도 잃을 수 있다.
역사가이자 미국 외교위원회(CFR) 연구위원인 서배스천 맬러비는 미국 정부에 대해 “‘부채 위에 쌓은 권력은 언젠가 흔들리기 마련’이라는 역사의 교훈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중국은 지금까지 미국과 유럽의 재정 적자 위기에 단지 구원투수로 나서고 있다. 승리자로 행사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중국 내 정치적 상황이 중요한 요인이 됐다. 중국 수도 베이징에 주재한 한 서구 외교관은 이와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중국 관료들 중에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크게 확대된 중국의 세계적 영향력을 내세울 생각을 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권력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유럽시장 공략 위한 중국의 당근, 직접투자와 국채 매입
미국 국채를 대거 보유한 중국은 자신이 강력한 정치적 카드를 손에 쥐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채무국이 몰락하면서 일으키는 불똥이 결국 채권국에도 튄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중국 정부 정책의 최우선 순위는 현재 자국의 안정이다. 중국인들도 점점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을 만큼, 중국의 양극화 문제는 훨씬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승리자가 아닌 구원투수가 됨으로써, 중국 정부는 서구의 적자 문제를 중국 경제의 안정화를 꾀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재정 적자 위기는 무엇보다 중국 기업들이 유럽 시장에 뿌리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이전까지 높은 비용 때문에 접근할 수 없던 유럽 시장을 재정위기 뒤 저렴한 비용으로 두드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또한 유로화 매입은 중국이 달러 의존성을 낮출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총리와 주석 등이 앞장서서 유럽을 방문해 중국의 유럽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지난 6월 말 10여 명이 넘는 장관들을 대동한 독일 베를린 국빈 방문에서 “위기에 처한 것은 유럽 통화가 아닌 일부 유럽 국가들의 재정예산일 뿐”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중국은 유럽의 재정 적자 위기를 화두로 삼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이런 조심스러운 태도는 중국-독일 정부회담에 참석한 중국 쪽의 한 참석자가 “중국은 유럽에서 ‘새로운 제국주의 권력’이 아닌 ‘조력자’로 각인되기를 원한다”고 말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이 유럽의 조력자로 각인되는 것이야말로 유럽 쪽에서 정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부분이다. 중국은 자신들의 외환보유고에서 유로 자산 비율을 3조유로 이상으로 올리겠다고 유럽에 약속했다. 불과 한 자릿수에 불과하던 중국의 유로화 보유 비율은 지난 몇 년 사이 25%가량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지난 7월26일 한 중국인이 홍콩 외환거래소 앞에 세워져 있는 위안화와 달러, 유로를 배경으로 한 광고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이제 중국의 유로 보유고의 속내를 들여다보자. 유로존은 이미 중국에 7천억달러 채무를 지고 있다. 중국 쪽은 유로존의 중국 채무액이 앞으로 계속 늘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중국은 재정 적자 위기에 빠진 유럽 국가들에 경제성장 촉진을 위한 직접투자액을 늘리면서 국채를 더 매입할 것을 약속한 상태다.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국무총리는 지난 6월 말 국빈 방문한 원자바오 중국 총리에게서 직접투자와 국채 매입 약속을 받은 뒤 벌써 재정위기의 근심에서 해방된 것처럼 기뻐했다. 중국은 이런 직접투자와 국채 매입을 통해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고, 유럽 시장을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 자국의 안정화와 발전을 위해 예나 지금이나 미국과 유럽을 계속 필요로 한다는 것은 안도할 만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중국의 처지에서 말하면, 서구의 몰락이 지금 시점에서는 너무 이르다고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럼으로써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가들)이 서구에 대한 승리자가 아닌 구원투수 구실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중국이 서구의 구원투수로 나서지 않는 것이 서구에는 차라리 좋을 수도 있다. 인권을 무시하고 정치적 반대파를 억압하는 정권에 의존하는 것은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국무총리에게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유럽연합으로서는 절대 달가운 일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의 대응책은 ‘임시방편’일 뿐
중국이 구원투수로 나서고, 유럽과 미국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잃게 되는 과정에서 ‘전 지구적 과제 해결’이 늦춰질 수 있다는 점도 관계자의 우려를 높인다.
독일개발정책연구소(DIE) 디르크 메스너 소장은 올해 초 앞으로 10년 동안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글로벌 개혁 의제’로 친환경적 세계경제로의 전환, 아프리카의 정치적 및 경제적 현대화, 더 강력한 주요 20개국(G20)이라고 쓴 바 있다. 그는 “유럽이 다가오는 10년 동안에도 계속 힘을 잃게 된다면, 유럽의 소국가들과 중간 규모 국가들은 자국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세계화의 동네북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DIE와 밀접하게 협력 중인 남아프리카 국제문제연구소 엘리자베스 시디로포우로스 소장은 “미국 정부와 유럽 국가 정부들이 현재 ‘자아반성’에 여념이 없다는 것을 일견 이해는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디로포우로스 소장은 “IMF에서 시작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그리고 기후보호 정책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 개혁이 시급한 상황에서 유럽과 미국의 자아반성은 최악의 타이밍”이라고 지적했다. “2008년과 2009년 금융위기를 겪은 뒤 전세계는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하지만 지금 어떤 변화를 해야 하며, 기존 집을 허물고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할지, 아니면 기존 집을 리모델링해야 할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전세계는 서 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미국과 유럽이 전 지구적 개혁이 절실한 이 시점에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이 전 지구적 개혁에 관한 의견을 조율할 수만 있어도 큰 성과를 올릴 수 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의 관계는 그렇지 못하다. 여기에는 유럽의 중심국가인 독일 정부가 파트너 국가들이 기대하는 주도적 역할을 도외시하는 탓이 크다. 그리고 독일 정부와 미국 정부 간에는 침묵만이 흐르고 있다. 독일의 기민당·기사련의 한 미국통은 “유럽과 미국이 동시에 재정위기를 겪으면서 전략 지정학적 합의라는 것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독일과 미국 사이에 위원회나 기관이라는 것도 없고, 특히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사이도 원만하지 못하다.”
미국과 유럽은 현재의 위기에 대한 대응책을 내놓고 있지만, 이는 잠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는 ‘임시방편’일 뿐 구조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대대적인 변혁’을 시작하기 위한 이런 조그만 걸음이 미국과 유럽에 필요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대적인 변혁이란 대체 무엇일까?
“2012년 12월1일 속보다. 방금 선출된 공화당 출신의 미국 대통령은 초당파적인 긴축재정안을 오늘 선포했다. 사회보장비뿐만 아니라 국방부 역시 대대적으로 국방비를 감축해야 한다.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의 부유층 감세 정책도 철폐됐다. 공화당 출신의 미국 신임 대통령은 11월 대선에서 기독진보주의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민주당 후보를 힘겹게 이길 수 있었다. 기독진보주의자들은 지난 몇 년간 기독우익 세력의 패권에 치명타를 입혔다. ‘부유층이 모든 것을 가져가는’, 전혀 미국적이지 않은 이념을 이제는 극복할 때라고 신임 대통령은 외쳤다. 또한 과도한 온실가스 배출 역시 미국이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유럽과 미국의 기후협약이 과도한 온실가스 배출에 제동을 걸 것이라고 밝혔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니콜라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유럽연합 이사회 의장국의 장클로드 트리셰 신임 의장이 오늘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발표한 재정 적자 위기 해결책은 유럽연합 공동의 안정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혹독한 재정 적자 축소 방안과 더불어 최소 몇 년간 유로존을 떠나야 하는 그리스를 위한 대대적인 부흥 프로그램이 시작될 것이다. 같은 시각 이탈리아의 신임 총리는 이탈리아도 독일처럼 국가 부채 상한선을 헌법에 명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지난 8월8일 중국의 일간신문들이 일제히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과 그에 따른 세계경제 위기 상황을 전하고 있다(왼쪽). 지난 1월18일 후진타오 중국 주석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워싱턴 거리에 미국과 중국 두 나라 국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미국이 현재 경제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언젠가 중국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오른쪽).
미국·유럽, 근본 개혁 통해 헤게모니 되살릴까?
이 시나리오는 미국과 유럽이 다시 헤게모니를 가지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의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시나리오다. 다만, ‘현재’로서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서구가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개혁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면 미국과 유럽의 몰락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앞으로 몇 년 뒤에는 미국과 유럽의 몰락을 다룬 소설이 출판시장에 쏟아져나올 것이다. 이번에는 공상과학(SF) 소설이 아닌 현대문학에서 말이다. 
ⓒ Die Zeit·번역 김태영 위원

2011년 8월 28일 일요일

[김상조 칼럼]복지부동·과잉충성의 최악 조합


이글은 경향신문 오피니언 김상조칼럼의 기사를 퍼왔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가장 싫어하는 말은 레임덕 현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대통령의 임기가 1년 반이나 남은 현 시점에 벌써 그 절름발이 오리가 도처에서 목격되고 있는 듯하다. 정치학에 문외한인 필자가 무슨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하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과거 정권 때도 봤던 현상, 특히 정책결정자들의 행동 유인이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현상이 이미 시작됐다는 느낌이다.

한편으로, 다음 정권에서 새로운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은 논란의 소지가 있는, 따라서 책임 문제가 따르는 정책 결정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가는 복지부동의 묘기를 선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다음 정권에서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현 정권에서 성과를 만들려는, 그래서 단기적 보상을 받아내려는 과잉충성의 자세를 취한다. 해야 할 일을 외면하는 복지부동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밀어붙이는 과잉충성의 최악 조합, 이것이 레임덕 현상의 대표적 징후가 아닐까 한다. 

먼저, 복지부동의 사례. 론스타의 외환은행 대주주 적격성 심사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론스타는 산업자본으로 판정되거나 주가조작 사건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외환은행의 대주주 자격을 상실한다. 이 때 감독당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6개월 내에 초과지분을 매각하라고 명령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하나금융이 외환은행을 인수하겠다고 손들고 나선 상황에서 매각명령은 곧 론스타의 ‘먹튀 행각’을 승인하는 꼴이 될 것이고, 그 뒤에 이어질 온갖 정치적 비난을 예상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감독당국은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로 인해 외환은행과 국민경제가 부담할 비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축은행 문제도 마찬가지다. 10년 만에 저축은행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것은 그만큼 저축은행 업종 전체의 부실이 심각하고 그 수익모델이 취약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적자금 투입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 방법은 정권과 관료들에게 자살행위라는 것 역시 너무나 명백한 경험적 사실이다. 그래서 공적자금의 ‘공’자도 꺼내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선, 저축은행 부실의 처리비용을 모두 은행에 떠넘기는 편법과 관치만 난무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저축은행과 건설회사를 둘러싼 불확실성은 더욱 증폭되고, 부동산시장의 거래는 실종되고, 가계부채의 시한폭탄은 똑딱똑딱 초침이 돌아가고 있다.

다른 한편, 과잉충성의 대표적 사례는 4대강 사업과 감세정책일 것이나, 이는 필자가 아는 게 없으니, 다른 문제를 보자. 다음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팽당할 것이 확실한 사람은 누구인가. 경제 쪽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강만수 산은지주 회장과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일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최근 행보는 과잉충성을 넘어 자아실현 단계로 넘어갔다. 

낙하산 인사 문제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은인자중해도 지나치지 않을 강만수 회장이 오히려 우리금융을 인수해 메가뱅크의 꿈을 실현하겠다고 나섰다. 이를 위해 금융지주회사법 시행령상의 규제를 완화하는 특혜도 요구하고 있다. 1년 반 후에 물러날 분이 대형 인수·합병(M&A)의 화학적 결합을 이끌 리더십을 어떻게 발휘하겠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최중경 지경부 장관에게 주어진 최대 과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이다. 그런데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꺼낸 이익공유제가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연일 비난을 쏟아붓고 있다. 모르긴 해도, 얼마 남지 않은 기간에 확실한 성과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엉뚱한 제안으로 인해 자신의 구상(?)이 엉클어졌다는 조급증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최고 의사결정자 간의 협력도 제대로 안 되는데,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이 가능하겠는가.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날까지 업무를 놓지 않겠다고 했다. 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았듯이, 이명박 대통령의 업무 추진력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통령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확히 구분해 줌으로써 정책의 구체적 내용을 결정·집행할 관료들의 유인 구조를 정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레임덕 현상을 최소화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반대되는 현상이 속출하고 있다. 다음 정권을 저울질하는 복지부동과 현 정권에 목을 매는 과잉충성의 최악 조합 속에서 정부 정책은 급속히 신뢰성을 잃어가고 있다. 안타깝다. 결국 대통령이 선택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다.

[사설]현인택 통일부 장관 이번엔 교체해야


이글은 경향신문 2011-08-26자 시설 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이재오 특임장관 등 정치인 출신 장관과 함께 현인택 통일장관의 교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여당인 한나라당조차 홍준표 대표 등이 나서 현 장관의 교체 필요성을 공공연하게 거론하는 상황이다. 현 장관 교체 요구가 그만큼 넓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현 장관을 교체해야 하는 이유는 많다. 당장 한반도 주변 상황이 크게 변하고 있다. 북한의 핵 실험으로 소원해졌던 북·미관계가 대화 분위기로 반전하고 있으며, 대북강경책을 지속해온 일본에서는 점차 대북 대화론이 힘을 얻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잇따른 정상회담으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경제적 실리를 챙기고 있다. 자칫 강경책만으로 일관하다가는 우리가 소외당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대통령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대통령이 남북관계 개선에 뜻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통일장관을 교체함으로써 그러한 노력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현 장관은 지난 2년 반의 재임 동안 남북관계 개선 노력보다는 줄곧 대북 압박에 앞장섰다. 이산가족 상봉이나 대북 인도적 지원에도 그는 원칙론만 고수해 최소한의 대화문마저 닫히도록 만들었다. 북한이 금강산 관광사업에 종지부를 찍는 데도 그는 아무런 대책없이 사실상 수수방관했다. 또 현 장관은 여야 합의로 국회 남북관계발전특위가 신청한 개성공단 방문마저 불허했다. 남북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북핵 해결을 앞세우는 그는 통일장관이 아니라 외교장관이나 국방장관이 내어야 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는 그 자리에 적임자가 아니었다.

통일장관을 교체한다고 해도 이 대통령이 대북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는 한 남북관계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당연한 지적이다. 하지만 대북 강경론의 상징적 인물인 현 장관의 교체는 그 자체가 갖는 의미가 커 북한의 태도 변화를 유도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는 정부의 운신폭 확대로 연결될 수 있다. 

현 장관 교체론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지난해부터 줄곧 그러한 목소리가 나왔으며 지난 ‘5·6 개각’ 때는 후임자 이름까지 나돌았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강경 보수파의 목소리와 ‘회전문 인사’라는 비판을 우려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 대통령에게 이번 개각은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볼 수 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아야 한다.

자연이 낳은 '천년숲'… 인간의 보살핌은 약일까 독일까


이글은 한겨레신문 조홍섭기자블로그 물바람숲의 글을 퍼왔습니다.


고려 때부터 비자 채취한 천연림
탐방객 급증과 비자나무 위주 관리로 자연성 위협

숲을 잘 보전하려면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사람이 적극 관리해야 하는가. 또 어쩔 수 없이 손을 댄다면 어디까지가 적당한 간섭일까. 제주에서 가장 많은 탐방객이 몰리는 아름다운 두 숲이 이런 고민에 싸여 있다. 천년 숲인 구좌 비자림과, 생긴 지 50년밖에 안 되는 한경면 저지오름 숲을 찾아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구좌 비자림 산책로. 500~800년생 비자나무 거목이 산책로를 가로막는다.
북제주군 구좌읍 평대리의 비자림에 들어서면 범상치 않은 기운이 엄습한다. 착생식물인 콩짜개덩굴이 푸른 비늘처럼 뒤덮은 회갈색 거목이 주목과 비슷한 바늘잎을 반짝이면서 사방에 가득 들어차 있다. 화산 분화로 생긴 토양인 송이를 깐 보행로의 붉은 빛이 숲 바닥과 수피, 하늘까지 물들인 녹색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중산간지대의 다랑쉬오름과 돛오름 사이에 긴 타원형으로 들어선 비자림은 면적 44만8000여㎡에 500~800년생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자리 잡고 있다.

최고령 나무는 900살에 육박한다. 두 번째는 2000년 ‘새 천년 나무’로 지정된 비자나무로 수령은 800살이 넘고, 굵기가 거의 네 아름에 키가 14m에 이르러 이 숲에서 가장 웅장하다. 이런 터줏대감 때문에 구좌 비자림은 ‘천년 숲’으로 불린다.

▶구좌 비자림 산책로. 콩짜개덩굴 등 착생식물로 덮인 비자나무 거목이 압권이다.
▶새천년비자나무. 수령 800살에 굵기는 네 아름이 넘는다.
호랑이 나올까 겁났던 70년대 비자림

동행한 김찬수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산림연구소 박사가 비자나무 사이에 자귀나무, 팽나무, 비목나무 등이 모여 서 있는 곳을 가리켰다. “과거에 비자나무가 죽어 숲에 틈이 생기자 생겨난 선구종입니다. 숲이 계속 울창했다면 저절로 나지 못하는 나무이지요.”

비자림이 지난 수백,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과거 이 비자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김 박사는 “1970년대 숲을 조사하다 길을 잃었던 적이 있다”며 “호랑이가 나올까 겁났을 정도로 으스스했다”고 말했다.

빽빽한 하층 식생과 덩굴로 원시분위기를 물씬 풍기던 구좌 비자림은 1999년 숲 가꾸기 사업 대상이 된 이후 비자나무만 주로 보이는 숲이 됐다. 

설명을 듣고 보니 비자림은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흔적이 역력했다. 비자나무를 덮던 덩굴식물과 다른 나무들은 상당부분 제거됐고 가지치기, 수목치료, 지지대 설치 등으로 비자나무를 보호하고 있었다. 비자나무에는 나무마다 일련번호 팻말을 달아 관리하고 있다.
▶줄 맞춘 비자나무. 수백년 전에 인위적인 식재가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비자림 탄생의 비밀

하성현 제주도 비자림관리소장은 “숲을 가꾸지 않고 방치했으면 비자림은 모두 죽어 사라졌을 것”이라며 “송악, 줄사철, 등수국, 마삭줄 등 덩굴식물이 비자나무를 덮으면 광합성을 하지 못하거나 무게로 가지가 부러진다”고 말했다.

그는 “숲을 내버려 두면 빨리 자라는 후박나무와 아왜나무가 금세 뒤덮는다”고 덧붙였다.

▶덩굴식물인 송악이 휘감은 비자나무.
이런 논란은 구좌 비자림의 탄생 비밀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의 다른 비자림과 달리 구좌의 비자림에는 조림 기록이 없다. 천연림이라는 얘기다.

김찬수 박사는 “제삿상에 올린 비자씨앗을 뿌린 것이 숲이 됐다는 속설이 있지만 과학적으로 천연림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말했다. 한라산 1000m 이상 고지대에 비자나무가 자생하는데, 지형상 그 씨앗이 계곡물에 실려와 구좌에서 싹을 텄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연이 낳았다고 해도 기른 것은 사람이다. 비자는 구충제로 중요한 진상품이었기 때문에 비자림도 철저히 보호됐다. 구좌 비자림은 자연과 사람이 절묘한 공조로 이룩한 숲인 것이다.

원론적으로 본다면, 비자나무숲을 내버려둔다고 비자나무가 모두 죽는 것은 아니다. 덩굴에 덮인 비자나무가 죽으면 덩굴도 죽고 숲은 새롭게 출발한다. 어린 나무에서 죽어가는 나무까지 모두 있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런 숲의 모습이다.

그러나 구좌 비자림은 장기간 사람이 보살펴온 전통 마을 숲에 가깝다. 면적도 그리 넓지 않아 자연의 손길에 내맡기기엔 불안하다. 김 박사도 “어느 정도 개입은 불가피하다”고 인정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

▶숲가꾸기가 이뤄지지 않은 곳의 비자림.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제주도는 비자림 관리에 연간 3억 원을 들이고 있다. 덩굴을 제거하고 산책로를 조성하는 것이 주요 사업이다. 걷기 열풍과 함께 올 들어만 12만 명이 찾은 상황에서 나무를 보호하고 산책로를 늘리는 것이 현안일 뿐 숲의 장기적 미래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는 없어 보인다. 비자나무의 노령화를 대비해 후계목은 양묘장에서 따로 기르고 있다.

비자림 오른쪽 숲 가꾸기를 덜 한 곳에 가면 비자림의 과거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덩굴과 착생식물로 뒤엉킨 열대 정글과 흡사한 숲 군데군데에 비자나무가 서 있다. 바람직한 비자림의 미래는 아마 현재의 숲길과 이곳의 중간쯤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비자나무란

▶비자나무 씨앗과 잎
주목과의 침엽수로 우리나라 남부와 제주도, 일본 중남부에 분포한다. 느리게 자라기로 유명해 100년 지나야 지름이 20㎝ 정도밖에 크지 않는다. 대신 목재의 재질이 치밀하고 고와 건축, 가구, 바둑판 등의 고급 재료로 쓰였다.

비자나무의 씨앗은 구충제로 요긴하게 쓰였다. 백양사, 금탑사 등 사찰의 비자림은 모두 주민에게 구충제로 쓰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 동의보감엔 ‘비자를 하루 일곱개씩 7일간 먹으면 촌충이 없어진다’는 처방을 하고 있다.

고려와 조선에 걸쳐 비자는 주요한 진상품이었고 이에 따른 애환도 많았다. 특히 조선 후기 세제가 문란해져 흉년과 풍년에 무관하게 일정량의 비자를 징수하자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비자나무를 일부러 베어버려, 구좌읍 등 일부 지역에만 남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연 10만 탐방 '저지오름 숲길'

▶저지오름 둘레길의 숲 터널.
곰솔 병풍, 낙엽 양탄자
'덩굴의 습격'을 어쩌나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의 저지오름 숲길은 걷기 편한데다 자연성을 간직해 탐방객이 몰리고 있는 곳이다.

높이 239m의 봉우리로 제주도에서는 흔히 보는 오름이지만 숲길에 접어들면 전혀 딴 세상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오름에는 등고선을 따라 두 개의 둘레길이 있다. 숲길 들머리의 현무암 계단을 올라 1.5㎞ 거리의 둘레길을 걸으면 오름의 아랫부분을 한 바퀴 돌아 제자리에 돌아온다.

곰솔의 낙엽이 깔려 푹신한 산책로 양쪽엔 담팔수, 자금우, 소태나무, 예덕나무, 보리수나무, 꾸지뽕나무 등의 난대식물이 자라고 있다. 송이로 만든 적갈색 보행로 옆의 고사리밭이 더욱 짙푸르다.

오름의 분화구에 오르면 다시 둘레길이 펼쳐진다. 이곳엔 난대림이 더욱 빽빽하게 우거져 숲 터널 밑으로 좁은 보행로가 나 있다.

▶분화구에서 내부의 모습. 20~25만 년 전 화산 분화가 일어난 곳이다.
둘레길에서 다시 나무 데크를 타고 내려가면 분화구 안의 전경을 볼 수 있다. 1950년대까지 무, 보리, 감자를 재배했던 분화구 안과 사면은 덩굴식물로 뒤덮여 원시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서울의 자녀와 함께 숲길을 찾은 이정열(68)씨는 “걷기 편하고 자연을 잘 살렸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생명의 숲이 주관하는 2007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데 이어 최근 곶자왈을 품은 올레길과 연결되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 숲길에는 해마다 약 10만 명의 탐방객이 찾는다.

그러나 저지오름은 1960~70년대까지 민둥산이었다. 숲길 조성을 주도한 주민 김태후(46·제주도 한라산연구소 직원)씨는 “어릴 때 오름 꼭대기에서 억새나 띠로 썰매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놀이를 했을 정도로 나무가 없었다”며 “1980년대에 방목이 중단된 뒤부터 나무가 커지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산불 확산을 막기 위해 1970년 오름에 설치한 방화선을 숲길로 바꾸는 작업에 나서 2006년 공개했다. 그는 “70대인 노부모도 다닐 수 있도록 평탄하게 숲길을 만들었다”며 “힘이 들거나 험하지 않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며 걷기에 좋다”고 말했다.

저지오름은 5개 자연마을 한 가운데 있다. 유명해진 아름다운 숲이 주민들에게는 자랑거리다. 한경면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쓰레기와 부러진 나뭇가지 등을 치우는 자원봉사를 하던 조점례(62)씨는 “숲길은 저지의 얼굴이 됐다”고 말했다.

▶송악 덩굴에 감겨 죽은 곰솔
그러나 이곳에서도 숲의 관리는 난제이다. 송악, 상동나무, 청미래덩굴 등이 곰솔을 휘감아 죽이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어른 손목 굵기의 송악에 감겨 고사한 곰솔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김씨는 “한 두 그루면 자연성을 위해 그대로 두겠지만 결국 일부는 제거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저지오름의 소나무숲은 언젠가 난대림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이 관리하는 숲길에서 곰솔과 덩굴식물의 공존은 쉽지 않은 실험이다.  

제주 구좌, 한경/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이 기획은 복권기금(산림청 녹색사업단 녹색자금)의 지원으로 마련됐습니다.

파워블로거, 그 ‘파워’의 이면 [김국현의 IT 인문학]


이글은 한겨레신문 Economy Insight의 기사를 퍼왔습니다.
김국현 정보기술 칼럼니스트
‘파워블로거’라는 단어에 불편한 함축이 스미게 된 것은 비단 최근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최근의 사건이란 공동구매로 유명한 어느 주부 블로거가 추천한 제품의 유해성이 사회적으로 이슈화하면서 중개 수수료 문제가 드러난 일이다. 어쨌거나 파워블로거가 추천한 제품들마다 사실상 커미션이 뒤따른다는 사실이 드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배반감에 휩싸였고, 결국 공정거래위가 나서서 ‘기만적 추천·보증 행위와 관련된 대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생산 아닌 유통의 민주화
파워블로거라는 이 외래 단어에는 늘 미묘한 위화감이 뒤따랐다. ‘파워’라는 말 때문이다. 일종의 권력을 암시하는 ‘파워’에는 그 자체로 경계심이 들 수밖에 없는데, 거기다 새로운 파워 개념이라고 하니 듣는 이마다 그 힘에 대해 제각각 서로 다른 정의를 내리게 된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창조하는 힘, 표현하는 힘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세계를 바꾸는 힘이었다.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내 상품을 선전해줄 힘이었다. 
인정하기 싫거나 인정할 수 없는 힘과 만날 때 우리는 불편해진다. 파워블로거의 파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블로거란 글과 사진으로 표현하고 창조하는 이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표현하고 창조하는 일의 파워란 결국 그런 것이었나 하는 어색함을 떨쳐내기 어렵다.
이 어색한 느낌은 블로거의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주체와 대상 모두에게 일어난다. 주체인 블로거는 방문자나 팔로워가 이만큼 존재한다며 우쭐해지기 쉽다. 그러나 그 우쭐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는 명료하지 않다. 이 불명확함 탓에, 자신의 우쭐함을 받아줄 거라 여겼던 대상 독자 및 방문객과의 사이에 불편함이 생긴다. 전통적으로 독자와 방문객이 좇는 것은 대부분 내용, 즉 콘텐츠였다. 작가나 예술가 같은 이들은 콘텐츠를 만들고, 소화하고, 여기에 자신의 색깔을 얹어 선보인다. 블로거도 응당 그러하리라 기대했다. 블로거의 태동은 누구나 콘텐츠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콘텐츠 생산의 민주화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화가 일어난 구간은 생산보다는 유통이었다. 인터넷이라는 전자 활자로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출판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기에, 누구에게나 공평한 유통의 힘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힘은 실제 가치를 만들어내는 생산력과는 달랐다. 
돌이켜보면 콘텐츠 자체의 옥석 여부보다는 ‘선행자 이득’이나 더 강력한 유통 채널의 낙점이 중요했다. 파워블로그는 남보다 먼저 블로그를 만들거나, 여하간의 이유로 포털과 검색엔진에 잘 노출된 결과로 생겨난 경우가 많았던 셈이다. 그리고 이는 꽤 공고했다. 유명해진 뒤 그에 합당한 내공, 즉 생산력을 발휘하지 못해 대중의 피로도가 증가하고 급기야 무너지는 반복은 모든 쇼비즈니스의 생리다. 그러나 블로거는 조금 다르다. 블로그라는 새로운 소통 형식을 제안하는 과정에서 그 스스로 확립된 미디어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마셜 매클루언이 “미디어는 메시지”라 했듯, 사회가 이 새로운 매체에 의존하게 된 현상 자체가 메시지가 된 것이다.
급기야 내용물이 아닌 그릇이 되어버리는 데 만족하고 또 그런 행태에 탐닉하게 된다. 방문자 수와 팔로워 수는 그 지표로 기능했다. 문제는 아직 우리 사회가 매클루언이나 블로거의 감성으로 세상을 수용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이 매체가 지닌 메시지와 콘텐츠가 아니라 이 새로운 매체의 창궐 자체가 지닌 메시지라는 주장은 수용하기 쉽지 않다. 오히려 사회는 여전히 매체에 중립성을 기대한다. 매체란 거룩한 내용을 성스럽게 담아내는 영매와도 같다는 관념이 머릿속에 박혀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매체의 중립성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를 알면서도 또다시 좇고 있다. 나아가 매체 자체에 의도가 담기는 일을 경계한다. 콘텐츠에 광고가 섞이는 일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콘텐츠의 숨은 의도를 찾아내려 애쓴다. 그러니 블로그를 포함한 소셜 네트워크처럼, 경험이란 이러해야 해, 사회관계란 이러해야 해, 라고 매체 스스로 메시지가 되는 작금의 상황이 아직은 편치 않다.

우리 시대의 R&R, 간섭하고 간섭받기
나는 이 새로운 매체의 메시지에 ‘R&R’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왔다. 여기서 R&R이란 기업의 ‘리스펙트’(Respect)와 ‘레커멘드’(Recommend)라는 소통 행위를 말한다. 리스펙트는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와 다를 수밖에 없는 타인에 대해, 그 역시 나와 이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돌려줄 것이라고 먼저 믿으며 존중하고 경의를 표하는 사회적 약속을 뜻한다. 그렇게 하여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내 부조리를 해소하거나 당면 문제를 해결해 공동체 사회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막연히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의 공간이 인터넷이고 웹이고 블로그였다. 
그래서 인터넷의 시민들은 자문한다. 나는 과연 타자가 충분히 경의를 표할 만한 나로서 살고 있는가? 반대로 타자가 응당 받아야 할 경의를 나는 충분히 보이고 있는가? 서로 일종의 사회적 약속을 지키고 있는지를 물으며 자정 노력을 해온 셈이다. 이 리스펙트는 바로 다른 사람과 레커멘드라는 현대적 털고르기를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인간의 삶이란 쉽지 않다. 대강 먹고 자고 살 수 있어도 어딘지 모르게 가렵다. 오늘 이대로 살아도 좋을지 알 수 없어 누군가가 이 근질근질함을 해소해주기를 바라며 우리는 웹을, 블로그를, 인터넷을 헤맨다. 그렇게 믿을 만한, 인정할 만한 누군가를 만나고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원래 인생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을 네트워크의 속도로 압축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R&R다. 급기야 ‘현대인이라면 이런 것쯤은 마스터해야 해, 도시 남녀라면 이런 걸 사야 해, 열혈 엄마라면 이 정도 학원은 보내야 해, 가족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 용품은 써야 해’라고 믿는다. 그러다가 생리적·생물학적 욕구와는 무관한, 그러나 그 못지 않게 절실한 ‘어떻게 살지’에 대한 가려움의 끝에서 확신의 레커멘드를 날리는 파워블로거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레커멘드를 갈구한다. 마치 원숭이가 배를 채운 뒤 가려운 털북숭이 몸뚱이를 믿을 만한 누군가에게 맡기듯이. 그러나 진심으로 리스펙트하지도 않으면서 레커멘드를 받아들이는 일은 모두에게 위험한 일이다. 최소한의 존중과 경의라는 공감 없이 단지 유명세라는 유통의 힘에 매몰돼, 타인의 선택과 생활에 간섭하고 또 그 간섭을 용인하는 일은 씁쓸하다. 
이는 정부기관의 규제로 될 일이 아니다. 우리 자신과 사회의 성숙에 관한 문제다. 이제 우리는 아무리 예술로 맛을 낸 광고를 접하더라도 그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우리가 충분히 성숙하다면 리스펙트하지 않은 레커멘드 따위는 잡음으로 그저 흘려버릴 것이며, 무리한 레커멘드를 남발해 리스펙트를 잃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리스펙트하고 싶은 누군가를 찾아 그의 인생에 간섭하고 간섭받으며 삶의 레커멘드를 얻고 싶어할 것이다. 그것이 소통의 밸런스였고, 사회를 움직이는 활력이었다. 이 밸런스가 깨졌을 때의 소란을 우리는 요즘 파워블로거 사태로 목격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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